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오신 주님 – 마태복음 17:14-27

오늘 설교 제목을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함께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 이렇게 제목을 붙인 것은 첫째, 주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한 높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던 중 모습이 변형되시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하시던 ‘변화산’ 즉 높은 산에서 내려 오셨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그 산에서 하늘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누리며 안식하자’는 제의를 물리치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또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제자들을 집중 훈련을 시키기 위해 스스로 내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시면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걷도록 산에서 내려오신 그의 모범된 삶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모범된 삶을 닮아 살므로 주님께서 예비된 영광을 누림같이 우리 성도들도 뒤에 예비된 큰 영화를 누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주신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간질병 소년을 고치신 주님(14-21)

[2]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고(22-23)

[3]성전 세를 내신 주님(24-27) 입니다.

 

[1]간질병 소년을 고치신 주님에 대해 맨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내용과 같은 사건을 막 9장 14절부터 또 눅 9장 37절부터 기록해 주고 있는데 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서 관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서 하룻밤을 지새시고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시어 산 아래 기다리고 있는 9제자들에게 와 보니 많은 무리들이 제자들을 둘러섰고 서기관들과 변론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가지고 변론하느냐’고 물으실 때 한사람이 주님 앞에 달려와 꿇어 엎드려 간청하기를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기 독자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말하기를 제자들에게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9제자들이 이를 능히 고치지 못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병은 어려서부터 앓아 온 귀신들린 증세로 귀신이 그를 발작하게 하면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내며 온 몸을 떨게 하며 이를 갈고 곧 죽어 가는 것 같이 괴롭히는 간질병, 또 물이든 불이든 병자가 상하거나 죽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런 곳에 몰아 넣는 흉악한 귀신에 붙잡힌 병이었습니다. 귀신들린 결과로 벙어리 되고 귀가 먹은 증세까지 있었으므로 악질 귀신에 잡힌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침 받고자 예수님께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고치지 못하게 되므로 서기관들과 변론이 일어난 것 같으며 제자들이 고치지 못해 퍽 당황해 있을 때 주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아주 언짢아하시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시어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나 고치지 못할 것으로 변론하는 서기관들의 믿음 없는 것을 꾸짖으시고 머지않아 주님께서는 곧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므로 그들과 더 계실 수 없으실 것을 언급하시고 또한 어느 때가 이르면 더 참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까지 예고하시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소년을 이리로 데려오라고 명하시니 그 소년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 올 때에 귀신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그 아이에게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하시니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를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고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일어났다는 기록입니다. 즉시로 완치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병고치신 것을 목격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이미 받았고 그 동안 그 권능을 행사하여 병을 고쳐 본 경험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번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 하였습니다. 마태 17:21은 본문에는 없고 성경 아래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권위 있는 성경 사본에는 21절이 빠져 있으나 어떤 사본에 있으므로 소개한 것인데 21절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지적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이유”라 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믿음이 없는 이유 때문이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만큼의 적은 믿음만 있었어도 능히 해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해낼 수 있었던 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능력이 소모될 수 있을 것이므로 계속적으로 능력을 충전 받았어야 했는데 자신만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충전 받는 일에 게을리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높은 산에 오르시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힘을 보충 받으셨는데 하물며 모든 인간은 더욱 하나님과의 만남을 자주하고 능력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식 먹는 일도 잊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데 정성을 쏟았다 한다면 능히 귀신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큰 사건도 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능은 불신 때문인데 불신이란 할 수 있도록 내가 해야 할 일을 전연 게을리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할 자가 만나지 아니하고 구해야 할 자가 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질 수 있는 축복을 갖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는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고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후 곧 ‘예루살렘에 가시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역시 주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일에 대해 말씀을 나누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다시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2번째 언급하시게 됩니다. 이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게 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사실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이를 믿지 않은 것이며 또한 자기들의 욕심에 어긋나는 사건이므로 더 깊이 알고 싶지도 않았나 봅니다. 즉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휘두름’이지 ‘나약하게 죽어 영적 축복을 받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연거푸 강조하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주님께 묻기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으로 이미 베드로에게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하신 일이 있으므로 혹시 또 말을 잘못했다가 더 큰 책망을 받을까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이 ‘십자가와 부활’이라 할 수 있겠으며 또 제자들을 택한 목적이 이 사실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연결짓는 고리요,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연결짓는 고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제자들이 이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묻지 않은 것은 ‘배와 그물을 내버려두고 불림을 받은 그 목적도 모르는 제자들’이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당연히 물었어야 할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질문 중 가장 고귀한 질문을 회피한 것입니다. 필요 없는 질문은 잘하면서도 꼭 필요한 질문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다 도망을 쳤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못 자국을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그런 불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주님 생애의 하이라이트요 제자들이 전파해야 할 주제였으며 현재 우리에게도 믿음의 푯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기에 부활하셨으며 죽으셨기에 하늘에서 베풀어진 모든 영광을 차지함같이 우리들도 우리 앞에 늘 나타나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에게 영광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교훈인 줄 압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교훈은 우리들 앞에 늘 전개되는 어려운 일들을 참고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라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세 번째로 성전 세를 내신 주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서 내려오신 후 주님께서 전도의 근거지로 이용하신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들리신 것 같습니다. 하루는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머무신 것을 알고 베드로의 집에 찾아와서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라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려면 많은 경비가 필요하므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 1년에 반 세겔씩의 성전 세를 내게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를 내지 않아서 찾아온 것 같습니다. 반 세겔이란 그 당시 노동자의 2일 품삯에 해당된 것으로 베드로는 주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내실 것이라고 답변을 하는 것을 주님께서 방안에서 들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에 자기 아들에게 받느냐 아니면 남에게서 받느냐고 물으니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남에게서 받는다고 답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대답을 들으시고 그렇다면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전세가 면제된 자인 것을 밝히십니다.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 그 아들 되시는 주님은 면세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혹시 주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으므로 어떤 자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어떤 자들에게 넘어지게 할 지도 모르니 낚시를 가지고 가서 고기를 낚아 맨 처음 잡힌 고기의 입을 벌려 보면 한 세겔의 동전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가져다가 주님과 베드로의 성전 세를 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십니다.

