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마 서

로 마 서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 중에서 16 장으로 된 가장 긴 편지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첫째 로마 교회를 선교 기지로 삼아 더 넓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선교 계획을 로마 교회에 소개하고 이 선교 사역에 로마 교회가 동참케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로마 교회 교인들이 복음에 대한 올바르고도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본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규명하고 이 기반 위에 각 개인의 구원과 성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자세,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 세계 열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등을 교훈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의 내용 중 특별한 주제를 찾아본다면 (1)이신 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 (2)성화: 그리스도를 믿은 후 변화되어야 할 성도의 생활 (3)하나님의 주권: 인류의 구속 사역은 토기장이가 각종 용도로 토기를 임의대로 만들듯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통해 이루진다는 것 (4)봉사의 삶 :구원에 대한 교리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가 종교 개혁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를 깨달음으로 인해 종교 개혁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칼빈도 종교 개혁을 하기 전에 로마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로마서를 가리켜 신약 성경의 핵심이라 했으며 특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고 한 말씀은 복음의 근본적 교리이자 가장 위대한 말씀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전체로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제 1부 1:1-8:39 하나님의 의의 계시, 제 2부 9:1-11:36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 제 3부 12:1-16:27 하나님의 의의 적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장 하나님의 의의 계시로서의 복음

(1:1-7) 인사말: 1절과 7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하여 편지를 보낸 자와 편지를 받는 자가 누군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여 본인이 사도임을 분명하게 소개 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는 복음에 대해 소개하기를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이란 아들에 관한 복된 소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주체가 되신 그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7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1:8-15) 바울의 관심사 :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기를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늘 쉬지 않고 로마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고 했으며 로마 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신령한 은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신령한 은사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서로 만나서 피차의 믿음을 통해 서로 위로받고자 한다고 했으며 13절에서는 열매 맺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열매 맞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성숙이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여러 번 원했지만 지금까지 길이 막혔었다고 했습니다. 길이 막힌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의 목적 때문에 로마 교회에 대한 큰 관심이 있음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15절에는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망이 소개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성도들과 불신자)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1:16-17) 하나님의 의 :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헬라의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복음은 미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복음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이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구원의 주인공으로 생각했지 이방인은 구원에서 제외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개방되어 있음을 강조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17절 앞부분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말씀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의’ 란 죄인이지만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데 오직 믿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17절 하반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약성경 하박국 2:4 를 인용한 것인데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나 어떤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1:18-23) 이방인의 죄 : 18절부터 23절까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했기 때문에 세상 만물을 보고 당연히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연히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1:24-32) 죄의 결과 :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속에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저희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게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동성끼리 사랑하는 동성연애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든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어리석은 자, 배약하는 자(약속을 어기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로 그대로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일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간섭은 사랑이요 부모님의 무관심은 포기임과 같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징계하시는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신다면 그 자체가 큰 형벌이 되는 것입니다.

 

2장 유대인의 심판

(2:1-5)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1절부터 5절까지에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날 즉 주님께서 재림하신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때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2:6-16) 행위에 따른 심판 : 유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택한 백성이므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심판은 오직 이방인에게만 상관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모든 심판은 인종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주어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악행을 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터인데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었던 율법 아래에 있었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신약시대 사람이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ㅣ

 

