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자가 받는 보상 – 마태복음 19:13-30

전도자로서 우리 교인들의 신앙이 날로 성장하여 하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세상일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인들의 가정마다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또한 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 성도들의 가정마다 월수입이 2배, 3배, 4배로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제가 얼마나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자꾸 늘어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퍼 주어 주시니 정말 감사하다고 저는 기도할 것이고 아무리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이만 중지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그것 때문에 믿음을 등한시하거나 믿음을 버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는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선 그 이상부터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부자를 부러운 눈으로만 바라보아 온 우리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에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재산 관리와 영혼 관리를 주님의 뜻에 따라 성공적으로 해 냄으로 모두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4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부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어린아이의 교훈(13-15)

[2]부자 청년의 교훈(16-22)

[3]약대와 바늘귀의 교훈(23-24)

[4]버리고 따른 자가 받는 상급(25-30)입니다.

 

[1]맨 먼저 어린아이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야곱이 자기 12 아들에게 복을 빌어 준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것들이 유래가 되어 유대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랍비와 같은 회당 지도자들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는 관습이 있었나 봅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똑같은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위대한 선지자로 소문이 나 있어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게 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이것을 본 주님의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을 꾸지람했다는 것입니다. 왜 꾸지람을 했겠습니까? 유대 풍습으로는 여자와 아이는 남자 어른들 보다 대우를 받지 못했던 형편이라 안수 받기 위해 모여든 남자 어른들이 매우 많아 다 처리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무슨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는 말이겠지요. 아니 주님께서는 아주 귀하시고 훌륭한 분이신 데 아이들에게까지 신경을 쓰실 분이 못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이들은 누가 담당하지요? 유년부 교사가 맡는 것이지 당회장 목사님께서 유년부나 유치부에 까지 내려가실 수 없다는 현실적인 사고 방식과 비등한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보아집니다.

아마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도 자기들의 생각과 똑같으시리라고 믿고 주님의 생각을 잘 아는 것 같이 부모들을 꾸지람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에게 안수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대접받을 수 있는 우선 순위는 무엇일까요? 돈 많은 사람, 명예 있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대우받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며 더군다나 어린아이들이야 맨 꼴찌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것이 인간의 기준이요 주님의 기준은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느냐? 또는 얼마나 가졌느냐 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대우하신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천국의 주인이라 함같이 천국이란 자기가 가진 것, 아니 자기가 무엇을 한 것에 의한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는 하나도 없고 자기의 자랑은 하나도 없고 오직 빈 마음으로 주님만을 믿고 나아 온 자들의 것임을 교훈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의 차이를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부자 청년의 교훈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라고만 나와 있고 22절에 보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다”고 되어 있으며 눅 18;18에 보면 ‘관원’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즉 돈 많고, 젊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자기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 주지 못했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지켜 온 율법 가지고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놓고 많이 생각하고 유명하다는 선생님들에게 찾아가서 어떤 해답을 얻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인물로 보아집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들었던 지라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청년은 주님이 영생을 주시는 메시아로가 아니라 무엇을 좀 아는 선생님으로 본 것이며, 또 구원을 믿음에 의한 은혜로 받게 되는 것을 모르고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주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다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이 대답하기를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은 다 지켜 온 것이라고 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청년은 자기를 스스로 완벽하고 의로운 자로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처방을 주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젊고 돈 있고, 명예가 있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죽음 후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보고 우리는 칭찬을 보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군다나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고 대답할 정도면 그 당시 성실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 좋았는데 무엇이 그 청년에게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걸림돌이 되었는가요? 그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영생을 얻고는 싶지만 재산을 다 팔아 버리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구원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그 청년을 죽음의 길로 힘껏 끌어당긴 것입니다. 많은 재물은 이 사람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된 셈입니다.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십계명을 크게 둘로 나누면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고 5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완전히 잘 지켰고 지금도 잘 지키고 있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되므로 자기 재산을 당연히 필요한 이웃을 위해 팔아 나누어주었어야 할 터이나 나누어주기보다는 재산을 거두어 들였고 때로는 빼앗았을 것이니 자기가 어려서부터 지켰다는 계명은 그 계명이 내포하고 있는 본 뜻은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지킨 것이요 진심으로 생활에서 지킨 것이 못되지만 스스로는 자기가 의로운 자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혹시 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언급하고 싶은 것은 부자가 재산을 나누어주면 구원받는 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자의 요건은 “자기를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불변의 원칙으로 명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는 많은 재물이 자기였는데 자기를 부정하지 못한 이유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음에도 세상 보화가 하늘의 보화 보다 그 사람에게는 귀하게 보였고 영생보다는 큰 재물이 훨씬 크게 보였기 때문에 영생의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잘했지만 그 길을 포기한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복 받은 자의 기준은 많이 가진 자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복 받은 자는 가진 것이 없는 자, 가진 것을 나누어 준 자, 무엇에 노예가 되어 있지 않은 자, 어린아이와 같이 자랑할 것도 없고 해 놓은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자가 바로 복 받은 자라 한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3]셋째로 약대와 바늘귀의 교훈입니다.

