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부활의 예고 – 마태복음 16:21-28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과 ‘메시아’로 고백한 때를 계기로 지금까지 암시적으로만 말씀하셨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발표하심으로 지금까지 초급반에서 제자 교육을 받던 제자들을 이젠 고급반에서 보다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되는 전기를 맞게 됩니다. 제자들이 아직 미숙하여 십자가나 부활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낮은 수준에 있었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이 마당에 제자들이 앞장서서 군중들과 함께 ‘정치적, 경제적 승리를 가져다 줄 메시아’로 세우려고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게 될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즉 ‘메시아’란 ‘정복자’가 아니라 ‘수난자’인 것을 예고하시므로 바른 메시아 관을 심어 주시어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이시라’는 본 뜻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공포되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우리 각자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지 주님께서 전달하려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충분히 잘 전달받아 주님이 바라시는 삶을 살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주님 오실 때에 큰상을 받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구분하여 본문이 주고자 하는 뜻과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는 주님(21)

[2]베드로의 거역(22)

[3]베드로를 책망하심(23)

[4]제자들에게 요구하신 헌신과 이에 대한 보상(24-28)입니다.

 

[1]맨 먼저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주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명확한 변동될 수 없는 사건이므로 이를 제자들에게 알리고 세상에 공포해야 하겠지만 이를 갑자기 발표하시지 않고 단계적으로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암시적으로 ‘요나의 표적’이라 표현하셨으나 21절에 보니 ‘이때로부터’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이때가 언제일까요? 베드로가 ‘주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보면, 먼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한글 성경 상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표현되었지만 영어에서 보면 ‘He must go’이라고 되어 있어 예루살렘에 가도 좋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되는 본인에게 선택의 여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꼭 가야 하는,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이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여 세상에 오신 아들 예수님으로서는 꼭 순응해야 하는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수난의 현장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분이신데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려고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가셔야 하는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히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 것이 성령의 뜻임을 알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던 걸음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위대한 지도자들을 회상하며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게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란 유대 최고 법정을 구성한 공회의 회원들로서 정치, 종교, 사회의 대표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정치, 종교, 사회의 지도자들 전반에 걸쳐 주님을 거역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장로들이란 재덕을 겸비한 가장 존경받는 어른 계급이요, 대제사장들이란 사두개인들 중에서 선출된 종교 최고 직분 자들이요, 서기관들이란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사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마땅히 메시아를 바로 이해하고 메시아를 따르고 메시아에 대해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의 종교, 명성, 위치, 재물 등에 눈이 어두워 메시아를 세상 보물과 맞바꾼 장본인들인 것입니다. 세상 보물을 주고 예수를 차지한 사도 바울과 대조되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게 되리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어떤 고난들을 받으셨나요? 주님께 채찍질을 하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며 유대인의 왕이라 했다고 희롱하고 남을 구원한다 했으니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희롱하고, 또 그 갈대를 빼앗아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십자가를 지워 끌고 갔음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런 고난을 받은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3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날 무슨 요일이었지요? 금요일이며, 부활일은 주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3일 후에 부활할 것을 아시는 주님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예언을 이해할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로 베드로의 거역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이를 적극 반대한 것을 보게 됩니다. 22절을 보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한 것을 보게 됩니다. ‘붙들었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그의 반대하는 마음을 강하게 전달하고 막기 위해 주님을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간하여 가로되’의 ‘간하다’라는 말은 영어의 Rebuke 로서 ‘간청하다’는 말이 아니라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는 의미로 주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훈계했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아니 자기가 마치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자처럼 당돌하게 한 발언이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히실 때에 칼을 써서 주님을 보호하겠다는 자세를 보인 바도 있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런 일이 결코 없도록 자기가 틀림없이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합니다.

베드로를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스승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자이고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잘못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반역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생각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에 따라 예수님께서 바로 오시리라 하신 그 메시아라는 것이었고 바로 이 메시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어 주변의 많은 이방 국가들을 정복하는 ‘정복자’ 또는 ‘나라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할 유능한 통치자’로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릴 그런 ‘나약한 메시아’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제자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무엇을 부탁했던가요?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하나는 왕의 오른 쪽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 달라고 했음을 기억해 볼 때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베드로는 뭣을 넘겨다 볼 수 있었을까요 국무총리 정도는 가능하다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버리고 십자가나 지고 있을 바보짓을 하지 말라는 간곡한 만류이었으리라고 봅니다. 주님은 영적인 세계를, 제자들은 육적인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세우리라’ 또는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등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교훈을 주셨으나 전연 이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 도망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3]세 번째로 베드로를 책망하심입니다.