(2:17-29) 형식적 율법주의 : 17절부터 29절까지에서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알고 율법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행하지 않고 율법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한자라면 할례가 유효하겠지만 율법을 범한자라면 할례가 무할례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라 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족보로서는 구원 될 수 없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마음으로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3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1-8) 유대인의 특권 : 앞 장에서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든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이방인보다 특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 강조했으므로 유대인으로서는 마땅히 묻게 될 질문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약속을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혹 좀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유대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특혜가 주어질 것으로 대대로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주장에 항의하는 각도에서 물을 수 있는 질문이 바로 1절의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2절에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이니라”입니다. 유대인임으로 할례를 받았다 해도 이방인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나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은 이방인과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말씀을 받은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남들에게 전달해야 할 책임을 받았으니 이방인보다는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믿고 순종하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고 순종하지 않은 자신들의 책임이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해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아무런 약속을 얻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유대인들이 그 약속을 이행했던 하지 않았던 상관없이 아무런 변동 없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심을 4절에서 강조하면서 인간의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충실하셔서 모든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심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에서는 유대인들이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묻기를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게 되면 그 불의를 행한 자가 벌을 받아야 하느냐 라든가? 혹은 내가 거짓말을 하므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빛이 나면 내가 죄인처럼 벌을 받아야만 하느냐 라든지 그런 타당치 않은 질문을 하겠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참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약속대로 벌을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어떤 이유로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궤변을 말하는 자들은 정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3:9-18) 전 인류의 죄 :사도 바울은 9절부터 18절까지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인류는 죄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면이 없었더라면 모두 심판을 받아 마땅할 존재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죄 아래 있으며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다 치우쳐 무익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며,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파멸과 고생의 길에 있으며,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온 인류는 영원히 멸망당할 존재들이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3:19-20) 율법의 역할 : 온 인류가 죄인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그런 죄인 된 인류를 위해 율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19절에서 결론을 내리기를 율법은 온 세상으로 재판관 앞에 한 마디도 자기를 변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했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육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면 모든 율법 하나하나는 그 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범법자임을 확인해주는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은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3:21-3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고 인류 모두는 죄인이므로 말 한마디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불쌍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21절부터 31절까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의 한 의라고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 받은 것이라 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 했으며 이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는 의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게 되는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고 넘어가심으로 스스로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 했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27, 28절에서는 인간들이 의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의롭게 된 것이 인간들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믿음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의롭게 된 율법의 행위 즉 개인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얻은 의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29절, 30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고 유대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할례자의 하나님도 되시고 무할례자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할례 자나 무할례자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31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냐고 묻고 그럴 수 없다고 답을 하면서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흠이 있는 것이어서 율법으로서는 인류를 의롭게 하지 못했으나 율법에서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되었으니 믿음의 법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부족한 것을 완성하는 것 즉 굳게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4장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4:1-3) 아브라함의 의 : 3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의롭게 된 것이 자기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4:4-8) 죄사함의 은총 : 일한 사람이 일한 대가로 받는 삯은 은혜로 생각지 않고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할 빚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일을 하지 않았고 행위가 없었는데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신 것은 빚이 아니라 은혜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6, 7, 8 절에서는 일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다윗이 말하기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라 했습니다.

 

(4:9-12) 할례의 의미 : 8절에서 복있는 사람에 대해 말을 했는데 그 복이 할례자에게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냐고 질문을 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었는데 의롭게 된 것이 할례시에냐 아니면 무할례시에냐고 9절에서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때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때는 무할례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으니 무할례자들에게뿐 아니라 할례자들까지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말씀은 할례는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4:13-25) 믿음의 후사 : 하나님께서 창세기 17:4-8 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언약하신 것을 인용하며 믿음의 후사(믿음의 상속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3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될 상속자에 대해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들에 관해 언약(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 430년 전에 주어졌기 때문에 후사가 되는 것은 율법에 속한 후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후손들이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시는데 율법에 속한 자들 뿐 아니라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조상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17절에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다 했습니다.

 

17절부터 25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을 소개했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소개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몸과 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부에게 아들을 낳도록 하셨음을 전제하여 이런 소개를 한 것으로 봅니다.

 

또 아브라함을 소개하기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고 사라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상태였지만 자기들의 상태를 잘 알면서도 “네 후손이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약하여짐이 없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했습니다.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들까지 위함이라 했습니다. 25절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했습니다.

 

5장 칭의의 결과

(5:1-11) 칭의의 결과 : 1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지를 알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5:12-21) 아담과 그리스도 : 12절에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했습니다. 13절에서는 죄는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했습니다. 법이 있기 전이므로 죄가 죄로 들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기 전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는데 아담은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 했습니다. 15절부터는 아담과 오실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했습니다. 선물이란 의롭게 된 선물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들에게 사망 대신 은혜로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은혜로 생명이 왕노릇한다 했으며,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하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 했습니다.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 하였는데 이 말은 율법이 들어옴으로 죄가 죄로 인정되었다는 뜻이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의 뜻은 죄가 없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일이 없으므로 죄 사함에 대한 감사나 은혜란 있을 수 없겠지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죄를 사함 받는 다면 은혜와 감사가 클 것이라는 말입니다.

