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큰 자 – 마태복음 18:1-14

자리다툼이 전연 없는 사회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줄 압니다. 갱들 세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총망라하여 자리 전쟁이 연속되어지는 줄 압니다. 이 자리다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예외는 될 수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 딛고 계시는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로서 임금이 되시면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에 대한 관심으로 가슴들이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실 왕국은 그런 것이 전연 아니었음에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상 왕국으로 믿고 있어서 차지할 자리를 놓고 노골적으로 말다툼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볼 때에는 좀 시시해 보이나 그들에게는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였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제자들이 자리 차지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툼질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본문을 주시게 됩니다. 제자들은 세상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자리를 차지하라는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천국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라고 천국에 당연히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자가 되려면 ‘세상 욕심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고 약한 자를 대접하고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 믿는 보상으로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바라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 받기 위해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어린아이와 같이되고 도움이 필요한 나약한 자들을 잘 돌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서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어린아이와 같이 되라(1-4)

[2]어린아이를 영접하라(5-11)

[3]잃은 양의 귀중함(12-14)입니다.

 

[1]맨 먼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1-2 달 전쯤에 일어난 일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될 시기가 임박해 옴에 따라 제자들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될 왕국에서 누가 어떤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12제자 중에서도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늘 특별한 대우를 받은 제자들이었으며 그중 베드로는 더욱 사랑을 받은 제자였음을 아는 제자들에게 시기심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리에 대한 욕심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런 것들이 자리다툼의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읽으신 주님께서 너희들이 무슨 쟁론을 하느냐고 물으시니 제자들이 잠잠하였다고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좀 쑥스러웠던 모양이지요.‘천국에서는 누가 크냐’가 쟁점이었던 사실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답을 주십니다.

마가복음에는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답을 주셨고 본문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답을 주신 것입니다.‘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우리들에게 어떤 자리를 주실 것인지를 질문한 세상의 자리이고 주님의 대답은 영적인 세계인 하늘 나라에서의 자리였습니다. 세상에서의 큰 자란 마땅히 돈과 권세와 명예와 지식이 있는 자가 큰 자일 것이나 하늘 나라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연 다른 것으로 답을 주시고 계십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낮아지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의 위치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천국에서의 큰 자가 되는 요건을 설명해 주시기를 첫째, “돌이키라”하십니다. 돌이키라는 말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근본 정신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권세를 누리는 자가 높다든지 약한 자를 깔보고 어떤 힘을 가진 자를 높은 자로 보는 시각의 기준을 수정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높은 자리라고 대통령은 부러워하고 말단 공무원에 대해서는 존경도 감사를 모르는 우리의 정신을 뜯어고치라는 것입니다. 많이 갖고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늘 부러워하는 성공 평가 기준을 바꾸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돈 있는 자, 세상 명예 있는 자, 세상 지식 있는 자는 존경을 받고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은 천대를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심한 열등의식을 느끼는 그런 폐단을 고치라는 것이 되겠습니다.

기본 정신을 뜯어고치되 고침을 받아야 하는 기준을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세우신 ‘어린 아이’란 남의 피부색이 어떻든, 그 사람이 돈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접할 수 있는 편견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또 어린아이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해를 끼치면서라도 내 욕심을 채우는 잘못된 어른들과 같지 않고 세상 욕심이 없는 세상을 너무 밝히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어린아이란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남보다 잘 낫다고 느끼는 교만이 없는 겸손한 자로 남을 높이며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겸손하면 남이 깔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을 전연 갖지 않고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남을 존경하고 높이는 인격체가 바로 주님께서 지적하신 어린아이의 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 같은 것은 그런 곳에 끼기나 하겠느냐’는 굴욕적인 겸손, 자학하는 겸손은 겸손히 아니라 오만이요 삐뚤어진 겸손으로 주님이 바라신 겸손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결과적으로 큰 자라 말할 수 있으나 이런 자가 되지 못하면 비록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라도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주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행의 씨앗이 뭐라고 생각되십니까? 어린아이와 갖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나는 불행하다’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어요? 아버지가 어떤 직업을 가졌건, 친구 아버지가 누구이던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우리 아빠가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 사 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하고 겸손하고 세상에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의 요인은 자기를 낮추지 못한 이유, 겸손하지 못한 이유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성품을 소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천국의 주인이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되라는 주님의 교훈은 어린아이들이 갖는 좋은 점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은 나이가 적어 어린 자나, 신앙 경력이 짧거나 오래 믿었어도 성장되지 못해 믿음이 초보인 자나 아니면 사회적 모든 여건이 아주 약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행여나 깔보지 말고 주님을 대하듯 잘 대우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누구를 대하듯 하라고요? 주님을 대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대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은 받아야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사람 숫자 세는데도 들지 않았음을 볼 때 지나친 푸대접을 받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 세상에서 푸대접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여건에 있는 자들도 여건이 아주 좋은 사람과 전연 구별 없이 대우를 받게 해야 한다는 충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눈으로는 그 누구도 다 같은 인권과 인격을 가진 생명체요 주님의 생명을 바쳐서 구원하게 될 귀중한 영혼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바쳐서 얻은 자들이므로 그들은 곧 주님을 대신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약한 자들을 영접하면 바로 주님을 영접한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이 약한 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을 잘못 대우하여 행여 믿음에서 떨어지게 한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진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시고 계십니다. 연자 맷돌이란 사람이 돌리는 맷돌이 아니고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로 옛날 로마 시대에 아주 악한 범죄자에게 내려진 형벌로 시체를 찾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렸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의미하는 것은 나약한 자도 주님을 대신하는 자들이므로 행여 나약한 자들을 무시하지 말고 철저히 돌보라는 긍정적인 말씀이고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연약한 자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면 그 책임을 면치 못하고 주님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되리란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차라리 자살해 버리라는 충동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행동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넘어지게 하는 결과가 올 수도 있으므로 각별히 내 행동을 조심하여 덕을 끼치고 행여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그 합법적인 내 행동이 믿음이 적은 어떤 자에게 손해를 끼칠 것으로 생각되면 그 행동을 사양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든 그런 실수를 한 자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고 주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범죄로 인해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네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면 그 손이나 발을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눈이 범죄케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육체가 원하는 대로 육체의 시녀 역할을 하다가 영원한 불에 들어가지 말고 육체의 욕심을 끊어 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라는 권면이며 영혼이 육체보다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강조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또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지은 손이나 발을 잘라 내고 또 눈을 뽑아 버리라는 육체적 절단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손이나 발을 잘라 내고 또 눈을 뽑아 ]내는 아픔과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영혼을 지키기 위해 범죄의 길에서 발을 끊고 손을 떼며, 눈을 딴 곳으로 돌리라는 과감한 결단을 촉구한 말씀인 것입니다. 죄지을 생각이 난다고 머리를 잘라 버리라는 말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보를 고치기 전에는 아무리 무엇을 잘라 내도 또 남은 것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 생각됩니다. 술이 자기를 늘 범죄케 한다면 아예 술이 있는 곳에서 피하라는 것이며 도박이 자기를 범죄케 한다면 아예 도박판에 가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말로 자기를 유혹해도 ‘NO’ 라고 강하게 거절할 수 있는 결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다를 즐기다가 빠져 죽을뻔하고는 바다에 가는 유혹을 막기 위해 바다 쪽으로 나 있는 창을 아예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좀 바보스런 짓같이 생각되나 그 사람으로서는 바다만 보면 약해지기 때문에 아예 바다를 보지 않겠다는 굳은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자꾸 찾아오니 아예 머리를 빡빡 깎아 버리거나 눈썹을 밀어 버리고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공부하는 자들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비슷한 강한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죄를 철저히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감한 결단은 나 자신도 구원하고 내 이웃의 믿음이 약한 자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10절에서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라고 또 강조하십니다. 그들의 천사가 하늘의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말씀은 해석이 어려우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고 계시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3] 세 번째로 잃은 양의 귀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는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있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그린 그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비유의 줄거리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다가 고