베드로의 거역하는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 하셨습니다.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사단이라 하신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자체가 사단은 아니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가 사단의 짓을 한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때에도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럼 마귀의 시험과 베드로의 시험이 동질의 큰 실수라도 했다는 것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광야에서의 마귀의 시험도 마귀에게 절만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을 다 준다고 했으므로 십자가의 수난을 회피하고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세상 영광을 얻도록 주님을 유혹하였기 때문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였는데 베드로도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치 말고 세상에서 왕으로서의 영광을 차지하라는 것이므로 둘 다 동질의 유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 영광을 위함이 아내요, 세상에서 남을 섬기고,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인데 그런 희생을 피해서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라는 것이므로 베드로의 제안은 사단의 시험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만류대로 십자가 지시는 일을 포기하셨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만든 것이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예언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일이 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사단이 승리하도록 만든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한 것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반석인 베드로가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싫어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사단이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거역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사단이 바라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천사라 할지라도 그는 그때부터 사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나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이미 사단에 속해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대로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역시 주님께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십자가 지시는 일을 포기하셨다면 주님 역시 사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익과 편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모든 일이 사단의 일에 해당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들은 다 ‘넘어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4]네 번째는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헌신과 이에 대한 보상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셔야 함은 물론이요 제자들에게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함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란 희생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오, 십자가 바로 뒤에는 부활이 있으며 부활 후에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어 모든 영광을 누리시게 될 것을 빤히 내다보시는 주님께서는 본인이 죽고 큰 영광을 얻듯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걷도록 하여 같은 영광에 참례하자는 권면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이 수난이 없는 영광이 주어질 수 없음을 아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 주님께서 철저하게 자기의 유익, 자기의 번영,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신 것 같이 제자들도 자기 인생의 초점을 주님께 맞추어 주님이 바라시는, 주님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 심지어 생명을 버리면서라도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 머리로, 내 지식으로, 내 목적으로 운영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머리로, 주님의 지식으로, 주님의 목적으로 운영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운영 권을 내가 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운영하시도록 내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욕심에는 언제나 No 요 주님께는 언제나 Yes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은 인간인지라 인간이 갖는 많은 이기적인 욕망, 생각, 주장, 인간의 본성을 굴복시키고 철저하게 주님의 본성인 순종과 희생과 사랑이 내 속에서 살아 역사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라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밝히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인생이 짧고 세상은 허무한데 이것을 모르고 주님의 가르침에는 외면하고 세상 적으로 보다 안전한 삶을 살려고, 보다 편안하게 살려고, 보다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면 어느 때에 가면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다 쓸모 없게 될 것이고 자기의 목숨은 이 세상 사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나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자기의 세상 보물과 심지어 생명까지 버린 자는 소망대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보장입니다. 세상 재물이나, 부귀 영화 등 온 천하를 다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어 버린다면 그런 화려한 것들이 그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는 거와 같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오래 풍성하고 만족스런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인생에게 정해진 이치이므로 그가 죽거나 또 세상 끝이 오면 그런 삶은 중단되고 말 것이므로 일시적인 그런 삶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이 주시는 화려한 삶에 초점을 맞추어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갚아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어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너무 참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고통이 지난 지금은 영원한 영광인 것을 실지로 보여 주시면서 예수님이 걸었던 수난의 길을 따라 함께 걷다가 예수님이 누리시는 영광을 함께 누리자고 강권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모르고 했던 알고 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사단의 짓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는 인간의 일을 위주로 행한 모든 일이 사단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알게 모르게 행동했던 많은 일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를 위해서 하는 남편의 말이, 또는 아내의 말 중에는 사단이 역사 하여 했던 말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첫째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보다 열심히 배우고 그 본래의 뜻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생각해서, 아니 아내를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해서 ‘오늘 주일이지만 피곤한 몸으로 꼭 교회에 가야 하느냐고’ 교회를 가지 않기를 바라는 제안은? 어떻습니까?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을 두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말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일자리 없는 자에게 임시로 ‘주일에 일하는 직장에라도 나가다가 차츰 주일에 일하지 않는 직장을 구하라’는 교회 지도자의 직장 알선은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 위주의 모든 것들이 ‘사단의 짓’인 것을 믿으시고 사단의 손발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십자가와 영광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우리가 믿어 나가는데 내 욕심을 억눌러야 하는 고통부터 시작하여 남이 나를 핍박하는 많은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는 자세를 말합니다. 남이 나로부터 명예와 재물을 빼앗겠다고 하면 내 주어야 하는 양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는 자와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는 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를 높이고, 권세를 휘두르려고 하는 자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의 제자 상에 맞지 않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제사상은 ‘정복자’가 아니라 ‘수난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꼭 가셔야만 했듯이 우리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꼭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피하는 길은 일시적 왕은 가능하겠지만 영원한 왕은 되지 못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수난의 삶을 선택하셨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 발걸음에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큰 영광을 안겨 주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내 뜻이 죽고 주님의 뜻이 살아나는 이적이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일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표적이요, 영광을 누릴 보증서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고 또 영혼은 100년 살다 끝나 버릴 목숨보다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내 영혼 관리를 위해 무엇보다 큰 비중을 두실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내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내가 지금 행하려는 것이 내 욕심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인가? 내가 하는 행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지고 있는가? 사단의 권세에 의한 것인지를 자문 자답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다 되시어 주님이 베푸실 영광의 보상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