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히브리서

 

히브리서를 누가? 언제? 누구에게? 쓴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히브리서 전체의 내용을 보아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신약의 그리스도가 구약의 어떤 인물보다 뛰어남을 강조하므로 유대교 보다 기독교가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 이렇게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뛰어난 능력자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여 구약보다 신약이 뛰어나며, 또 구약의 인물보다 신약의 그리스도가 뛰어남을 강조하면서 구약을 바탕으로하는 유대교보다 신약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가 더 뛰어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가 13장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을 분해해 본다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부 1:1-4:13 뛰어나신 그리스도

제2부 4:14-10:18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사역

제3부 10:19-13:35 그리스도 안에서 뛰어난 성도들의 능력입니다.

 

제1부인 1:1-4:13 까지에서는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뛰어나심을 증거하기 위해 1:1-3 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시다고 했으며, 1:4-2:18 까지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약의 천사들보다 뛰어나시다고 했으며, 3:1-4:13 까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세보다 뛰어나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부 뛰어나신 그리스도 (1:1-4:13)

 

1:1-3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1절에서 3절까지를 보면 옛적에는 즉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즉 신약시대에 아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모든 일의 상속자요,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오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 했습니다. 또 아들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보좌위에 앉으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많이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4-2:18 구약의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1:4-14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14)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상속받았다: 천사라는 이름은 떠받들다, 수종들다 라는 뜻의 이름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상속자, 세상의 창조자, 만물을 붙드는(통치하는) 자,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1장 5절) 하나님께서 천사 중 누구에게도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지 않았으며, 천사 중 누구에게도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신 일이 없습니다.

 

(1장 6절)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그리스도: 맏아들을 세상에 다시 오시게 할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아들에게 경배할 지어다 하셨습니다.

 

(1장 7절) 천사는 피조물, 그리스도는 창조자: 또 천사들에게는 천사들을 바람으로, 불꽃으로 삼으신다 하시므로 천사는 피조물이요, 아들은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1장 8절) 만왕의 왕되신 그리스도: 또 아들에게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라 하여 아들을 하나님으로, 아들을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1장 10절) 창조자 되신 그리스도: 아들에게는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함으로 아들을 창조자로 표현했습니다.

 

(1장 13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아들에게는 ‘내게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지만 천사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신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1장 14절)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천사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즉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라 한 것입니다.

 

(2장 1절-4절) 복음에 순종해야 함: 옛 언약은 천사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된 율법에 불순종하므로 마땅한 벌을 받았거든 천사보다 높으신 아들을 통해 받은 복음을 불순종하고 구원을 등한히 하면 벌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구원에 관한 것은 처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며 다음 제자들을 통해 전달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선포될 때에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함께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아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될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천사를 통해 전달 받은 율법 즉 옛 언약과 아들을 통해 받은 복음을 대조하면서 천사들을 통해 전달 받은 율법을 불순종한자들이 벌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아들로부터 전달받은 복음에 불순종해서는 되겠느냐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 5절-8절) 주님의 천국 통치: 장차 오는 세상 즉 천국은 천사들에게 통치하도록 하시지 않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새로 창조된 천국을 다스리시게 했습니다. 즉 만물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셨으며 그에게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2장 9절-10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만왕의 왕의 관을 쓰시게 하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맛보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천사보다 잠간동안 못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임에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셨고 또 인류의 죄를 위해 죄인같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던 인간의 몸을 입으신 기간 동안의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2장 11절-13절) 그리스도가 우리와 형제 됨: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리스도와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관계를 이루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형제들에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형제들 앞에서(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족적인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형제, 자매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한 아버지의 피를 받은 자녀들이라는 의미의 호칭인 것입니다.

 

(2장 14정-15절) 사망의 세력을 없이 하심: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으로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시어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죽음의 공포를 갖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심으로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2장 16절-18절)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우려 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즉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려 오신 것이라 했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친히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 하셨기 때문에 고난과 시험을 당하고 있는 인류에 대해 사랑을 가지시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실히 해내는 대 제사장으로서 시험 받는 우리들을 성실하게 도우실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 제사장이라 표현된 곳은 신약 성경에서는 처음 표현된 것인데 구약에는 대 제사장되는 사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해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는데 주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사역을 해내셨기 때문에 대 제사장에 비유한 것입니다.

