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선언하신 주님(2) – 마태복음 23:25-39

주님께서는 십자가가를 지실 날을 만 2일 남기신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송두리째 폭로하시며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8개의 화 중에서 지난 주에 5가지의 화를 소개받았고 오늘은 나머지 3개의 화를 소개받게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책망이요 호소임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화를 선언하시는 충격 요법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돌이켜 보겠다는 미움 아닌 미움을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끝까지 불순종하고 거역한 유대 지도자들을 그토록 사랑하시어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도록 마지막까지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분이 바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며 우리가 진리의 길이나 의의 길에서 벗어나게 될 때에 그렇게 애타게 우리의 회복을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않겠다는 굳은 결단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여섯 번째의 화(25-26)

[2]일곱 번째의 화(27-28)

[3]여덟 번째의 화(29-36)

[4]주님의 탄식(37-39) 입니다.

 

[1]맨 먼저 여섯 번째의 화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여섯 번째의 화는 잔과 대접을 예로 들어 그들의 외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잔과 대접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이므로 속을 깨끗하게 씻어야 함에도 겉만 깨끗하게 씻는다는 비유를 주시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겉모양만 정결하고 경건하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음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남의 눈에 좋게 보이도록 경건한 모습을 유지하는데 치중하였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마음 속 바탕에 미움이 있던 탐욕이 있던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전연 의식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눈만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에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채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물질적 측면이요 방탕이란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 받기를 거절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소경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잔과 대접에 들어 있는 탐욕과 방탕을 보지 못하는 눈이므로 소경이요 또한 무엇이 경건인지 무엇이 청결인지를 모르는 자들이므로 소경이라 하신 것입니다. 겉을 경건하게 하는 것으로는 속이 전연 깨끗해 질 수 없고 먼저 속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자연히 겉 모양도 깨끗해지는 것임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마음속에 있는 모든 종류의 더러운 죄를 회개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기 얼굴에 묻어 있는 것을 빨리 닦고 자기 옷에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을 당장 닦아 내듯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시기와 갖 가지 욕심도 빨리 빗자루로 쓸어버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줄 아는 자라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자라 할 수 있으며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한 자는 모두 소경이 된다는 주님의 지적이십니다.

 

[2]다음은 일곱 번째의 화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곱 번째도 여섯 번째와 거의 흡사한 비유를 주시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을 책망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회칠한 무덤이란 들판이나 길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으로 이스라엘의 비가 오는 우기가 지난 유월절 절기 직전에 횟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 무덤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16에 보면 시체를 만지거나 무덤을 만지게 되면 7일 동안은 부정한 자들로 간주되어 정결한 기간이 지나야 종교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므로 혹시라도 유월절 절기에 참석하려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무덤에 접촉될까 봐서 쉽게 구별하도록 하얗게 회칠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들추신 것은 회칠한 무덤이 깨끗하고 말끔하게 보이지만 실은 그 속을 본다면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유대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경건의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 성구 함을 이마에 걸고 다니고 옷술을 크게 하여도 이것은 인위적 경건이요 가식의 포장일 뿐 하나님 눈으로 보실 때에는 진실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차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무나도 위장을 잘하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외모로 나타나는 경건을 보고 칭찬하고 부러워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눅 11:44에 보면 본문 말씀과 평행 구절을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무덤이 한국에서 우리가 보아 왔던 그런 무덤이라면 그것이 무덤인 줄 쉽게 알 수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무덤 같이 평평하면 그 것이 무덤인지 밟는 사람이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땅을 파 보면 틀림없이 죽은 자의 뼈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식별을 못하겠지만 주님께서는 훤히 들여다보시고 아신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에서 세금 비리가 터졌을 때 어떤 세무 공무원이 모범 세무 공무원으로 인정되어 전국 감사반에 발탁돼 다른 공무원들의 비리를 감사를 한바 있었는데 바로 그 공무원도 세금을 착복한 공무원이었음이 밝혀져 수갑을 찼다고 합니다. 또 어떤 자는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어떻게 청렴하게 살았던지 만인의 칭송을 받았는데 뒷조사를 해 보니 자기 일가 친척들 이름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해 둔 자로 들어 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에 드러나지 않은 비리가 얼마든지 있음을 누구나 시인할 것입니다. 수갑을 찬 사람들 중에 국가의 상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고 하니 사람들이야 어떻게 사람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는 속과 겉이 다른 모든 범죄가 다 들어 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세상으로부터의 존경과 칭찬과 포상은 무의미하다는 진리인 것입니다. 외적 성공, 외적 품위, 외적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우리는 정도 이상으로 내적 자기 치장에 힘쓰시는 성도들이 되셔야 한다는 충고인 것입니다.

[3]마지막 여덟 번째의 화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경고는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죄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인물들의 무덤과 비석을 꾸미는 것이 전통적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이런 이유로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의 흔적이 발견되게 되는데 근본 동기가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발자취를 따르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 나갈 목적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그런 분들의 자손임을 과시하고 자부심을 가져 스스로 자기들의 위상을 높이려는 위선적 동기에서 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덤을 꾸미고 비석을 세우는 유대 지도자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이 자기들의 옛 조상들이 살 때에 살았더라면 자기들은 조상들과 같이 위대한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기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선조들보다 우수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적은 이들이 옛날 선지자인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 스가랴 등은 존경하고 경의를 표하면서도 현재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거절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음모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이 조상들이 사시던 그때 살았더라면 조상들과 같이 선지자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은 주님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결국 자기들은 살인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한 셈이므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들을 죽인 옛 조상들이나 현재의 자손들이나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못 다한 살인과 핍박의 양을 너희들이 채워 보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얼마나 피를 흘리게 할 것인지 할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곧 심판의 때가 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공격을 하십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타락하고 저주받은 자의 상징인 뱀 같은 자들이라 하셨고 독사의 새끼들이라 하심으로 사단의 기질과 악마의 본성인 독사와 같은 자들의 자손이라고 크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조상 때부터 지은 죄를 조금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조상들과 똑 같이 선지자들의 피흘리기를 중단하지 않고 있으므로 지옥에 가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어조가 강하면 강할 수록 주님의 그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강하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저주를 퍼부음으로 혹시라도 회개할 자가 있겠는지 최후의 구출 작전으로 보아집니다.