 

6장 성화와 죄

(6:1-11) 성화의 원리 : 앞에서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됨 즉 칭의에 대해 강조했는데 6장에서는 의롭게 된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화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가 크게 하기 위해서는 죄를 일부러 더 지어서야 되겠느냐라 질문하고 있으며 답은 그럴 수 없다고 했으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죄 가운데 더 살아서야 되겠느냐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죄의 크기가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말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커지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더욱 지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3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 했으며,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이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 했습니다.

 

8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 했으며 10절에서는 주님께서 죽으심은 죄를 인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사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 했습니다.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성화의 삶을 살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즉 죄의 몸은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의 몸을 살리라는 뜻입니다.

 

(6:12-14) 의의 병기 : 12절에는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욕심에 순종치 말라 했으며 13절에서는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했습니다.

 

(6:15-23) 의의 종 : 15절, 16절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다고 했으며 우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17절, 18절은 우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므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9절에는 너희 육신이 연약하여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지만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했습니다. 20절에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들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했으며, 22절에는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했습니다.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했습니다.

 

7장 성화와 율법

(7:1-6)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1절에서는 율법이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주관한다 했습니다. 2절, 3절에서는 같은 원리로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인바 되지만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게 법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다 했습니다. 4절에서는 너희 옛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새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으니 새 사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5절과 6절에서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 했습니다.

 

(7:7-12) 율법과 죄 :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죄냐고 묻고 12절에서 답하기를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죄가 죄인지 몰랐던 것은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탐심이 죄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 마음속에 죄의 속성이 숨어 있다가 계명이 주어지매 그 계명으로 인해 죄가 죄로 판명이 되고 죄로 들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율법과 계명을 몰랐을 때에는 내가 살아있는 줄 알았으나 법을 알고나니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래 계명이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주어졌으나 인간들이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살려야 할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죄인 줄 알게 해주는 그 법은 그 법이 존재하는 본래의 사명을 다 하고 있으니 법 자체는 죄가 아니라 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7:13-25) 신앙인의 내적 갈등 : 13절에서는 율법의 열할(가치)에 대해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하다는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게 한 것이냐는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을 했습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들어나게 하기 위하여 그 율법으로 나를 죽게 만들었다 했습니다. 역시 계명을 통해 죄를 죄 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14절에는 율법 자체는 신령하되 내 자신이 죄 아래 팔렸다 했습니다. 15절부터는 신앙인의 내적 갈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내가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으로는 잘 해보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을 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은 것을 하면 율법의 선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원치 않은 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이기 때문에 죄를 죄로 들어나게 하는 율법이 선함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내용들인데 사도 바울 같은 분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음은 우리들에게 우리 속에 있는 죄에 대하여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20절에서 다시 반복하기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21 절에서 한 법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내 마음속에 그것을 방해하는 죄의 법이 따로 있어서 그 죄의 법이 내가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끌고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4절,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 가를 고백하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너무 연약하여 육신의 법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너무 미약한 존재임을 깨달을수록 그런 자신을 죄에서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더 많이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 바울이나 우리 같은 너무 연약하고 무능한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으며 그럴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므로 성화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8장 성화와 성령

(8:1-11) 영에 속한 자 : 예수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영과 육의 갈등의 현실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앞 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마음에서 원하는 바는 행치 아니하고 결과적으로는 마음이 싫어하는 것을 행하게 되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8장에서는 그런 육의 갈등에 대한 답을 성령으로 풀어주고 있습니다. 1절, 2절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들은 죄인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셨다는 말입니다. 또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은 육적인 욕심이나 육적인 갈등에서 온전히 해방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때로는 육에 져서 일시적으로 죄의 욕심에 끌려갈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육의 욕심에서 벗어나 생명의 위치로 환원된다는 의미인데 8장 전체에서 이에 대해 보충해 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절, 4절에서는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께 인류의 죄를 떠맡기심으로 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시어 우리가 마치 율법을 다 지킨 것 같은 존재로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5절, 6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을 좇는 자란 하나님을 마음에 전혀 두지 않고 육만 위해 살아가는 불신자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는데 불신자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전혀 두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자들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8절에서 말한 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10절부터 11절까지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면 몸은 죄 값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되므로 몸은 죽었으나 영은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영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살리실 것이라 했습니다.