 

3:1-4:13 구약의 모세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3장 1절-6절) 모세는 사환이고 그리스도는 주인의 아들: 히브리서 기록자는 1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 우리가 믿는 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가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 성도들은 거룩한 형제, 즉 영적인 형제임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모세같이 충성하셨다고 했습니다. 둘 다 충성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을 만 한 것은 모세는 집의 사환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집 주인의 아들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3장 7절-19절) 순종에 대한 권고: 오늘날 주님의 음성을 듣거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을 노하게 했던 때와 같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하였으며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노하여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하셨으니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와 유혹으로 마음이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받은 복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 오실 때에 함께 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며, 또 40년동안 범죄하므로 광야에서 죽었던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노하셨으며, 순종치 않은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면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4장 1절-13절) 믿음으로 얻은 안식: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안식할 약속을 받았으나 애굽을 출발한 모든 백성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가 없고 심지어는 모세까지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태어난 2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안식했으나 그 안식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참 안식이 아니므로 1절에서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 것입니다. 1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안식의 약속이 아직 남아있을지라도 우리들 중에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들었으나 그 복된 말씀을 믿지 못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해 복된 소식을 받은 바 있으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약속과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은 참 안식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으나 안식이 미완성 되었거나 안식이 폐지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불순종한 이유에서이며 안식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자들에게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직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는 것이므로 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거역하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이제 오늘날 복음을 들은 자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복음을 믿고 복음에 순종하라고 권고 하고 있습니다.

 

8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라 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안식과 또 다른 안식 즉 주님 재림시에 성도들이 들어가 쉴 안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데 안식도 여호수아가 준 안식과 그리스도가 주신 안식을 대조하므로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여호수아보다 뛰어 나심을 암시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안식할 때가 성도들에게 남아 있으므로 우리가 주님 재림시에 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본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파멸을 가져올 것이고 순종하면 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 앞에 다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상 주실 자에게 상을 주시고 벌을 내릴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는 이 말씀은 이 능력의 말씀에 순종해야 참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력하게 말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부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사역 (4:14-10:18)

 

(414-16) 큰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 제도가 있었는데 구약시대의 대제사장과 구별하여 큰 대제사장이라 구별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을 위해 속죄제를 지내야만 했지만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단번에 온 인류의 죄를 사하는 속죄제를 지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져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의 연약함과 시험당함을 체험하신 분이시라 했습니다. 인간의 사정을 다 아시는 분이시라 우리 인간의 고난과 문제를 누구보다 잘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니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큰 대 제사장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참 안식에 들어가도록 말씀에 순종하고 힘쓰고 노력해야함을 권고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5장 1절-10절)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1절부터 4절까지에서는 구약의 제도에 따라 세운 대제사장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면서 5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의 자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중 택하게 되어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중 택한다는 뜻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과 입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의 직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 했습니다. 저가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은 자기도 백성들과 다름없이 연약하여 백성들이 짓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동시에 또한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대제사장직은 아무나 스스로 원해서 갖는 직분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5절부터는 옛 언약 즉 구약의 제도에 따라 세워진 대제사장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대제사장되심도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직의 선임과 같은 점도 있지만 큰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더 뛰어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된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더러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너를 낳았고 또한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신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한 것은 시편 100편 4절에 있는 말씀이 인용된 것입니다. 멜기세댁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없는데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의 십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기록이 창세기 14장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제사장들이 10분의 1을 받은 것과 같은 원리에서 아브라함이 10분의 1을 바친 것으로 보아 멜기세덱은 아론의 족보와 상관없는 특별한 법에 따라 세워진 제사장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의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으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체에 계실 때에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음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고통을 중보할 수 있는 적임자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순종으로 받아드림으로 온전하게 되었은즉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직보다 훨씬 월등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으로는 사람이셨으나 그는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영원한 참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5장 11절-14절)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히브리서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여 영적으로 더 성숙해 지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니 멜기세덱에 대해 더 할 말이 많으나 더 말을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있고, 12절에 보니 복음을 받아 들인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지금 너희들의 수준으로는 기독교의 기초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할 정도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자가 되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들은 장성한 자들이 하는 것으로 그들은 지식과 깨달음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책망을 한 것은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할례도 받고 다른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의 유혹에 빠져 기독교의 기초까지 흔들리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추리됩니다.