기껏 영생을 얻고자 상담하러 와서 영생의 처방을 내려 주셨는데도 처방대로 치유를 받지 아니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세상 길로 가 버린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도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으리라 봅니다. 이 때를 당하여 주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들에게 경고를 주시게 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움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 것입니다. 약대는 그 당시에 제일 큰 짐승이었고 바늘귀란 아마 가장 작은 구멍이었으리라 봅니다. 학자들은 바늘귀를 그 당시 성문 중 밤에만 열어 두는 아주 작은 문을 바늘귀 문이라고 했는데 바늘귀란 바로 이 문을 말하는 것이라 하거나 또 약대라는 말과 비슷한 단어 중에 밧줄이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약대가 바늘귀 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밧줄이 바늘귀에 끼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자기를 부풀게 하기 마련입니다. 존경받고, 대접받고, 부러움을 사며, 안락함을 누리게 하여 자기 만족에 빠지게 만들고, 돈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자신을 갖게 하며, 누구의 특별한 원조 없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때로는 없는 자를 깔보게까지 만드는 것이 바로 재물인 것입니다.

또한 가난은 수치요 저주이며 큰 재물은 의와 순종의 상급으로 오해를 하여 부유를 하나님이 내리신 큰복으로 오해하고 자만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신감까지 심어 주게 되므로 재물은 점점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아니 점점 세상으로 끌어당기는 위험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하고 소망을 하늘 나라에 두기를 바라시지만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기 위해 오직 재물에만 관심이 있게 되어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를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도 유대 랍비들로 부터 배워온 지식으로는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이런 소리는 처음 들어본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놀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할 수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사람의 행위로 보아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세상 어떤 인간이 자기 행실로, 자기 의로, 돈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잇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네 번째로 버리고 따른 자가 받는 상급입니다.

성급한 베드로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으리라 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과연 자기들은 어떤 보장이 있을 것인지 확인코자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매우 분명하고 고무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뿐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게 보상해 주시겠다는 보장인 것입니다. 꼭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산술과 인간의 산술에는 늘 차이가 있어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도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도 된다고 하심으로 보상이 인간의 기준과 상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보상이 되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더 좋은 집이 있고 더 좋은 차가 있으며 더 큰 보석 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허기지게 만드는 것이 재물 아니겠습니까? 더 좋은 것을 가져 봐야 별것이 없고 끝이 없는 것임에도 더 많이 저축하고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심지어 신앙까지라도 버리고 건강까지라도 해치며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 재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재물이란 애쓰게 모았지만 한 순간에 다 날아갈 수 있는 허무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것을 소유하는 재미로 살지 말고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현재를 감사할 수 있을 것이므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에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가진 것에 감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높은데 두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높은데 두기 시작하면 인생을 허비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보석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유지하려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므로 결국 충실한 믿음 생활까지도 희생시키게 만들 것입니다. 집도 없고 좋은 차를 굴리지 못해 부끄러우신 분 계십니까? 혼자 생활을 꾸려 가시느라 너무 힘이 들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일생에 빛을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것인가? 하고 스스로 비참해 하신 분이 계십니까?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화려한 집에서 열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에서 영원히 사는 것임을 한시도 잊으셔서는 아니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작고 별로 좋지 않은 아파트만 보며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보다 더 화려한 맨션을 바라보는 눈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 나가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 앞에 가야 할 분들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오히려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도 정리하고 사업도 정리하여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 모래 주님이 오시면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때야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에스크로 끝난 것 기다리려 하면 천국 문은 이미 닫혔을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 찾아 고아원에 갔다주고 오려고 하면 이미 늦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주를 위해 정리하고 버리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로 갚아 주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업, 직장, 명예, 취미, 가족 등 신앙 생활하는데 지장이 되는 모든 것을 정리하시기를 권하고 계십니다. 주님 오실 때에 주님 따라가기 위해 주님 오시기 전에 모두 정리하라 하신 것입니다.

재물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축적하여 부유가 아니라 선한 사업에 부유하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라 하시며 남에게 동정하는 자가 되라 하신 것입니다. 가난하여 비참하게 생각되는 자가 자기보다 가난한 자를 만나 물질적으로 돕고 동정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선한 사업에 부유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특히 스스로 가난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이런 일에 적극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이고 행복한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나누어주는 자가 부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가난한 자입니까? 나누지 못하고 계속 긁어모으는 자가 가난한 자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전도자는 우리 성도들이 물질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보다는 여러분이 더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줌으로 더 풍성해지는 기적 같은 사실을 새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Account에 모아진 돈이 없어서 가난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고 Account에 돈이 남아 있어서 돈 있는 가난한 자가 되고 있음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살면서 물질에 끌려 다니느라 천국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물질을 잘 다스려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누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다 되시어 하늘 나라의 보화로 보상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