 

(8:12-17) 하나님의 후사 : 12절에서는 성도들을 빚진 자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빚진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빚진 자들인 성도들이 육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육신에 져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 했습니다. 만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 했습니다. 14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영육의 갈등속에서 때로는 육에게 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육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결국은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입니다. 15절에는 우리가 본래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 밖에서 살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지만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 주시어 우리 모두는 양자의 영 즉 성령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후사(상속자)인 것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영광을 얻게 될 것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8:18-25) 소망과 인내 : 18절에서 성도들이 받는 핍박으로 인한 현재의 고난이 심히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우리들에게 베푸실 큰 영광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고난은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별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고대하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일이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썩어질 육의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져 오직 영의 삶만을 살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소망 즉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인데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 아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즉 물질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것 말고 세상의 피조물들이 다 불에 타고 없어질 때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이라 했습니다. 25절에서 만일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자들이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 했습니다.

 

(8:26-30) 성령의 중보기도 : 26절, 27절에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미처 빌지를 못한 것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 했습니다. 28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도우시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어떤 좋고 나쁜 일들이 모두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현실에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어떤 해석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리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택하신 자들로 예수를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과 또 장차 주님 재림시에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영광을 입히셨다는 말입니다.

 

(8:31-39) 구원에의 확신 : 앞에서 성령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주시며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31절부터 39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철저한 도우심으로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3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걸어서 고소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고소해봐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다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들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 했습니다. 아무리 심한 핍박이 우리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 해도 믿음을 버리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7절에서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38절, 39절에서 다시 강조하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최후까지 우리들의 믿음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9장 유대인의 구원문제

(9:1-5) 선택받은 이스라엘 : 사도 바울은 자기의 민족인 유대인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에 비하여 여러 가지로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결국 그런 특권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여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을 지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표현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표현의 방법 즉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이지 자기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4절에서 선택받은 유대인들의 특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양자됨, 영광과 언약들,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믿음의 조상들이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좋은 여건에서 생활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어 교만하여 이방인들을 깔보고 자기들의 족보만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9:6-13) 약속의 자녀 : 이스라엘에게서 난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이전에 이미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그 아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도 야곱과 에서가 있었지만 두 아들 중 동생인 야곱이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이렇게 부르심은 그들의 행위에 있지 않고 행위와 상관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부르시는 이의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9:14-18) 하나님의 주권 :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불의하냐고 묻고 그럴 수 없다고 답을 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자의 마음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바로왕을 택하시어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을 진행하셨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주권으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바로왕이었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주권으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9:19-29)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앞에서 바로왕의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왕을 택하시고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어 한사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왕이 그렇게 완강히 거절하도록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면 강퍅하게 하신 하나님의 책임이요 하나님의 잘못이지 바로왕은 책임이 없다고 말을 할 자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통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함같이 바로왕에게 그 책임을 물을 만하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20절부터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 마음에 따라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로 한 분노를 즉시 나타내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다든지 영광을 받기로 한 자들의 영광이 더욱 부해지도록 하셨다고 한들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와 같아서 주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중에서도 부르시고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 구원 얻을 자를 불러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는 누구든지 부르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2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남은 자가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이방인이란 이름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도 남은 자가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9:30-33) 행위로 의를 촉구 : 율법도 없고 어떤 특권도 없었던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믿음을 버리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돌에 부딪혀 깨진 결과가 된 것이라 했습니다. 33절에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는데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저를 믿는 자는 튼튼한 반석이 되려니와 저를 믿지 않는 자는 부딪혀 깨지게 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10장 이스라엘의 불순종

(10:1-4)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 :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의를 모르고 자기들이 가진 지식으로 의를 세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으로서는 의롭게 되는 길이 불가능함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0:5-15) 믿음으로 얻는 구원 : 5절에서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라는 말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의롭게 되어 그 의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다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는 자는 교만한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절에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ㆍㆍㆍ” 라 했는데 이 말씀은 신명기 30:12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여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율법을 행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을 향해 주는 책망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들에게 의롭게 되는 구원의 말씀을 이미 주셨는데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리고 전해 주신 복음은 믿지 않고 의롭게 되는 방법을 자기 개인의 고집과 지식으로 찾는 자들을 향해 주는 책망인 것입니다.

