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되신 예수님 – 마태복음 17:1-13

우리 교회 교인 중에서 한 분이 대통령이 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직업이 많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이 모시고 있는 선생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므로 제자들도 빛을 보게 되리란 기대를 갖고 있던 차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고, 부활하실 것이며 때가 되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위해서 심판하러 오시겠다는 선포를 하셨고, 선생님만이 아니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도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다 져야 함을 전달받은 제자들로서 심정들이 많이 착잡했으리라 봅니다.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보좌했으니 남다른 베네핏이 돌아와야 할 터인데 특혜는커녕 세상에서 이루고자 했던 각자의 꿈을 버려야 하고 목숨까지라도 버려야 한다고 분명하게 강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선생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 같아 선생님의 주장을 철회하시라고 만류하였더니 ‘사단아 물러가라’고 까지 하시니 어안이 벙벙하였을 것이나 그래도 주님께서 그렇게 확고하게 말씀하셨음으로 그 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심판의 재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으리라 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복음을 들고 나갈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꼭 보여주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분명히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신 것을 믿게 하고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의심 말고 그대로 듣고 따르라’는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로서는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주님께서는 세 제자 앞에서 변형되신 초자연적인 모습을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변형되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교훈을 우리들에게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새롭게 영적 체험을 갖듯이 우리들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새롭게 영적 체험을 갖고 말씀에 대한 신뢰와 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또 그 영적 체험을 이웃에게 증거 하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변형되신 예수님(1-3)

[2]하늘에서의 소리(4-8)

[3]제자들의 질문(9-13)입니다.

 

[1]첫 번째로 변형되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절에 보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보여주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지 1주쯤 지나서 되어진 일로 누가복음에는 ‘팔일쯤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어날 사건의 장소는 높은 산이라고 했는데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이방 땅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행해진 것을 근거하여 그곳에서 좀 떨어진 헬몬산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으며 이 산은 해발 2814 미터인 산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건의 증인들은 베드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주님 좌우 편에 자기의 아들들을 앉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그 어머니의 아들들입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 세 제자들을 대동하신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신 목적은 눅 9장 28절에 보니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된 것을 보니 곧 일어나게 될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큰 부담과 끝까지 본인이 맡은 사명을 완전하게 해낼 수 있도록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절실히 필요해서 기도하시기에 방해받지 않은 곳을 찾으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차적인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 뒤에 주님의 대를 이어 하나님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해 줘야 할 제자들에게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 또 심판과 보상의 예고에 대한 하늘의 보증서를 보여주어 특별한 영적 체험을 갖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12제자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택한 것은 주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선택으로 보며 이 특별한 사건이 사실이었다는 증인이 되게 하는 의미로 한 사람이 아닌 3명을 선택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지만 누가복음 9장 28절 이하에 있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기록 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둘을 종합해서 보면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주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굴에서도 광채가 나며 옷에서도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계 1:16에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뵈었던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하였고, 시 104:2에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라고 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은 ‘빛’이나 ‘빛의 근원’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광채란 빛되신 하나님이나 주님의 영광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난 후에 영원히 영광을 누리시게 될 주님이시지만 십자가 수난 때문에 짓눌려 계신 현재의 주님께 힘을 주시기 위해 일시로 영광을 맛보게 하신 것 같습니다. 반면에 모세와 엘리야가 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일에 대해 예수님과 말씀하셨다는 기록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어려운 일이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모세와 엘리야까지 동원하여 재 확인 시킨 것을 보게 됩니다.

