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과 헤롯 – 마태복음 14:1-14

최근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을 했는데 이북에 있는 백성들이나 남한에 있는 국민들이 그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김일성 주석은 6.25 전쟁을 일으켜 너무 많은 전사자와 전쟁 피해를 불러온 전범자요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북 국민들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죽었다고 생각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 이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가족이 나누어졌으며 상상할 수 없는 피해와 학대를 당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꼭 태어났어야 하는 사람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스토리는 세례 요한과 그를 목베어 죽인 헤롯에 대한 것입니다. 즉 경건한 사람과 불 경건한 사람을 대조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인데 불 경건한 사람이 경건한 사람을 죽임으로 불 경건한 사람이 승리하고 악이 득세한 것 같이 보여지지만 그러나 최후의 참 승리는 불경한 사람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불 경건한 사람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참패를 당한 것 같았던 경건한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그 동안 49년 동안 승리자같이 휘둘렀지만 이제는 영원한 패자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고 그에게 죽임을 당했던 많은 의로운 피들은 영원한 승자로 자리가 바뀌이게 된 거와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 남에게 유익한 사람과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 경건한 사람과 불 경건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의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영원한 승자들이 다 되시도록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4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므로 본문이 갖는 본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과 그 교훈을 우리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헤롯의 두려움(1-2)

[2]세례 요한의 소리(3-5)

[3]헤롯과 헤로디아의 범죄(6-11)

[4]세례 요한의 순교와 예수님의 사역(12-14) 입니다.

 

[1]첫 번째로 헤롯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자신의 사적인 감정으로 옥에 가두고 목을 잘라 죽이기는 했지만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세례 요한이 그에게 말할 때에는 크게 번민하였다’는 사실을 막 6:20 에서 알게 됩니다. 죄 없는 의인을 목베어 죽인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죄책감 속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헤롯이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그런 권능이 그 속에서 역사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 10:41에 보면 세례 요한은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아니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음 같이 세례 요한이 능력 행하는 것을 헤롯이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는데도 예수님의 능력 행하신 사실을 듣고 분명히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큰 능력을 행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가 세례 요한을 죽이므로 세례 요한이 끝나 버린 게 아니고 세례 요한의 혀는 잠재웠는지 모르지만 헤롯의 잘못을 지적한 그 소리는 잠재우지 못하고 헤롯의 양심 속에는 세례 요한의 소리가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늘 불안해하는 헤롯을 보면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영원한 패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2]두 번째로는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이 무엇이었던가요? 주님이 가실 길을 미리 평탄케 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외쳐 대는 광야의 소리의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역할이 회개를 외쳐 대는 소리인데 헤롯이 불법적인 결혼을 한 사실을 보고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헤롯의 죄를 지적한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목 베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이란 사람이 얼마나 거칠고 나쁜 사람인 줄 세례 요한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자기에게 닥칠 위험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리’를 내는 것만을 생각하였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약아빠진 이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처세를 잘못한 사람이라 하겠지요. 입만 다물고 있었다면 목숨을 잃지 안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대통령께 바른말을 하기는커녕 아첨하는 ‘소리’를 내며 밥 먹고 목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처세가 능한 사람으로, 또는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리면 다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소리, 정직한 소리, 내가 손해가 나도 내는 소리, 하나님이 하라는 말을 하는 그 소리가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소리라고 믿어질 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소리가 또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소리일까요? 아첨하는 소리, 남을 험담하는 소리, 말할 사람 앞에서 말하지 못하고 뒤에 수군수군하는 소리,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 조의 미친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세상에 꼭 내야 할 소리를 내는 주님의 소리들이 다 되시기 원합니다.