 

(6장 1절-12절)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1절-3절까지에서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보다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란 불신자가 주님을 처음 영접할 때에 거쳤던 믿고,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고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던 그런 기본적인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통해 양육받아 보다 성숙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것을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어렵겠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다면 가능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다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잘 못 해석하면 오해가 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의 본문은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마 12:31 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한 죄 즉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6:41 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신 것은 인간은 나약하여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한 것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다시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던 자가 그리스도를 죄인 중 괴수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거부한 자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7절부터 8절까지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의 성장의 결과로 좋은 열매 맺기를 권고하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땅이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밭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고 좋은 열매 즉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기를 원하시는데 그런 열매는 맺지 아니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육의 열매만 맺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어 불사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9절부터 12절 까지에서는 히브리서를 받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며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므로 앞에서 ‘믿음의 초보를 버리라’ ‘한 번 비침을 얻고 타락한 자들은 사함을 얻지 못한다’ ‘밭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있었는데 이런 말들이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은 앞에서 말한 자들보다 더 나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긴 일을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고 알고 계실 것이라고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1절부터 12절에서는 성도들 모두가 같은 수준에서 부지런히 성도들을 섬기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크게 하여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기업들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6장 13절-20절)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늘나라의 소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지켜질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시고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를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오래 참고 때를 기렸는데 그 약속이 그대로 이뤄진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8장 56절 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며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은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것과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먼 훗날에 나타날 주님의 나라를 소망했으며 그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나라를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소망하며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바요 또 약속하신 바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에서는 아브라함이 믿고 소망하며 약속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16절에는 사람이 맹세할 경우에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두고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보다 더 큰 자를 두고 맹세하므로 맹세하는 사람의 말을 상대방이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든지. 또는 우리 부모를 두고 맹세하므로 상대방에게 진실 된 것임을 강조하므로 그 말을 듣는 자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창 22:16 에 보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라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것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약속을 받는 성도들에게 결코 그 약속의 뜻이 변동되지 않을 것을 보증하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사실 자체는 소망을 이루려고 모든 고난을 견디면서 이겨나가는 성도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고 했습니다.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아브라함이 믿고 소망했는데 결과적으로 믿고 소망한대로 약속을 얻은 것 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보증이 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19절 20절에서는 바다위의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닻이 있듯이 우리 성도들도 믿음 생활을 하다가 세상의 파도에 흔들릴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소망의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이 바로 배의 닻 같아서 흔들림이 없이 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시고 약속하신 구원의 소망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뤄질 것이 확실함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7장 1절-10절) 제사장 멜기세덱: 1절과 2절에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며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는데 그것을 받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의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이요 또 살렘이라는 나라의 왕이니 살렘(샬롬)이 평화라는 뜻이므로 평강의 왕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대 제사장이시오 의와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에 아브라함 때 존재했던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이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구약 성경에 멜기세덱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그의 시작과 끝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의 부모가 누군지 그의 족보가 성경에 없으므로 그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하나님 아들과 비슷하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시오 멜기세덱은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항상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항상 제사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과는 구별되지만 구약 율법에서 말한 대 제사장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시작과 끝이 있는 보통 사람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멜기세덱이 레위지파의 제사장보다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것은 당연히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해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으므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뜻인데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므로 당연히 멜기세덱보다 낮은 자들임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시작도 끝도 없는 즉 출생과 사망이 없는 항상 존재하는 제사장이지만 레위의 제사장들은 사망이 있는 죽은 제사장이라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 레위 지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0의 1을 바쳤으므로 아브라함때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가 멜기세덱에게 10의 1을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보다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에게 10의 1을 받았는데 10의 1을 받은 레위 지파가 또 10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 되므로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7장 11절-21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 만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인간의 죄가 온전히 사해질 수 있었다면 레위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난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난 한 제사장이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난 자인데 유다지파의 한 사람도 제단에서 제사장의 일을 한 일이 없고 모세는 유다지파에게 제사장들에 관해서 말한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 제도는 율법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제사장 세우는 일이 율법에서가 아닌 다른 법으로 변경된 것을 보니 모세의 율법은 온전치 못하고 흠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이 새로운 제사장 제도는 결과적으로 지켜서 죽게 되는 율법을 좇아 난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능력을 좇아 난 것이라 했습니다.

 

옛 계명 즉 율법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이젠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이 생기므로 이 새 언약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워진 대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인 것입니다. 매년 대제사장을 통해 드렸던 동물의 피의 제사로는 인간의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언약 즉 새 언약을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양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시게 된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 되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이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7장 22절-28절)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22절에 보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했습니다. 더 좋은 언약이란 모세의 율법 즉 옛 언약이 흠이 있고 연약하여 인간들의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었던 것과 대조하여 새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죄 사함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보증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율법에 따라 세워진 대 제사장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언젠가 죽으면 또 다른 대제사장을 세워나갔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즉 인간 대제사장들은 생명이 유한하며 행하는 제사가 불완전함을,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영원하며 예수님의 제사는 온전한 제사임과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25절에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기 때문에 늘 새로운 대제사장을 세워나가야 하는 유한한 인간 대제사장 직과 항상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제사의 직분을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을 대조하는 말씀입니다.

