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소개하시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신 이래 이미 제자들 앞에서 여러 가지의 이적을 행하셨음을 우리는 소개받았습니다. 그 동안에 소개받은 이적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문둥병,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소경, 벙어리 된 자, 혈루증을 고치시고, 또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이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목적은 세상 의사들이 전연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시고, 더군다나 의학 교육을 연수하지 않은 목수가 모든 병을 즉시, 완전하게 고쳐 내므로 그가 인간이 아니라 오시리라 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음을 요한 복음 20:31 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몇 가지의 이적을 보여 주게 되는데 그 결과로 이적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께 예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란 고백을 한 좋은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죽은 자를 살리신 일도 목격했던 제자들이었는데도 특별히 오늘 소개되는 이적을 체험하고는 큰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예배를 드렸고 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제자들을 통해 처음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롭게 깨닫듯이 오늘 소개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아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확신하고 몸과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예배드리게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3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오 천명을 먹이신 주님(15-21)
[2]바다 위로 걸어오신 주님(22-33)
[3]예수님의 옷가만 대도 모든 병이 나음(34-36)입니다.
[1]먼저 오 천명을 먹이신 이적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중 15절부터 21절까지의 줄거리는 많은 무리들이 여러 마을로부터 예수님이 계시는 벳세다 광야에 찾아와 천국 복음도 듣고 병든 자는 병도 고침을 받고 나니 해질녘이 되었나 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여기는 빈들이니 무리들더러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는 제안을 드렸을 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리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하시면서도 제자들더러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그 큰 무리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을 전연 준비하고 있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주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또 답답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 ‘우리가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하시고는 무리들에게 명하기를 다 잔디에 앉게 한 것이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면 몇 인분 식사나 될까요? 1인분이나 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받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먹은 사람의 수가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 남자만 5천명 정도 였고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얼마라고요? 12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여자와 아이 합하면 최소한 2만 명쯤 된다고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이적을 통해 우리들에게 무엇을 심어 주시기를 바라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창조자의 존재로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심어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떡과 물고기를 전연 가지지 않으시고도 수만 명을 먹이실 수도 있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역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밖에 볼 수 없는 어두운 눈과 내 상식의 분량으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가능할 일이 많은데 내가 능력이 없다고 또 불가능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로서 무엇이든 가능하시며 또 그를 믿는 자들에게 모든 능력으로 가능하게 하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긍정적 믿음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께서는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어 있으므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일이나 양을 치는 일이나 헌신과 봉사를 직접 감당해 보기를 바라신 것으로 제자 훈련의 일환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어떤 문제이든 해결해 보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그의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남에게 모든 것을 미루지 말고 내가 희생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시고도 많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으실 터인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내게 가져오라’하신 것은 무슨 의미를 내포한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 각자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내놓는 헌신을 바라신 것입니다. 능력이 크던 작던 간에, 자기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적게 가졌어도 많이 가졌어도 하나님께는 차이가 없습니다. 능력이 많아도 작아도, 지능이 높아도 낮아도, 여자이건 남자이건 문제가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도록 하나님 앞에 현재의 자신을 내놓는 헌신을 요구하시는 뜻입니다.‘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란 찬송 가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나 떡 다섯 개와 같은 적은 존재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보충하시어 큰 일을 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제자들께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성하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이만 명을 먹일 수 있게 늘어난 것은 풍성하신 하나님을 소개해 주시고 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먹을 것을 많이 비축해 두지 않더라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듯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수 있도록 풍성히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도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주님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6:15에 보니 무리들이 오 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억지로 세상 임금을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그 분위기를 흩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배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재촉하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무리들을 돌려보내는 일을 맡으셨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다 떠난 후에 기도하러 혼자 산에 올라가시어 밤 사경까지 혼자 기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밤 사경이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하는 것이므로 주님께서 저녁을 대접한 이후부터 최소한 7-8시간 혼자 명상하시고 기도하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해 죄인을 섬기려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에서 영광 받는 세상 임금을 삼으려 하는 계획은 마귀의 계획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누구의 계획이라고요? 마귀의 계획입니다. 또 주님께서 일을 많이 하셔서 힘의 소모가 있었으므로 힘의 재충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재확인하고 다음날 일할 힘을 보충 받기 위해서 혼자 명상하고 기도하시는 시간이 필요했을 줄 압니다. 