 

[3]세 번째는 헤롯과 헤로디아의 범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와 있는 그들의 범죄를 소개하면서 또한 헤롯이 어떤 인물인지? 또는 헤로디아나 그의 딸 살로메가 누구인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4장 1절에 분봉왕 헤롯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분봉왕이란 나라 전체의 사 분의 일을 통치하는 통치자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모든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던 헤롯은 헤롯 대왕이고 이 헤롯 대왕이 죽고 그의 세 아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맡겨서 통치하게 되어 본문에 나온 분봉왕이란 안디바라는 아들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맡아 통치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두매인 이었는데 그가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바로 이 헤롯 안디바를 낳았고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아라비아의 아레다 왕의 딸과 결혼하였던 것입니다. 또 헤롯 대왕이 유대인인 제 2의 여자로부터 낳은 아들이 헤롯 빌립이었으며, 또 헤롯 대왕이 다른 유대인 제 3의 여자로부터 낳은 아들의 딸이 본문에 나오는 헤로디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손녀가 되고, 분봉왕 헤롯이란 자와 헤롯 빌립은 배가 다른 형제간이요, 헤로디아는 안디바나 빌립의 조카 사이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배가 다른 친 삼촌 빌립과 결혼을 하여 살로메라는 딸을 낳은 후 서로 별거한 상태였는데, 그때 헤롯 안디바가 그의 이복 형제인 헤롯 빌립을 만나러 갔다가 빌립의 아내 되는 헤로디아를 보고 욕심을 내서 헤로디아를 설득하여 자기 아내가 되게 한 것이며 그때 그의 딸 살로메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의 신분은 현재 결혼한 부인이 있고, 역시 헤로디아도 별거 중일뿐이지 법적으로 남편이 있는 입장이므로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전연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나 자기들의 욕심을 앞세우고 강행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듣고 보았던 세례 요한으로서는 헤롯 안디바아의 죄악을 지적하였고 자기들의 죄를 지적한 선지자를 헤롯 안디바나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되었고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지적하는 그 소리”를 영원히 없애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마치 헤롯 안디바의 생일 파티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생일 축하 춤을 추게 되었고 헤롯 안디바가 고마워서 살로메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선물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할 때 헤로디아가 그의 딸 살로메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구하도록 하여 왕으로서 많은 귀빈들 앞에서 한번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오도록 명하므로 헤로디아와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선물로 받았고 하나님의 선지자는 방탕한 한 왕의 허세와 악랄한 두 모녀의 흉계에 의해 목숨을 잃은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생명을 조준한 마녀의 사냥 춤, 뭇 남성들의 색정을 들뜨게 하고 눈을 뜨겁게 하는 방탕과 위선과 감각적인 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입니다.

파티에 참석자 중에 그 누구도 그런 악랄한 흉계를 중지하도록 충고하는 ‘소리’를 내는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죄악에 맞물려 있었던 그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렘 36:25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 시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두루말이를 불사르려 할 때 신하 중 왕을 말리는 ‘세 소리’가 있었음을 퍽 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 ‘세 소리’를 듣고도 왕은 두루말이를 불태웠지만 말입니다. 또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서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하고 큰 잔치를 베풀고 귀빈들을 초청하고 잔치를 했으며 왕후 와스디도 여인들을 위해 따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이 술기운이 올라와서 술기운에 예쁜 자기 부인을 남성들 앞에 내세워 자랑하고자 하여 신하를 시켜 그 자리에 나타나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를 거절한 이유로 그곳의 신하들이 왕께 제안하여 왕후의 위를 폐하고 대신 다른 사람을 선택하자는 것에 왕이 동의한 결과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와스디 왕후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갖지 아니하고 신하들 의견에 세뇌되어 남편의 말을 거역한 것만 기억을 하고 왕후의 폐위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여자가 남자들만 모여 있는 술잔치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동방의 습관으로서는 아름답지 못한 일로 와스디는 여자로서 또 왕후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미덕을 지켰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와스디가 왕후의 자리는 빼앗겼지만 남자들만의 잔치에 딸을 내세워 요염한 춤까지 추게 하여 참석자들과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음탕한 헤로디아와는 전연 구별된 인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헤롯 안디바의 본래 부인이 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아버지 집으로 피신을 했고 친정 아버지 되는 아라비아의 아레다 왕은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전쟁을 했는데 이 전쟁에서 헤롯 안디바는 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로디아는 자기 친 오빠인 아그립바 1세가 왕의 칭호를 황제로부터 얻게 된 것을 보고 시기하여 자기 남편인 헤롯 안디바에게 권하여 황제에게 가서 왕의 칭호를 얻고자 간청하였으나 오히려 로마 황제를 반역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스페인으로 유배를 당하고 거기서 비참한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로 걷다가 얼음이 꺼져 날카로운 얼음이 목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헤로디아가 사람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 할 정도라면 사람이 아닌 짐승의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겠지만 교회 역사가들의 증언을 보면 자기의 결혼을 반대하고 이를 지적한 혀가 얼마나 미웠던지 소반에 담아진 피 흐르는 세례 요한의 혀를 뾰쪽한 바늘로 미친 듯이 찔렀다고 합니다. 그런 피의 값을 하나님께서 물으셔서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음성이 기억됩니다.