 

2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온전한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는 거룩하며, 악이나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계신 분이시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으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라 했습니다. 27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속죄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던 것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세워진 인간 대제사장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으므로 죄인 된 백성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 언약인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대 제사장으로 세워 매년 속죄제를 드렸지만 새 언약에서는 영원히 흠이 없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대 제사장으로 세워 단번에 자기를 드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고 보증해 주시는 대 제사장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세워진 대제사장 제도와 새 언약에 따라 세워진 대제사장 제도를 대조하며 결과적으로 옛 언약보다 새 언약이 월등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율법에서 요구한 할례를 받거나 다른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8장 1절-6절)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지금 소개하려고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음을 강조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통해 은혜를 입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임을 강조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시기 위해 세상 대제사장이 땅에 있는 성소나 성전에서 하는 것과 구별하여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행하실 성소에 대한 소개인데 사람 대제사장이 들어가 제사를 지내는 성소나 장막은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 제사장 직을 행하는 성소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 장막이라 했습니다.

 

3절에서는 대 제사장이 드릴 예물에 대한 소개인데 대제사장마다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릴 예물은 분명 친히 희생양이 되신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4절에서는 만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대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율법을 따라 세워지는 대 제사장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5절,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땅에 내려가 장막을 짓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장막의 본(원형)을 따라 지으라고 명하신것과 같이 레위 지파의 대 제사장으로서 섬기는 일도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대 제사장으로서 섬기는 일의 모양과 그것의 그림자라 하였습니다. 즉 레위 지파의 대 제사장들은 옛 언약의 틀 안에서 섬기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 직은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레위 지파 대 제사장들의 성소에서의 제사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의 모형이요 그림자라 했습니다.

 

(8장 7절-13절) 새 언약의 필요성 : 8절에 주께서 날이 이르리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했는데 새 언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7절에서 첫 언약이 흠이 있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이 새 언약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주었던 옛 언약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은 돌 판에 썼지만 새 언약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셨다고 했습니다. 돌비에 적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적는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 즉 모세의 율법은 돌 판에 기록했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했다는 말의 뜻은 율법은 외형적(육적)인 법이요, 새 언약은 영적인 양심의 법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12절에서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했는데 이 말은 옛 언약은 엄하여 율법을 어긴 자들이 율법을 어김으로 죽게 되지만 새 언약은 자비로워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희다고 인정을 하실 뿐 아니라 과거의 죄를 다시 허물치 않는 다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별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들춰내는 자비가 없는 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법이라는 뜻입니다.

 

13절에서는 새 언약이 등장했으므로 옛 언약은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져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선포하신 것은 옛 언약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옛 언약을 폐기 시키시고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9장 1절-10절) 첫 언약의 예법 : 1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성소(장막)를 소개하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옛 언약 즉 율법에서는 성소를 섬기는 예법이 있고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땅에 세워진 장막을 말하는 것으로 새 언약에서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하늘나라의 성소와 구별하기 위하여 표현된 말입니다. 2절에서는 장막을 소개하면서 장막 안이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는데 성소에는 등대와 떡 상과 진설병이 있다고 했으며 3절, 4절, 5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 뒤에는 금향로와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율법이 새겨진 돌 판이 들어 있고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을 성소와 구별하여 지성소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휘장이 찢어졌다는 의미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렸던 그 법이 폐기 되고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제(회개와 찬양과 기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에서 행한 예법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항상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지성소에는 1년에 1번 대제사장이 들어가 자기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동물의 피를 뿌려 속죄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옛 언약의 법에 따라 장막에서의 속죄제가 온전치 못했음을 밝히며 새 언약에서의 속죄제가 필수적으로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말하기를 첫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친히 하나님 앞에 직접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안했다고 했으며, 9절, 10절에서는 대제사장을 통해 드려졌던 속죄제는 백성들의 양심까지 깨끗케 해주지 못했으며 오직 먹고 마시는 일, 몸의 더러운 것을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기 때문에 양심까지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새로운 법으로 개혁될 때까지 임시로 행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드렸던 속죄제는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임시적으로 운영된 시한부적인 것이라 한 것입니다.