[2]두 번째로는 하늘에서의 소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그 동안에 곤하여 졸다가 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도 이 세 제자를 대동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조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라는 책망을 하신 바 있는데 세 제자들은 주님 곁에 있을 뿐이지 마음으로는 함께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졸다가 깨어나서 생전 처음 체험한 초자연적 현상에 베드로는 큰 감동을 받았고 그 영광의 가치를 깨달았는지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고도 자기가 한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졸음이 덜 깼다는 것인지, 너무 감동을 받아 흥분하여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말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풀어 본다면 주님! 우리 이 산에서 이대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산에서 내려가 봐야 머리 골치 아픈 일만 많고 이런 영광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할 터이니 여기에서 살자는 것입니다. 주님,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모실 수 있는 집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제안을 자주 하는데 이번 제안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세상 생활보다는 영적 생활을 훨씬 좋아하는 그의 자세도 좋고, 예수님이나 모세, 엘리야를 섬기겠다는 그의 사랑과 봉사 정신도 칭찬 할만 하다고 평가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상황 판단을 잘못한다던가 혹은 주님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후에 영광이요 지금은 십자가의 수난을 맛보아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주님더러 그 수난을 통과하지 말고 영광을 먼저 누리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 내용도 예루살렘에 가서 돌아가셔야 하는 문제였는데 베드로는 그 심각한 문제에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12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또 3제자를 데리고 온 뜻은 제자 훈련을 하여 주님의 대를 이어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수련회’에 대리고 오셨는데 나가서 전도할 사명은 망각하고 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자고 했으니 주님께서 속이 터지셨을 것입니다. 5천명, 4천명을 떡 몇 개를 가지고 먹이신 것을 체험하고도, ‘누룩’ 이란 말만 들어도 ‘도시락’생각을 하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받고도 또 세상에 내려가 수난을 당하지 말고 이 산에서 이대로 살면서 재미를 보자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그런 제의를 드릴 때에 빛난 구름이 와서 제자들을 덮었다고 했습니다. 구름이 덮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현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40년간 구름이 성막을 덮으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어 인도하심을 믿고 출발하는 출발 신호로 알았고 밤에는 불이 나타나면 출발했던 거와 같이 제자들 위에 구름이 덮고 제자들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저희들이 무서워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절대적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죄악된 인간이 느끼는 느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임을 제자들이 체험한 것 같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이와 똑같은 소리가 났었지요? 너희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독생자이시니 그가 하신 말씀을 소홀히 듣지 말고 경청하고 그가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빵으로만 사는 인생인 줄 알았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는 첫 경험을 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에서의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제자들은 하늘에서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엎드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시어 눈을 들고 보니 예수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주님, 두려움을 쫓아 주신 평강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3]세 번째는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체험한 변화 산상의 사건을 주님께서 부활하시기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을 막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나머지 9제자에게까지 라도 말하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신비스런 체험을 설명해도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소문이 나가서 전도 사역에 도움이 될 일이 못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상 이런 것을 체험한 3제자도 주님께서 부활하시기까지는 주님의 십자가나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 즉 하늘나라에 오른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눈으로 보는 신비스런 체험은 자기 개인에 대한 것이지 남에게 이야기할 거리는 못된다는 의미인 것으로도 풀이됩니다.

제자들에게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말라기서 4:5 에 기록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를 기억하고 주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를 우리가 보았는데 우리가 본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서기관들이나 성경을 아는 자들은 메시아가 오시기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메시아의 오실 길을 평탄하게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아이심을 이젠 분명히 깨달았고 오시기로 한 엘리야도 보았는데 엘리야의 오심을 비밀로 해야 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너희 말이 맞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그가 맡은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기로 한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인 것을 알지 못하고 엘리야가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지 아니하고 오히려 푸대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푸대접하듯이 메시아인 예수님도 메시아이신 것을 모르고 또 고난을 받게 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심을 듣고 제자들은 그제야 메시아보다 먼저 오기로 예언된 자가 실지로의 엘리야가 아니고 엘리야의 정신을 가진 세례 요한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이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내리신 영광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그 얼굴과 옷에서 광채를 발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세 제자는 졸다가 영화스럽게 하는 장면을 보았고 또 또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던 것입니다.그 영적 체험이 얼마나 그들에게 감격스러웠든지 여기가 좋사오니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자고 제안을 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아예 세상은 잊고 그 높은 산에서 영적인 평강과 기쁨과 안전을 누리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해야 하겠으며, 세 제자가 체험한 대로 하늘나라의 기쁨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영적 체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 대화하는 일에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택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서 내 마음을 전하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나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어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일개하고 우리의 얼굴은 광채를 발할 것이며, 제자들이 체험한 같은 종류의 평화와 안전과 기쁨이 넘쳐 ‘여기가 좋사오니’란 감격이 마음에서부터 울어 나와 입에서 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은 산에서 만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산에서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당에서만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집에서 만나셔도 좋으며 어떤 장소이거나 어떤 시간에라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라시면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찾아오시어 만나 주실 것입니다. 어디서든 만나는 장소에서 성경을 펴고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 장소에서 찬송을 해 보십시오, 그 장소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어 우리들로 하늘나라 사람답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사와 은혜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 없이 내게 영적 변화가 올 수 없으며, 내게 영적 변화가 없이는 우리의 얼굴에서 광채가 날 수 없으며, 우리의 얼굴에 광채가 없다면 내 마음에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여기가 좋다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만나시는 장소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시간을 통해 강같은 평화가 내 속에서 넘쳐 나므로 ‘여기가 좋사오니’란 고백이 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산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우리를 영화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심은 우리를 위로하게 하심이요, 우리를 위로하게 하심은 우리가 해내야 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일할 일터이지 우리가 영화를 받고 안식하는 장소가 아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기시고 모든 보상을 주실 때와 장소는 따로 예비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죄에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소개하여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수난의 시기에 처한 자들이지 영화만 받는 시기에 있는 자들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내려오면 우리에게 많은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지만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우리가 가야 할 곳에 가고 우리가 만나야 할 자를 만나 주님을 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산함으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을 다 감당해 내시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먼저 영적 확신을 갖고 우리가 가진 소망을 세상에 전파하시는 전파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