성전 세를 받으러 온 이 사람들은 꼭 돈만 걷으러 왔다고 보는 것보다는 성전 세를 내지 않겠다고 하면 이는 성전 법을 어기는 것이므로 이 일로 주님께서 성전 법을 어긴 자로 책잡으려는 목적으로도 왔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이용하시어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좋은 소제로 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에게 권리가 있지만 남에게 모범을 보이고 덕을 끼치기 위해 권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남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내신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나 자기가 고기를 먹음으로 남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영원히 사양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고전 8:13 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남의 양심을 위해서, 덕을 끼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권리를 사양하는 고도의 인격을 보여 줌으로 제자들에게 이를 본받게 하시며, 또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메시아이심을 이번 기회에 다시 입증하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방법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전지 전능의 존재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낚시를 하여 첫 번째의 고기의 입을 벌리면 그 입 속에 한 세겔 동전이 있을 것을 아시는 것은 전지하시다는 증거이며, 첫번 고기 입 속에 1 세겔 짜리 동전이 있게 하심은 전능하시다 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 나타난 그 기회를 오히려 제자 교육과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는 소제로 삼으신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교육하시고 이웃에게 덕을 끼치게 되기 바라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무엇이던지 가능하게 만드실 것임을 믿게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을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이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자들이 다 되셔서 내게 있는 산, 또 남에게 있는 산을 옮길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주님의 책망에 힘을 얻어 무엇이나 해낼 수 있는 자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내 힘으로는 산을 옮길 수는 없겠지만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힘으로는 어떤 산이든 옮길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산에서 얻어낸 능력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와서 내 자신과 남을 위해 그 능력을 활용하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는 산들입니까? 우리 속에서 옮겨지지 아니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때로는 작은 돌도 내게는 산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얕은 개울물도 내가 건널 수 없는 강물로 보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얕은 담이 내가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장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믿음이 식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내 힘만 바라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 얻어 낸 능력은 어떤 큰산이든, 어떤 깊은 강물이든, 어떤 높은 장벽이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불가능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불신의 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산만 밀어낸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다 해내실 것입니다. 내게 있는 산이 육적 질병이든 정신적 질병이든, 영적 질병이든 그 산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옮기실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 이웃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산을 옮길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도울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내가 가진 산이든 남이 가진 산이든 다 해결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시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오심같이 우리들도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지 현세에서 영광을 차지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테반이나 사도 바울의 수난을 큰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주리고 헐벗으며 때로는 매맞고 조롱 받는 수난의 길을 축복의 길로 알고 걸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길이요 또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영광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는, 남을 위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라도 포기할 수 있는 고귀한 인격들을 소유하시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신앙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니 이웃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사양하는 그런 고차원적인 인격체들로 바뀌어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이웃을 위해 하지 않는 차원까지 높여 사는 삶을 살으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 약한 이웃, 믿지 않은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며 나 때문에 가난한 자가 더 가난을 느끼게 되거나 나 때문에 약한 자가 더 약함을 느끼게 되거나 나 때문에 못 배운 자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거나 불신자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내 행동을 이웃을 생각하여 사양할 수 있는 정도까지 믿음이 자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날마다 만나는 십가가의 수난을 감수해 나가며 권리를 사양할 줄 아는 삶, 이런 삶이 진정 복 받는 삶임을 깨달으시고 이런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