 

(9장 11절-22절)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11절, 1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일(새 언약)의 대 제사장으로 오사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하나님의 우편)으로 들어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의 속죄제는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동물의 피로, 매년 계속해서 드려졌던 임시적인 속죄제였으나 새 언약의 속죄제는 주님께서 단번에, 자기의 피로 드려졌던 영원한 속죄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3절, 14절, 15절에서는 동물의 피를 뿌려도 육체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물며 흠 없는 자기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주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셔서 옛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시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에는 첫 언약에서도 율법의 지시에 따라 동물의 피를 뿌리며 이르되 이것이 영원한 언약의 피라 했으며 이 피로 인해 피 뿌림을 받은 모든 물건이 정결케 되었는데 이와 같이 피 흘림은 죄 사함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9장 23절-28절)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23절에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인 성소에서도 정결케 하기 위해 동물의 피를 요구하고 있는데 하늘에서의 속죄제는 동물의 피보다 더 귀한 제물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새 언약의 대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시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고 했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에서는 세상에 있는 대 제사장이 해마다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주 들어가려 하시지 안했다고 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주 들어가시려 했다면 세상 창조때부터 자기 자신을 드리려고 자주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셨어야 하겠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드린 제사로 세상 죄를 사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27절, 28절에서는 모든 인생이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주님께서도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죽으시되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라 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림하신다는 말입니다.

 

(10장 1절-18절)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1절부터 4절까지에서는 옛 언약의 법에 따라 지냈던 속죄제사는 온전치 못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 했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새 언약 즉 신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임시 법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2절에서는 만일 율법 아래서의 제사가 온전하였다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대 제사장이 매년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라 했습니다. 3절, 4절에서는 해마다 드리는 제사는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매년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에 동물의 피로 드렸는데 매년 드려지는 동물의 피에 의한 제사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생각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5절부터 9절까지에서는 속죄제의 개혁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시편 40:6-8 까지의 말씀이 인용된 것입니다. 5절부터 9절까지 본문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해 요구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 몸을 예비 하셨다 했습니다. 한 몸이란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 연약 아래에서는 동물의 피나 율법에서 요구한 제사 예물은 그 이상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이 될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한 것은 첫 율법은 폐하시고 둘째 법인 새 언약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10절부터 18절까지에서는 주님의 속죄제의 완전성에 대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뜻과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드림으로 인간들이 거룩해졌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약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 제사는 제사장들이 매일 서서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나 죄를 없이하지 못한 제사를 인류의 죄를 온전히 사하신 주님에 의해 드려진 단번의 제사와 구별해 주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를 요약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지닌 원수를 짓밟을 때까지 그곳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주님께서 단 한 번의 십자가상의 희생양이 되심으로 영원히 인류의 죄를 묶어서 속죄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므로 죄와 허물이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에서는 주님 오실 때부터는 새롭게 언약을 세우되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마음에 두고 저들의 생각에 기록하겠다고 했으며 또 저희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 했으며, 죄를 사했으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310:19-13:25 그리스도 안에서 뛰어난 성도들의 능력입니다

 

(10장 19절-39절) 믿음의 도리: 19절, 20절에서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전에는 오직 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었으나 주님께서 십자가가에 못 박히시고 성소 휘장을 찢으므로 지성소는 만인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된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육체라 했습니다. 휘장이 육체란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휘장이 갈라졌기 때문에 휘장은 곧 찢기신 주님의 육체라 했습니다. 새롭고 산길이란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새롭고 생명을 얻는 산길이란 말입니다.

 