 

이 책망에 대한 답 즉 의롭게 되는 답을 8절에서부터 주고 있습니다. 지켜 의롭게 되는 주의 명령이 하늘에나 바다건너에나 음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9절, 10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하시지 않고 누구든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셔서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14절, 15절에서는 보냄을 받은 복음 전파자가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듣게 되고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전파하는 자의 사명을 두고 이사야 52:7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10:16-21) 이스라엘의 유기 : 16절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몸으로 오신 메시야의 복음을 듣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는데 그들이 복음듣기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18절에서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대해 전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기회가 많았지만 듣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19절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유로 유대인들을 버리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이방인들과 함께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시기나게하여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0절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므로 오히려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이 받을 복이 넘겨지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사랑을 찾아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 나도록하여 유대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장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

(11:1-6) 이스라엘의 남은 자 :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므로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시기심이 나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신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에 대해 소개받았습니다. 11장 1-6절에서도 이스라엘을 끝까지 참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안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버리시지 않은 사실을 엘리야 선지자의 예를 들어 변호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의 줄거리는 왕상 19:1-18 까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들어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엘리야 외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선지자 7천을 남기시겠다고 하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두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11:7-10) 택함을 받지 못한 자 : 1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중 택하심을 입은 자 즉 남은 자들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여기에서는 택함심을 받지 못한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에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는 복음을 믿고 순종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로 구원 받으려 했지만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지만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은 완악하여졌다 했습니다. 8절은 신명기 29:4 의 인용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불순종한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과 귀를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9절, 10절은 시편 69: 22 의 인용인데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다윗의 원수들에게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다고 했습니다. 밥상은 육의 양식인데 육의 양식이 올무와 덫이 되게 해 달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의 밥상인 복음을 거절하므로 복음이 그들의 올무와 덫이 되었으며, 그들의 눈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가 된 것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불쌍한 상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11-24) 이방인의 구원 : 1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완전히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잠시 이방인에게 넘어가게 함으로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돌아가게 되었는데 만일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얼마나 구원의 문이 넓어지겠느냐 라 했습니다. 13절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시기가 나게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얼마만이라도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이스라엘을 버리므로 이방인들을 구원하게 되었으니 만일 이스라엘이 순종한다면 얼마나 많은 수의 구원이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조상들이 거룩하였은즉 이스라엘 중 구원을 얻은 백성들도 거룩하다 했습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에서는 이방인들을 돌 감람나무 가지로 비유하고 이스라엘을 참 감람나무 가지로 비유하여 참 감람나무 가지의 일부가 꺾이고 그 자리에 돌 감람나무 가지가 젖 붙임을 받아 돌 감람나무 가지가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으니 꺾인 참 감람나무 가지를 향하여 돌 감람나무 가지는 교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참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받아 돌 감람나무 가지가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참 감람나무 뿌리에서 공급되는 진액을 받아먹을 수 있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받아먹을 그 진액을 이방인들이 은혜로 얻어먹고 살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참 감람나무 가지가 꺾인 것은 돌 감람나무 가지로 젖 붙임을 받게 하기 위함인데 믿지 않은 참 감람나무 가지는 꺾이었고 믿는 돌감나무 가지는 젖 붙임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참 감람나무 가지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으시는 하나님께서 돌감나무 가지도 아끼지 않고 꺾으실 것이라 했습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격하심 때문에 불신했던 이스라엘 중 일부를 버리셨으며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이방인 중 일부를 받아드리셨는데 만일 이방인인 너희가 계속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인자가 계속 주어질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이방인인 너희들도 꺾일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 불신자들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젖 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데 하나님께서는 젖 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돌 감람나무였던 이방인 너희들도 돌 감람나무의 본성을 떠나서 본성이 전혀 다른 참 감람나무에 젖 붙임을 받아 살 수 있었는데 하물며 꺾인 참 감람나무 가지가 다시 본래의 참 감람나무에 젖 붙임을 받는 것은 얼마나 쉽겠느냐고 했습니다.