생 끝에 찾았다고 한다면 길을 잃지 않은 99마리보다 찾은 한 마리를 더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아무리 미약하게 보이는 소자라 할지라도 그가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은 한 마리를 99마리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은 찾은 한 마리는 중요하고 남아 있는 99마리는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한 말로 길을 잃지 않은 99마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기쁘고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또 기쁨이 더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좋은 사람들도 귀중하게 여기며 또한 세상이 무관심한 노약자나 가난뱅이나, 아주 못생긴 자나, 쓸모가 없다고 천대받는 불구자나 아무런 구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며 그 누구도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뜻을 우리에게 전하신 것으로 그러므로 행여 우리 눈에 무시할 만하게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들을 소홀히하지 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깨달으시고 꼭 지키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은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부모님들이 자녀를 놓고 공부를 좀 잘하는 것 같으면 ‘법관이나 의사’ 가되어 보라고 하고 공부에 자신이 없으면 일찍부터 장사를 하던지 기술을 배우던지 하여 돈이나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라고 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속 사람에 대한 비전은 없고 겉 사람에 대한 목표와 꿈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인격을 가졌던 지간에 법관이나 의사 또는 다른 저명한 명예를 가졌으면 혼인 발이 서게 되며 속 사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정직한 자가 되라든지 성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든지, 또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썩은 밀 알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지도를 하기는커녕 그런 사람이 될까 봐서 부모님들이 막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정직하고 너무 성실하고 남을 위해 수고만 하는 인생은 고달프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근본 생각을 돌이 키라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보는 ‘큰 자’의 개념을 철저히 바꿔야 하겠습니다. 큰 자를 겉 사람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돈이 많고 많이 배운 자로 우리 머리 속과 자녀들의 머리 속에 입력시키지 말고, 속 사람의 크기를 보고 큰 자라고 인정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데도 겸손하고 낮은 자리의 사람을 돌보며, 부자인데도 부자 태를 내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많이 배웠으나 유식하다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자들에게 봉사하는 그런 자를 큰 자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큰 자의 정의를 주님이 내리신 정의로 돌이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자기를 낮추어야겠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되기 위해 주님이 바라신 수준까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천진하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며,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남을 존경하는 어린아이들의 성품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순수한 성품으로 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이 착한 어린아이들이라면 약한 자들을 볼 때 돕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남을 도운 사실을 신문에 낼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감사패를 받아 두어야 할 필요도 없고, 도왔던 그 사람으로부터 미래에 그 도움을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의 성품은 진심으로 도운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도운 자들을 두고 ‘너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돌보았는데도 주님께서는 자기를 돌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통령을 대접한 자가 큰 자가 아니라 심히 병들고 가난한 자를, 못 입고 못 먹은 자를 돌본 자를 큰 자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는 자리에까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며 또한 천국에서 큰 자라 하십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수준까지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지극히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어이 찾으시는 하나님, 찾으시면 그렇게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란, 우리 개인 하나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도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표현입니다.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두고 주님에게 하듯 나를 대우하라 하시니 그렇게 우리를 높이실 세상 사장이 있겠습니까? 사장 나를 대접하듯 그 사원을 잘 대접하라는 추천서를 받았다고 할 때 얼마나 살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보장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높이시는데 마음이 뭉클하시지 않습니까? 이래도 주님을 사랑하는데 인색해서야 되겠습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등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줄 압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돌이키시고 자신을 낮추시며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