주님께서 예견하신 바로는 앞으로도 주님께서 성령이 충만한 지혜 있는 주님의 종들을 많이 세상에 보내시게 되겠는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채찍질하며 또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라는 예언을 주시면서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의인의 피를 흘린 모든 죗값이 그들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벨은 인류 최초의 피살자요 사가랴는 누구인지 불분명하나 대하 24:20-21에 나오는 스가랴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경은 역대하가 마지막이라고 하니 성경의 첫 번째 책에 나오는 아벨과 성경의 마지막 책에 나오는 스가랴로 볼 때에 모든 피 흘림에 대한 계산서를 심판 날에 받게 되리란 경고인 것입니다. 크레딧 카드를 쓸 때에는 좋은데 꼭 계산서가 날라 오듯 우리의 모든 죗값은 우리가 심판 받을 때에 각자의 계산서에 다 청구될 것이므로 죗값을 모두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지금이라도 회개하라는 경고로 보아집니다.

 

[4]네 번째로 주님의 탄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37절에 보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탄식을 하심을 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요 산헤드린이 있는 곳이므로 예루살렘이란 곧 이스라엘 나라요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두 번 반복하시며 부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부르시는 음성만 들어도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대하셨는지 짐작이 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택함을 받은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였으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고 어떤 자는 돌로 쳤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었지만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이스라엘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의 그런 사랑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을 촉구했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심지어 그리스도를 만진바 되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오직 죄인들의 구원만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살으셨지만 이를 모른 채 하였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죽이려는 음모를 진행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삼중적 심판을 예고하시게 됩니다. 그들의 집안은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이며, 또한 황폐해질 것이며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리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던지 하나님께서 아무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저주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간섭하지 않은 사람들의 집안을 황폐케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제 곧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직접 뵈올 수 없기도 하겠지만 예수님을 끝까지 거절한 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실지로 황폐해 졌지만 불신자들은 심판 때에 영원히 황폐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어디든지 황무지와 같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시로는 번성하는 것 같으나 황폐케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9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됩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계 21:12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책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겉 사람보다도 우리의 속 사람을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겉 사람을 단장하기 전에 속 사람을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눈에 아름답게 보이려고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보기 전에 하나님의 눈에 아름답게 보여 드리기 위해 우리 속 마음속의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아름답게 단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씻고 그 다음에 마음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외출하기 전에 무엇을 하십니까? 세수하고 거울보고 화장하고 옷 예쁜 것 골라 입지 않습니까? 겉 사람을 위해 이렇게 신경을 쓰듯 속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매일 하는 세수, 매일 하는 샤워, 그 다음 날 또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또 얼굴에나 옷에 무엇이 조금만 묻었어도 즉시 닦아 내고 지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속마음에 묻은 더러운 것도 닦아 내고 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 하루에 몇 번 거울을 보십니까? 이와 같이 내 마음을 여러 번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성경 거울을 통해 자기 속마음을 비춰 보고 더러운 것을 회개의 기도로 씻어 내며 찬송으로 마사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염치와 정절과 선행과 겸손의 화장품으로 단장을 하고 양쪽에 날이 선 말씀의 칼로 썩은 곳은 도려내고 높은 곳은 잘라 내는 성형 수술을 하여 속 사람을 미남 미녀로 만들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그렇게 잘 단장하였는데도 낮에 아니 밤에 내 마음에 흙탕물이 뛰어 왔거나 때가 묻었다면 즉시 닦아 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이런 식으로 속 사람을 우선적으로 단장을 하면 겉 사람은 자연히 품위가 있어 보이고 경건하게 보이며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으로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자기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비교할 때 속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까? 겉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까? 아니 자기 속 사람이 아름답도록 어떤 화장품을 쓰고 계십니까? 속 사람의 주름살을 어떻게 펴고 계십니까? 속에 미움이 있고 불만이 있고 욕심이 있고 질투가 있고 사치와 허영이 있지만 사람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내버려두시지는 않습니까? 밥은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니 먹지만 속 사람의 양식은 먹지 아니하고 마시지 않아도 돈벌이하는 데에 지장이 없으니 훗날 훗날 시간이 좀 나면 한꺼번에 잡수시려고 아예 제쳐 두시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속 사람을 단장하지 않고 겉 사람에만 신경 쓰는 자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두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부르십니다. 또 그런 자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황폐케 되며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그렇게도 여러 번 경고했는데도 네가 듣지 아니하였다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애통해 하십니다. 속 사람 단장에는 관심이 없고 겉 사람 단장에만 치중하는 성도들을 향해 애절하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애절한 음성을 듣는 모든 성도들이 매일 말씀을 통해 속 사람을 단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큐티를 통해 주님의 지시를 듣고 그 지시대로 하루 하루를 생활하셔야 합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 속 사람을 단장하시어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고 천국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