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선언하신 주님(1) – 마태복음 23:13-24

오늘은 본문을 통해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준엄한 고발을 소개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고발은 주님이 하신 고발이요 영생과 죽음에 연관된 고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고발은 악의에 차고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나 살기 몸부림’이지만 오늘 소개받는 고발은 사랑이 있는 고발이요 눈물이 있는 고발인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는데도 그 사랑을 받아 주지 못한 자들에게 퍼붓는 짝사랑의 비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신앙 즉 하나님을 그렇게도 열심히 믿는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땅에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못하는 그런 위선적 신앙을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23장에서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라는 저주의 용어를 사용하시어 강한 어조로 그들의 죄악상을 파 해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면키 어려울 터이니 유황불에 들어가던지 회개하던지 하라는 주님의 마지막 남은 사랑을 분노의 목소리로 전달하신 것입니다. 23장 전체에서 7개의 화를 선포하시게 되는데 본문에 없는 14절의 화까지 합하면 8개의 화가 됩니다. 그 중 5개의 화를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소개받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이 경고들은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또한 각 시대의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위선적 신앙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인간인지라 위선적인 신앙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신앙을 걸러 보고 잘못된 것들은 과감하게 고쳐 나가므로 주님께서 선포하신 ‘화’와 아무 관계없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5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천국 문을 닫고 못 들어가게 하는 죄(13)

[2]과부들의 재산을 삼킨 죄(14)

[3]교인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죄(15)

[4]맹세와 서약으로 잘못 인도하는 죄(16-22)

[5]십일조는 드리고 의와 인과 신은 버린 죄(23-24) 입니다.

 

[1]맨 먼저 천국 문을 닫고 못 들어가게 하는 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 절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 중 하나의 죄가 바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를 하나씩 분석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 있을찐저’ 의 ‘화’란 희랍어에서는 ‘우아이’인데 이것의 뜻은 진노와 슬픔, 분노와 동정, 비통한 고발, 슬픔에 찬 진노, 동정 섞인 분노로 이것은 경건한 위협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저주가 있을 것을 선언한 것이나 감정적이지 않는,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과 회개를 냉철하게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화를 받게 될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란 자기를 가장한 사람,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그 무엇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 행동한다는 의미이며 자기의 본 모습을 숨기려고 가면을 쓴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척했으나 정말 찾는 것은 직업, 존경, 인정, 명예, 지위, 권세, 안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척했으나 세상에 속한 일들에 관심을 가졌고, 겸손하고 도우려는 자세 같으나 교만하고 탐욕과 이기심이 많았으며 하나님의 사역자 같으나 자기들이 만들어 낸 종교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들의 말을 가감한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이실까요?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그들의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거절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아이디어를 더 좋아했고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추진하고 있는 종교적 사업이나 행사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자기 부정 대신 세상을 택하여 지위 명예 존경 권세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실 자이심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텐데 사람들에게 예수를 불신케 하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되므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바로 인도하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찾아온 자들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의 독점, 성경 해석의 독점 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들을 만들어 지키도록 강요하므로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문을 막는 자가 외부 사람이 아니라 교회 내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두 번째로는 과부들의 재산을 삼킨 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4절은 숫자만 나오고 내용은 없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14절은 권위 있는 사본에는 없으나 흠정역 성경에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에 관심을 갖고 돌보아야 함이 주님의 뜻인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고아와 과부들에게 관심을 갖되 그들의 관심은 과부들이 가진 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자 종교를 가장하여 과부들의 재산을 훔친다는 것입니다. 돈을 빼앗고자 과부들의 호의를 살 만한 설교를 하거나 긴 기도를 하여 자기들의 경건을 가장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재산을 내 놓도록 호소하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다 불타 버릴 재산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라고 호소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헐벗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굶어 죽어 가는 자들의 모습을 홍보하여 돈을 끌어 드리니 이에 호응하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TV 설교나 선교 기관 차려 놓고 재산을 헌납 받고 하나님의 사업 위해 쓰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기들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기관 확장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무거우리라는 주님의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3]세 번째에는 교인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들추어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그들이 ‘교인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전도에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요사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교인들 보다 더 열심인 모양입니다. 여기에서의 교인이란 이방인 중에서 개종한 사람을 말하며 이방인 개종자들은 대단히 유대교에 매료되어 더 적극성을 띠는 열심파가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방에서는 많은 신을 섬김으로 신빙성이 없고 모순을 들어내기 마련인데 유대교에서는 단일 신을 섬기고 분명한 계명들이 있어 이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어진다는 가르침이나 또 이방 나라 신을 섬기는 자들은 온갖 불의, 부도덕, 성적 타락이 뒤범벅이 되는데 유대교의 순결과 정의 사상은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 또한 여성을 보호하는 제도가 이방인들에게 매우 호감을 갖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고자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적으로 이방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이방 종교를 섬겨 왔던 습관에다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유전을 더하므로 이방 개종자들은 천국 백성이 되는 길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새로 들어 온 교인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맺어 주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되게 해야 함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과 습관을 주입시켜 줌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게 되고 만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지 않고 자기들이 만든 많은 법이나 지키고 유전이나 지켜서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는 말은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하여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받게 될 저주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아집니다. 산과 바다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열심을 내어 전도를 해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지 아니하고 교파나 어느 개인의 사상에 따라 양육한다면 배나 지옥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4]네 번째는 맹세와 서약으로 잘못 인도한 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맹세와 서약으로 잘못 인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소경이요 우맹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우맹이란 어리석은 자란 말이 되겠습니다.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새로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가르치니 그들이 소경 된 인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인들을 가르치기를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나 성전의 금으로 맹세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또 재단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키지 않아도 되나 제단의 예물로 맹세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속한 것이요 제단의 예물이란 제단에 속한 것이므로 성전으로 맹세를 했다면 성전 내의 금도 다 포함되는 것이요 재단으로 맹세했다면 재단 위의 예물도 포함되는 것인데 어떻게 큰 것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고 작은 것으로 맹세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들을 어리석은 인도자요 소경 된 인도자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고 덜 중요한 것으로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니 말이 되는 말입니까? 주님의 결론은 성전으로 한 것이나 성전의 금으로 한 것이나, 제단으로 한 것이나 제단의 예물로 한 것이나 이런 것들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으로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약속과 맹세는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과 맹세는 하나님 앞에 구속력이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금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가르치고 제단보다 제단 위에 있는 예물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입니까? 이것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맹세도 하고 또 마음대로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법을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챙기는 무리들이 바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므로 주님께서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 어린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맹세에 대한 주님의 교훈은 무엇이었던가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입니다. 그 말은 맹세를 했으면 꼭 지키라는 말입니다.