 

(11:25-32) 이스라엘의 회복 :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비밀이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더욱 완악하여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지난 이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하므로 대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기가 나서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었는데 일시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 같으나 이스라엘은 본래 택한 백성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요 언약 백성들이기 때문에 언약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긍휼을 베푸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시어 이스라엘과 약속한 언약을 이루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인 것 같이 가두어 두셨다가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도록 하셨으며 또한 불순종한 이스라엘로 시기심이 나게 하여 다시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구원의 문으로 다시 들어오게 하심으로 구원은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인에게나 공평하게 문을 열어두시어 하나님의 긍휼을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게 되었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11:33-3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찬양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깊으신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 찬양하고 있습니다.

 

12장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의 생활

(12:1-2) 하나님에 대한 의무 : 1절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제사는 동물을 죽여 피로 드리는 제사이나 우리들에게는 살아 있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권하고 있습니다.

 

(12:3-8) 교회에 대한 의무 : 3절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으며 4절에서는 우리 각자가 한 몸의 지체들이므로 각 지체에게 주신 각자의 은사대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을 내가 못해서 시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주신 은혜 안에서 믿음의 분수대로 봉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12:9-13) 타인에 대한 의무 :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했으며,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 했으며, 부지런하여 개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했습니다.

 

(12:14-20) 핍박하는 대적들에 대한 자세 : 14절에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했으며, 15절에서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했으며, 16절에서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했으며, 17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했으며, 18절에서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했으며, 19절에서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했으며, 20절에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했으며 21절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했습니다.

 

 

13장 국가와 사회생활의 윤리

(13:1-7) 권세에 대한 의무 :1절, 2절에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란 국가와 같은 기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한다 했습니다. 3절에서는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법을 어기지 말고 선을 행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권세자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4절에서는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지 말라 했으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5절에서는 그러므로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되 권세자들의 노를 인하여 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양심을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6절에서도 공세를 바치는 것도 역시 그렇게 양심을 인하여 하라 했습니다. 7절에서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했습니다.

 

(13:8-10) 사랑의 의무 : 8절에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했으며, 9절에서는 여러 가지 계명들이 있으나 그런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13:11-14)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각성 : 11절에는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주님의 재림(구원)이 더욱 가까웠다 했습니다.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13절에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을 도모하지 말라 했습니다.

 

14장 성도의 자유의 한계

(14:1-4) 강한 자와 약한 자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믿음이 약하여 의심하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강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지만 어떤 연약한 자는 채소만을 먹는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판단하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둘 다 아무런 차이가 없이 둘다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14:5-1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5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의 마음에 확정할 지니라 했으며 6절에서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며 하나님께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먹으며 또한 먹지 않은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7절, 8절에서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했습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죄 값으로 죽었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에서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요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혀가,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자백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14:13-23) 신념의 생활 : 13절에는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 했습니다. 14절에서는 어떤 음식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다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않은 것이라 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그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했습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19절, 20절에서는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다 했습니다. 21절에서는 만일 믿음이 약하여 먹을 만한 믿음이 없는 자 앞에서는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답다 했습니다. 23절에서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 했습니다.

 

15장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위한 메시지

(15:1-6) 약한 자의 짐을 져 주라 : 1절, 2절에서는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 스스로만 즐겁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했습니다. 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사시지 않았다 했습니다. 5절, 6절에서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 했습니다.

 

(15:7-13) 서로 받아드리라 : 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받아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했습니다. 서로 받는 것은 연약한 자나 강한 자, 또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서로 구별하지 않고 서로 받으라 했습니다. 8절과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인 사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사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므로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했습니다. 10절, 11절에서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고 주를 찬양하라 했습니다. 12절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다 했으며,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 했습니다.

 

(15:14-21) 바울의 선교관 : 14절에서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면하는 수준에 있음에 대해 사도 바울이 확신한다 했습니다. 15절에서는 그러나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써 보낸다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그 은혜란 사도 바울 자신을 통해 이방인의 전도를 위한 일군이 되게 하여 이방인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케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17절,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있는 데 그 자랑이란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에게 역사하신 일들 즉,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신 일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했다고 했습니다. 20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되 이미 다른 사람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1절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이사야 52:15)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15:22-32)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 22절부터 24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뜻이 여러 번 막혔고 이제는 지금 있는 지역에서는 그 이상 일할 곳이 없기 때문에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 교회에 갈 계획이 있었으므로 스페인을 가는 길에 로마 교회를 방문하여 먼저 로마 교인들과 교제하고 어느 정도 사귄 후에 로마 교회의 후원으로 스페인으로 떠나고자 한다 했습니다. 25절에는 그러나 지금은 이방 교회들로부터 거둔 구호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26절에서는 이 구호금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얼마를 보낸 것이라 했습니다. 27절에서는 이방 교회들이 기뻐서 구호금을 바쳤지만 이방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영적으로 빚진자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을 전달받았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전해 받았으면 육신의 섬기는 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했습니다.