21절부터 39절까지는 믿는 도리에 대한 권면인데 요약해 보겠습니다. 21절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22절은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죄 사함 받아 깨끗함을 입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23절에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성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것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으라 했으며 24절에는 성도들끼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라 했으며 25절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교회의 모임에 열심을 내도록 서로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26절부터 29절까지는 배교자들을 향한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26절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했습니다. 27절에는 이런 자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6장 4절부터 6절까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오늘의 26절에서도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여 사함을 받지 못할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괴롭힌 배교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적한 죄의 성격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자입니다. 짐짓이란 ‘고의로’ ‘악으로’ ‘도전하여’ 라는 뜻입니다. 27절에 보면 ‘대적하는 자’라 했습니다. 대적은 성령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29절에 보면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 했습니다. 한 번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받아 드렸던 자가 아들과 성령을 도전적으로 부정하고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를 부인한 자가 있다면 다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받을 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고 2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0절, 31절에서는 배교자들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였으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절부터 39절까지에서는 배교자들로부터 받았던 핍박을 잘 이겨낸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격려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32절에 보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하였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받은 수신자들이 과거에 복음을 받은 후에 큰 핍박을 받았지만 잘 참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33절과 34절에서는 핍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방과 환난으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방이란 고발 고소를 당했다는 뜻이 되겠으며 환난이란 폭력을 당하고 공개적으로 조소를 당했다는 뜻 입이다. 또 이런 핍박의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지원하고 직업이나 사업을 빼앗기는 것까지도 달게 받았는데 그 이유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을 소망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35절부터 39절까지에서는 담대하게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35절에서 큰 상을 얻기 위해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했으며, 36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한 것을 받기 위하여 인내하라 했습니다. 37절에서는 잠시 잠깐 후면 지체치 않으시고 오실 이가 오실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8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체치 않고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박해와 담대하게 맞서며 인내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상과 약속을 주실 것이지만 혹시 반대로 뒤로 물러나 인내하지 못하고 배교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39절에서는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뒤로 물러나 파멸에 빠질 자들이 아니고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격려하며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을 언급함으로 다음 장에서 다룰 믿음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11장 1절-3절) 믿음의 정의 :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자는 그가 믿는 대로 소망한 것을 얻게 될 실체가 되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다 하더라도 실지로 나타날 소망의 실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을 하나로 풀었습니다. 믿음이 바로 소망이라 한 것입니다. 2절에서는 구약의 신앙 인물들도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 없다면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했는데 이 말의 뜻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지 이미 있었던 어떤 물질들을 조합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장 4절-32절) 믿음의 인물들 : 4절부터 32절까지에는 구약의 인물들 중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4절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했습니다. 이 말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다는 말은 아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의롭다하는 증거를 얻었다 했습니다. 5절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는데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변화되어 하늘로 옮기웠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의 믿음 때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을 갖되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는 노아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예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경외하여 방주를 만들어 자기의 가족을 구원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여 순종하므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했습니다. 8절부터 19절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 15:6 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인정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 는 지시를 받고 지체치 아니하고 순종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그의 믿음이 인정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한 그 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명령만 듣고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즉시 떠난 그의 믿고 순종한 상태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9절에서 그의 믿음을 소개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땅은 먼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들어가 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에는 사라가 묻혔던 땅 말고는 아직 그 땅을 한 평도 소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 고향집과 같지 아니하고 나그네와 같이 일시적으로 사는 마음의 자세로 자기 후손들인 이삭과 야곱과 함께 살았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장막에 거했다는 말의 뜻이 바로 정착하여 사는 완성된 집이 아니라 임시 거처의 장막이라는 뜻입니다. 10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았던 근본 이유는 장차 하나님께서 들어와 살게 하실 영원한 거룩한 성 즉 천국을 소망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 자기가 영원히 살 고향인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서 온 그 땅을 자기 고향과 같은 마음으로 정착하여 살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사라를 소개하고 있는데 사라도 자신이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몸의 조건아래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는데 이는 약속하신이가 충실하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라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그 당시에는 사라가 자기 자신의 형편을 알기 때문에 웃었다고 했으나 그 후 남편의 믿음을 통해 변화되어 사라도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12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번성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고 약속하실 때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고 더구나 두 사람 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몸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몸 상태를 12절에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몸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이 자손이 번성하리라 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조금도 약하여 지지 않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는 참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죽은 후에 여호수아의 인도로 그들의 후손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약속의 땅을 분배받지는 못했지만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환영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자기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란 고백을 했는데 이들의 이러한 고백을 통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소망이 아니요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꾸준히 참된 본향을 찾아 인생의 여행을 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저들이 자기들이 떠나왔던 고향을 찾아가기를 원했다면 죽기 전에 자기들의 원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본향 즉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거룩한 성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 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절 뒷 부분에 기록하기를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자손이 번성케 할 씨가 바로 이삭인데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으니 사람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순을 알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런 모순 속에서도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란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아내인 사라가 죽은 자와 같은 상태였는데 죽은 몸의 상태를 살리셔서 이삭을 낳을 수 있었던 것 같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하심으로 죽이지는 안했으므로 이삭이 실지로 죽지는 안했으나 이미 칼을 들고 죽이려 했으므로 죽은 것으로 간주 하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도로 주신 것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20절에는 이삭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6:2-5 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도 나타나셔서 이삭이 머물고 있는 땅에서 옮기지 말고 그대로 살면 그 땅을 주겠다고 하셨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삭은 이 약속을 그대로 믿고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손자들에게 축복해 주는 야곱의 믿음을 소개한 것입니다. 22절은 요셉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0:24, 25 를 보면 요셉이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자기 해골을 가나안으로 가져가 달라고 유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으로부터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유언을 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의 명단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23절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들이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사내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동안 숨긴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것을 믿었던 것으로 풀이 됩니다. 그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24절부터 30절까지는 모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했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는 대로 궁중에서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길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24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25절). 26절에 보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27절을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고 했는데 모세는 자기 동족과 애굽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인 일로 에굽을 떠났던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 같이 하여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28절에는 모세가 믿음으로 피 뿌리는 예를 정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장자들을 죽게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므로 천사가 피 뿌린 집은 건너뛰었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순종하여 지시대로 양을 잡아 문지방에 피를 뿌리도록 했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29절에서는 홍해 바다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 도착했을 때에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뒤 따라왔기 때문에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사들 사이에서 모두 죽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이 좌절하여 그대로 주저앉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사 하였을 것입니다.