 

[5]다섯 번째로 십일조는 드리고 의와 인과 신은 버린 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에 보니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박하, 회향, 근채는 이스라엘의 아주 사소한 채소 농작물이며 이것들은 양념에나 또한 약제 또는 향료로 사용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율법 중 하나인 십일조를 잘 지키기 위해 심지어 이렇게 사소한 농작물에까지 십일조 규정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지킨다면서도 율법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지키지 않고 버렸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의란 한마디로 정의요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요 인이란 자비이며 신이란 믿음, 신뢰 약속들이 되겠습니다. 정의나 자비나 신의란 사소한 채소의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데 중한 것은 버리고 덜 중요한 것은 지키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이십니다.

또 24절에 보면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지적을 하십니다. 하루살이와 약대란 제일 작은 것과 제일 큰 것을 대표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하루살이란 팔레스틴 기후에서 흔한 곤충으로 담근 포도주에 몸을 던지곤 했다고 합니다. 이 하루살이는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할 때에 채로 걸러 냈다고 합니다. 그대로 먹으면 부정탄다는 것이지요. 약대도 부정한 짐승인데 작은 것은 걸러 내는 척하면서도 부정한 짐승임에도 큰 것은 슬쩍 삼킨다는 지적으로 이 말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무한정한 탐심을 표출시킨 것입니다. 적은 부정은 사양하고 큰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을 파 해치신 것입니다.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도 하고 버리기도 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들어내신 것입니다. 큰 것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요 작은 것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므로 모두 소중히 받아 드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며 자기의 편의를 위해 선택하고 버리거나 오히려 중한 것은 버리고 쉬운 것은 취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요 소경들이라고 평하시며 그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에서는 ‘화’를 선언했고, 우맹이요, 소경이라고 책망을 했으며 소경 된 인도자라고 책망한 것을 보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책망 받을 일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책망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잘못된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잘못 영향을 주게 되므로 본인들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또한 다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 문을 닫아 버린 결과가 되게 한 것입니다. 아니 그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해 버린 결과를 낳는다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잘못 가질 때에 나 때문에 이웃이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것입니다. 나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나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물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것이 주님의 견해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모두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 바른 믿음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이란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를 택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교훈대로 일상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교회에서 사람이 말한 교훈을 실천해 가지고는 주님이 주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증하실 수 있는 주님의 교회에서 주님이 지시한 신령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나 하나 실천한다면 나도 구원을 얻고 또 나에게 지도 받는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경적인지 성경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부는 성경적이요 일부는 비 성경적인 것이 발견되면 비 성경적인 부분을 성경의 본을 따라 시정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이 천국에 못 들어가도록 문을 막고 있는지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나 않는지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유익되는 것만 골라서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기 어려운 것들은 버리고 내가 지키기 쉬운 것들만 지킨다면 내가 어리석은 자요 소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온전한 신앙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했으면 역시 성경을 바로 보고 바른 믿음을 갖고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은 철저히 지키고 더 중요한 것은 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이 없는 예배와 열심 있는 봉사와 희생은 무의미하므로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고 자비와 사랑이 없는 예물과 제사는 무의미하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탐욕을 버리고 자기를 죽이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된 교훈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살아 있으면 한 알 그대로라는 교훈을 주신 분이십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남의 재물이거나 남의 인권이거나 남의 시간이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다툼의 근원이 바로 이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주고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 주변에 불쾌한 일도 다툴 일도 없고 입마다 칭찬만이 이어질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오히려 이웃을 위해 사시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말씀에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어 나도 천국 백성이 되고 또한 이웃도 천국 백성이 되도록 바로 인도하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