 

[4]네 번째로 세례 요한의 순교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2절에 보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세례 요한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무엇이 없는 무덤이었던가요? 시체가 없는 무덤이지요. 왜냐하면 부활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무덤은 머리가 없는 몸체만 묻힌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 부분은 하나님의 소리를 내다가 헤로디아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모든 사실을 전달해 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 스승으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예수님의 지도를 받고 생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흉악한 사실을 전달받고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살기가 등등한 헤롯 안다바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벗어나려고 벳세다 광야로 피신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시어 한적한 빈들에 가셨는데 소문을 듣고 여러 마을로부터 큰 무리가 몰려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무리가 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왔을 것으로 짐작이 되십니까? 주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몇 명을 먹이셨지요.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와 여자들까지 합친다면 2만 여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이적을 베푸시어 배불리 먹이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의인으로, 선지자로 인정을 했던 백성들은 재판도 없이 악랄하게 세례 요한을 죽인 사실을 부당하게 여겼으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더욱 뜨겁게 달군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큰 무리가 몰려들고 주님의 사역은 이때부터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런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씨를 뿌린 대로 그 열매를 거두게 되므로 선을 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선을 심는 것이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이며 악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겪는 갈등을 내 욕심으로 풀지 말고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나 헤로디아가 악인으로 판정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거슬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던 그들의 인생은 불행이었고 패망이었음을 잘 실증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직언을 듣고 회개했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 때도 행복했을 것이고 또 저 세상에서도 행복했을 터인데 회개를 거절하고 오히려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므로 그들 속에 고통과 번민이 가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성령과 육체의 욕심이 서로 싸우는데 성령이 이기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육체의 욕심이 이기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해도 자기 스스로를 쳐 복종케 한다고 함은 육의 욕심이 성령을 거슬려 이기려 하니 육의 욕심을 쳐서 성령께 복종하게 하고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도 성령을 거슬리는 육의 욕심이 발동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 영육의 싸움이 있기 때문에 이긴 자가 누릴 영광이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피하고 싶은 육의 욕심이 있었으나 자기를 쳐 복종케 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모두도 헤롯 안디바나 헤로디아나 생일 잔치에 참석한 무리들이 가진 죄의 근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근성은 무엇이었을까요? 눈이 보고 욕심 내는 것을 그대로 누리는 사치와 소유욕의 근성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며 하고 싶은 것을 다하는 그런 근성입니다. 또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싫고 나에게 아첨하면 좋아하는 지극히 동물적인 근성도 있는 것입니다. 원수는 어떻게든지 미워하고 앙갚음하고 마는 그런 근성 말입니다. 그리고 또 술을 마시고 약간 빗나가 보고 방탕하고자 하는 방탕기도 있고 남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허세나 남을 우습게 아는 교만도 있고 그 사람 앞에서는 바른 말을 못하고 뒤에서는 딴 소리를 하는 그런 근성들을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위신이나 자존심을 살리느라 어떤 자의 생명과 같은 인격을 쉽게 짓밟는 살인적인 근성도 또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갈대들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놓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 속에서 매일 매시에 일어나는 육과 성령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힘을 입어 육적 욕심을 이기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이를 사양하고 내가 아무리 가기 싫고 하기 싫더라도 말씀이 이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약한 존재들이므로 교만하지 말고 어떤 실수라도 있었다면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빨리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제를 놓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말씀을 통해 답을 얻어내고 그 말씀의 답대로 생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답이 전연 비상식적인 것같이 느껴져도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도록 명했을 때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거와 같이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맞지 않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 간다 해도 성경에서 얻은 답이 정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의로운 삶은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삶은 지금은 성공적인 삶 같지만 영원히 실패된 삶이요 내 욕심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우선은 지는 삶 같지만 영원한 승리의 삶인 것을 깨달으시고 나를 쳐 복종케 하는 삶을 살므로 영원히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