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만이 유일한 신조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믿음과 실행은 오직 성경에만 근거를 둡니다. 신학과 신조를 따로 만들지도 않으며 또한 이미 만들어진 신조를 골라서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신학과 신조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완전한 교리요 완전한 신조라 믿기 때문에 불완전한 신학이나 신조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인간이 잘 만들었다고 해도 그 신조는 다른 사람과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므로 만들어진 신조나 신학은 형제를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성경 하나로서 믿음의 근원을 삼아 왔었는데 이단들이 많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또 다른 이단 학설을 주창하므로 정통성이 있는 믿음을 체계화하기 위해 신학적 선언문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조를 만들어 냄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주후 325년에 니케아 회의에서, 또 주후 451년에 칼케돈 회의에서 신조들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사도신경”은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이단들을 막고 각자의 신앙을 확인하게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겠으나 이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도신경도 신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위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을 믿고, 성자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고, 또한 성령을 믿고, 또한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은 현대 이단들도 믿는 내용들이므로 사도 신경 하나를 가지고 이단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이단들도 다 믿되 성령을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 믿되 하나님을 자기들의 이해로 믿는 것입니다. 현대 이단 중에서 자기네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하기 위하여 사도신경을 믿는다고 강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 의견

또 어떤 자들은 “거룩한 공회”란 카톨릭을 지칭한다고 하여 반대하거나 또 동정녀 ‘마리아’를 구태여 강조한 것이 카톨릭 냄새가 난다고 반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즉 어떤 신학이나 신조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으므로 어떤 신학이나 신조는 파당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 교파가 나누어진 자체가 ‘주장’이 다르고 “신학”이 다르고 “신조”가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없는 것을 새로 만들거나 있는 것을 뽑아 내는 것은 교회를 나누는 쐐기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잘 아는 본 교회는 온전한 성경 외에 이를 보충하려는 어떤 신학이나 신조나 주장을 따로 만들지 않고 또한 만들어진 신조를 성도들에게 강요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 배경에서 나왔고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교회의 신조로나 기본 교리로 채택하지도 않을 것이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실행하도록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뿌리는 초대 교회이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실천했던 모범을 따라 예배하며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를 운영해 나가려고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실행은 신약 성경에 따라

초대 교회 모범은 사도행전과 신약 성경에 있는 여러 서신들을 통해 찾게 되며 성도들의 신앙의 기본 정신을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르친 말씀에 따라 배우고 실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될 말씀으로 연구하고 그 말씀의 본 뜻을 신약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신앙에 적용합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은 옛 언약이며 신약은 새 약속으로 받아 드려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 사람들과 맺은 약속으로 또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과 맺은 약속으로 알고 신약을 우리의 믿음과 실행의 근원으로 삼고 구약(율법)은 신약을 낳게 한 모체로 이해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켰던 율법을 그대로 성도들의 신앙에 실행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정신과 엇갈리는 구약의 어떤 제도나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