주님께서 모범을 보이심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재 확인하고 또 영력을 충전 받기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깨우쳐 주신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명이 있는데도 세상 임금 노릇할 기회가 있으면 주님의 제자로서 감당해야 할 임무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모범을 보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배를 타고 떠나 육지에서 수리쯤 멀어졌는데 풍랑이 거세므로 위험을 당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던 차에 새벽 3-4시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유령이 오는 것으로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의 어려움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는 이 풍랑을 잠잠케 하지 못한 사실을 통해 제자들에게는, 아니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는 어려운 인생 풍랑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어려운 인생 풍랑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이 되지 아니함을 암시하고 있으며 인생의 시련을 만나더라도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을 의지하면 능히 풀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믿어지지 아니한 가운데 ‘만일 주시여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주님께서 ‘오라’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은 좀 특수한 요청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요청대로 ‘물위로 걸어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께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므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소리지르니 주님께서 손을 내미시어 그를 붙잡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시며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명하시면 물위로도 걸을 수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갔을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믿음이 식어져 빠져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물을 쳐다보았을 때는 물에 빠져들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인생은 사는 길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죽는 길임을 암시하며, 주님이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친 것 같이 주님 없는 세상은 풍랑이 이는 삶이요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은 풍랑이 잠잠해지는 삶을 산다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주님께 예배를 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찬양하며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이미 주님께서 죽은 자까지 살리신 사실을 목격했음에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감동적으로 받아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는 남의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자기들 스스로 죽을 뻔하였던 어려움을 당하다가 구출해 주셨으므로 더욱 감동적이었으리라 봅니다. 어떻든 그들에게 닥친 수난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다져진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모든 병이 나았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그곳 사람들이 소문을 들었던 바로 예수님이심을 쉽게 알아보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가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옷가만이라도 만진 자들은 병이 다 나은 사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병든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또 옷가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주님께서 능히 치료하실 수 있다는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주님께서 능히 내 문제를 풀어 주실 수 있다고 믿는 다면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풀어 주실 수 있다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무엇 인가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결코 세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사는 삶이요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은 무엇이든 불가능하다고 믿고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바다 위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물위를 걸을 수 있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인간의 힘으로 걸으니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믿음은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계산 방식으로, 우리의 머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가능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지식과 주님의 경험과 주님의 계산과 주님의 머리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간의 기준으로는 약한 것이 강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이 큰 것이 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셨는가 하면 오히려 떡 7개로 4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거인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사실이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힘이 있다고 자기 힘을 바라보는 자는 약한 자이며 돈이 있다고 자기 돈만 바라본 자는 가난한 자이나, 힘이 없어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강한 자이며 돈이 없어도 주님을 바라본 자는 부자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 필요한 것을 더 넘치도록 능히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만 바라보는 눈은 실망과 근심과 불안을 불러올 것이나 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소망과 기쁨과 평안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인지라 주님을 바라보았다가 세상을 바라보았다가 할 수밖에 없으나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곧 우리 심령에 실망과 근심과 불안이 찾아 올 것이고 내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슬픔도 기쁨으로, 낙담도 소망으로, 근심과 불안도 안심과 평안으로 바뀌이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풍성한 마음으로 바뀌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승리하는 삶을 사는 비법은 오로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 예수를 바라보며 사는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나을 것으로 주 예수를 바라보았던 눈들은 모두 나음을 받았으며 주 예수를 바라보았던 베드로의 눈은 그가 바다 위로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능력자이시나 그를 바라보지 않는 자에게는 그 능력이 배급되어지지 않으며 그를 바라보는 눈이 주 예수의 능력을 믿는 양만큼 자기에게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안수를 해 주셔야 낫겠다고 믿는 자에게는 그렇게 해 주셔야 났겠고, 옷가를 내가 만지기만 해도 났겠다고 믿는 자는 그렇게만 해도 나으며 환자가 멀리 있어도 주님께서 멀리 있는 환자를 두고 말씀만 하셔도 났겠다고 믿으면 그 믿음대로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을 보고도 아무런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다면 주님은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못하는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믿는 만큼의 능력자이시오 내가 필요한 만큼 나를 돕는 자이시며 내가 가까이 접촉한 만큼 나를 가까이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은 부자이므로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나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는 주님의 철저한 도움이 필요하여 간절하게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임져 주시며 주님은 그들의 절대적인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큰 죄인일수록 탕감 받은 양이 많으므로 더욱 감사와 은혜가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내가 병들었습니까? 내가 돈이 없습니까? 내가 무능합니까? 내가 무식합니까? 또 내가 늙었습니까? 쓸모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내게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까? 주님께는 내가 있고 없고, 내가 어떤 상태이든 전연 상관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약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나 큰 풍랑을 만난 자들에게는 더욱 주님께서 도우실 양이 커짐으로 더욱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약한 만큼 주님을 더욱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 현재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내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목욕을 시키든지 나에게 새 옷을 입히시든지, 나의 상처를 싸매 주시든지, 나를 그의 어떤 일꾼으로 쓰시든지 주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우리를 관리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내 모습 그대로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세상을 가끔 바라보던 눈을 돌려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정결한 신부의 삶을 살아서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더욱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랑을 맞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