 

28절에서는 이 구호금 전달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했습니다. 29절에서는 로마 교회를 방문할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 알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란 늘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셨던 은혜와 축복을 말하는 것으로 그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함께 하셨던 모든 은혜와 축복을 서로 나눔으로 이 축복을 느끼게 될 것이고 또한 사도 바울이 가 있는 동안에도 늘 함께 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함께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씀으로 풀이 됩니다.

 

30절, 31절, 3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부탁한 기도 내용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가지고 가는 구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거부감이 없이 기쁨으로 받아 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33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라 끝맺고 있습니다.

 

16장 문안 인사와 축복

(16:1-2) 뵈뵈를 천거함 : 사도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자매 뵈뵈를 추천하기를 로마 교회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가 필요한 것을 주라고 부탁하고 있으며 뵈뵈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것은 뵈뵈가 여러 사람과 사도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로마교회로 보낼 때에 뵈뵈를 통해 전달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16:3-16) 문안 인사 : 3절에서는 사도 바울은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했습니다. 브리스가는 부인이고 아굴라는 남편인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 부부중 부인인 브리스가가 더 사역에 도움을 주는 자였는지 부인 이름을 먼저 쓰고 있습니다. 4절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소개하기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하여 이 부부가 바울과 이방 교회들에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5절부터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에베네도 에게 문안하라 하면서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아시아에서 처음 개종한 자인 것으로 보아집니다. 6절에서는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했습니다. 로마 교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자매인 모양입니다. 7절에서는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했습니다. 이들이 언제 옥에 갇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했으며 이들은 사도들(그리스도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사도 바울보다 먼저 개종한 자들이라 했습니다.

 

8절에서는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볼리에게 문안하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사랑하는” 이라 표현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전도 사역에 크게 이바지 한자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9절에서는 우르바노와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했으며 10절에서는 아벨레와 아리스도볼로에게 문안하라 했으며, 11절에서는 헤로디온 12절에서는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했는데 이들은 주 안에서 수고한이들이라 소개 했습니다. 또 버시에게 문안하라 했는데 그를 소개하기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라 소개 했습니다. 13절에서는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한 것을 보니 사도 바울을 마치 자기 아들과 같이 돌보았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14절에서는 아순그리도와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 문안하라 했습니다. 15절에서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했습니다. 16절에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한다 했습니다.

 

(16:17-20) 분파주의에 대한 경계 : 17절에서는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18절에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또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19절에서는 로마 교회가 순종 잘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서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이 기뻐한다고 하면서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라 했습니다. 20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했는데 이 말의 뜻은 속히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사단을 파멸시킬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16:21-27) 문안과 송영 : 3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중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문안을 전했는데 21절부터 27절까지에서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의 문안을 로마 교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아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문안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친척” 이라는 표현을 몇 곳에서 하고 있는데 “나의 친척”이란 꼭 친척이라기 보다는 같은 동족의 뜻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22절에서는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 편지를 보낼 때에 사도 바울이 불러준 것을 옆에서 다른 사람이 받아 적어 보낸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부분에서만 사도 바울이 친필로 써서 그 편지가 바로 사도 바울이보낸 편지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23절에서는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하였습니다. 가이오를 온 교회 식주인이라 했는데 고린도에 있었던 가이오는 고린도를 거쳐가는 전도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헌신적인 인물로 보아집니다. 그리고 에라스도는 고린도 도시의 재무 장관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쓰고 있으며 바로 식주인 가이오의 집에서 쓰고 있다고 봅니다. 24절은 없고 25절부터 27절까지에서는 복음을 통하여 모든 민족으로 믿어 구원케 하시고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