 

30절에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성벽이 특별하게 튼튼하여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를 하루에 성을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고 제 7일 째에는 7바퀴를 돌도록 명령했는데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 대로 순응하여 성을 총 13바퀴를 돌기만 했음에도 그 튼튼한 성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렇게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믿음에 의한 순종을 칭찬한 것입니다. 31절에서는 기생 라합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믿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므로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에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기생 라합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32절부터 39절까지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다른 선지자들의 일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일을 다 소개하자면 시간이 부족해서 다 소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33 절에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여 약속을 받았다 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치를 할 때에 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이것은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진 바 있었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고 사자 굴에서 나올 수 있었던 예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34절에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왕에 의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조금도 상하지 않은 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명령이나 권위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높혔던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라 했는데 구약에는 칼날의 위험을 피한 자들이 몇 명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다윗, 예레미야 등 하나님을 의지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음을 예로 들어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또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는 사사였던 기드온은 300명의 적은 군사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예가 있으며 에스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는 여호수아나 사사들 그리고 다윗 같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물리친 용사들이기도 합니다. 35절에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는 사르밧 과부(왕상 17:17-24) 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는 주님 재림시에 모든 믿는 자가 부활할 것을 믿고 현제 당하는 사형을 구차히 면해보려고 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고 한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핍박으로 인한 현세의 모든 고난을 구차히 면해보려고 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6절에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한 험한 고난과 핍박을 당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37절에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순교를 당하고 또 처참한 가난의 생활을 했던 믿음의 용사들의 여러 형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 하도다” 라는 말의 뜻은 이렇게 믿음으로 어떤 형태의 핍박을 다 감당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의 핍박과 환난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믿음을 돌려놓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의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는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 어려운 삶을 살았던 믿음의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고 광야나 토굴에서 살면서 가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믿음의 용사들이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9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는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의 증거를 통해 인정은 받았지만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받은 그런 은혜는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2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와 같이 믿음의 인물들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물들이므로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지 아직 주님의 나라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40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사역을 실행하셨으므로 이제는 구약의 믿음의 인물들이나 우리나 다 함께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12장 1절-3절) 믿음의 경주 : 11장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 받았는데 우리들은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선수로 믿음의 선진들을 경주장에서 우리들을 지켜보는 증인들로 비유하며 그런 증인들이 우리 앞에 있으므로 믿음 생활에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경주하되 주님께서 십자가 뒤에 예비하신 즐거운 일만 생각하고 모든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결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 같이 우리도 주님 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 나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주님께서 자기가 당한 모든 수치와 아픔과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참으신 사실을 기억하며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12장 4절-13절) 고난을 인내해야할 이유: 4절에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는 뜻은 죄(악한 무리들)와 싸우되 아직 순교를 당할 정도의 험한 핍박은 받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5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훈련하시기 위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주시는 것이므로 고난과 역경은 훈련을 위한 과정으로 알고 잘 참아 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에 “너희의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를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 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훈련하기 위해 매를 때리듯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징계(고난과 역경)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만일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아무런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음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에 아무런 시험이 들지 않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녀 훈련 차원에서 갖가지의 고난(징계)을 주신 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런 고난이 없는 자는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보통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시는 벌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는데 죄와 상관없이 자녀 훈련을 위해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9절에서 육체의 아버지도 자기 자녀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매를 때렸을 지라도 계속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였다면 하물며 영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 때문에 실망하여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향해 징계했을 경우에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유익을 가져 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내리신 모든 징계는 틀림없이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고 유익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아버지는 불완전하여 때로는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자기감정에 의해 징계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의 징계는 징계 받는 자녀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한 것입니다.

 

11절에는 징계를 당하는 그 순간에는 슬프게 생각이 되나 그 징계로 말미암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는 의와 평강으로 맺어진 열매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예하는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12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는 당하고 있는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손과 무릎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일지라도 다시 힘을 내서 일어서라는 격려인 것입니다. 13절에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는 배교하는 자들로부터 시련을 당해 기진맥진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걸어가라는 격려이며 그렇게 바로 걸어갈 때에 이런 모범된 모습을 보고 혹 흔들거렸던 성도들도 고침을 받고 바로 걸어갈 것이라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끼리 서로 격려하며 어려운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해나가라는 격려인 것입니다.

 

(12장 14절-29절) 배교에 대한 경고: 14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다가 이웃과의 불목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할 정도로 화평을 중요하게 강조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도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과 거룩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필수 덕목인 것입니다. 15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는지 돌아보라 했습니다. 혹 자기의 완고한 기질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리실 은택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음행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에서가 팟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던 일과 같이 세상적인 일 때문에 믿음을 팔아 버리는 에서와 같은 실수를 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이삭이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곱에게 축복해 준 이후에 에서가 찾아와 이삭에게 축복해 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했지만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8절부터 24절까지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의 시내 산의 분위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받는 시온성의 분위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8절부터 21절까지는 시내산에서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8절에는 “너희의 이른 곳은 ㆍㆍㆍㆍ이 아니라” 하여 성도들이 이른 시온산은 모세가 올라갔던 시내산과 같지 않다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즉 시내산의 분위기는 불붙는 산, 흑운과 흑암, 폭풍,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로 인해 분위기가 퍽 무서웠던 분위기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서워서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 듣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21절에 보면 심지어 모세도 무섭기로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다 했습니다. 즉 율법시대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대조하여 22절부터 24절에서는 신약시대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거룩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 나타날 새 하늘 과 새 땅, 즉 천국을 모세의 시내산과 비교하기 위해 나열한 것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을 인정받고 입성한 천만 성도들의 평화롭고 화합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2:1-4절까지와 같은 내용으로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도 벌을 면치 못했거니와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자의 경고를 배반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26절부터 29절까지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구약 율법을 모세가 받을 때에 땅이 진동했다고 했는데 이젠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땅과 함께 하늘도 진동할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 이렇게 진동케 한 것은 땅에 있는 피조물들을 없이 하고 진동치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28절에서는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했습니다. 영원히 존재할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하지 말고 은혜를 굳게 잡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늘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봉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라 한 것입니다. 29절에서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고의적으로 새 언약을 부정한 배교한 자들이나 신앙을 거부한 자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고 진동치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13장 1절-16절) 전진적 신앙의 촉구 : 1절, 2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 했으며, 3절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되 자기가 갇힌 것 같이 돌아보고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라 했습니다. 4절에서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했으며 간음하는 자와 음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다고 했습니다. 5절, 6절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 자이시니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하든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헸습니다.

 

7절과 8절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어려운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나갔던 것들을 본받으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영적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려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사 음식 같은 식물로는 사람이 온전하여 지지 아니한다했으며 오직 은혜로 온전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희생된 짐승들은 영문 밖에서 죽고 불살랐으며 오직 피만 대 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었는데 12절에서는 주님께서도 자기 피로 인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백성들의 죄를 사할 수 있었던 율법적인 희생 제물과 영원히 죄 사함을 주신 주님의 희생제물을 대비하여 연관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그러므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갖은 수치와 능욕을 당하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할 만한 모든 능욕을 기꺼이 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능욕이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능욕을 지고 갔으니 우리도 그를 따라가자는 권고인 것입니다.

 

14절은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라 했는데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에는 임시적인 나라만 있고 영원한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15절 16절에서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했습니다. 이제는 그 이상 동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도록 예수님께서 단 번에 희생제물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는 권면인 것입니다. 찬양이 입술의 열매라 했습니다. 찬양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런 선행을 하나의 제사에 비유하여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13장 17절-19절) 지도자를 위한 기도: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했습니다. 인도하는 자들이란 장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로들 즉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저희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했는데 이 말의 뜻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양떼를 돌보는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늘 깨어있으며 하나님께서 교인들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에 언제나 답을 준비하여 가지고 있는 자의 심정으로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기쁨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자가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19절에는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 편지의 기록자는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일에 장애물 들이 있었나 봅니다.

 

(13장 20절-25절) 마지막 권고와 축복 : 20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삼으신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1절은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 해주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22절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사람은 13장에 걸쳐 쓴 것을 권면의 말이라 했습니다. 간단하게 썼다는 말은 그 당시 문서의 끝에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라 합니다. 23절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디모데가 언제 어떤 감옥에 갇혔는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디모데가 놓였다 했으며, 그래서 디모데가 오는 대로 속히 너희에게 가서 보겠다고 했습니다. 24절, 25절은 문안인사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아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