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상 설교를 시발로 가르침을 주시되 특히 많은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는데 오늘 소개되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마지막으로 주시는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이틀만 지나면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짧은 33년간의 육적 생애가 막을 내리는 절박한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마지막 비유는 비유 중 비유라고 그 가치를 높여도 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세상에 복 있는 자들이 많이 있겠지만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마지막 비유를 소개받는 우리들이 정말 복이 있는 자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 소개받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어쩌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이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겨날 자가 누구인지를 대략 소개받았는데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합격될 수 있는 행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소개해 주고 있어서 주님께서는 누구더러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시고 누구더러 악하고 개으른 종이라고 심판하실 지를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 수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이 비유를 듣는 각자가 하나님께 합격되도록 자기의 삶을 돌이키는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비유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모두가 본문이 주고자 하는 교훈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여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함같이 의인과 악인을 가르실 때에 의인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이 주고자 하는 뜻을 바로 이해하고 본문이 주고자 하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인자가 심판하러 오심(31-33)
[2]양들에 대한 심판(34-40)
[3]염소들에 대한 심판(41-46) 입니다.
[1]맨 먼저 인자가 심판하러 오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1절에 보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틀 후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게 되는 참혹한 시점에 이르렀지만 참혹함에만 골몰하지 아니하시고 오랜 후에 재림하시게 될 영광스런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들에게 재림을 소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현재의 고난만 보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음을 상징하는 칭호인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에 ‘자기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씀은 처음에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마구간에 오시고 많은 육적 고난을 당하시어 흉악한 죄인들이 지는 십자가까지 지셔야 하는 ‘굴욕적’인 오심과 비교하여 재림 시에는 판이한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에는 누구와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까?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고 했으니 두 번째에 오시는 자기의 목적 즉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해 의인과 악인을 불러모으고 갈라놓기 위해서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또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고 하신 말씀은 다시 오실 때에는 왕과 같은 위엄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재판장의 권위,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를 갈라놓는 절대적 권위를 갖고 오실 자이심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32절에 보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라 했습니다. 목자로서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인류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듯 모든 민족을 천사들의 협조를 얻어 개인, 개인 구분하여 선한 이는 오른 편에 악한 이는 왼편에 갈라놓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인과 악인이,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가 주님 재림 시에는 완전히 갈라지게 될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갈라놓는 다고 했는데 독생자를 믿는 자, 착하고 충성된 종들, 의인들, 참고 선을 행한 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자들은 양으로 비유하여 오른 쪽 즉 명예와 영광의 자리, 영접과 은총의 자리에 들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 아니 고백했어도 입으로만 고백한 자들, 무익한 종, 악하고 개으른 종, 진리 좇지 않는 자들은 왼쪽 즉 굴욕의 자리,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예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른 편과 왼편, 양과 염소 두 가지를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시면서 두 길 중 양이 되어 오른편에 설 수 있게 하도록 지금 피끓는 애정을 가지고 교훈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언제이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나의 죄를 내 놓고 회개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재림한 이후에는 은혜의 보좌는 엄한 심판의 보좌로 바뀌게 될 것이므로 지금 은혜를 받을 만한 이 때에 주님을 사랑하고 바로 섬기라는 사랑의 권고를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양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어진 비유는 재림하셨을 때에 있어질 일을 미리 비디오를 보듯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34절부터 40절까지에는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의인들과의 대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복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또 이들에게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이 복은 하나님께서 창세때부터 예비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비된 ‘나라’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복 받은 자들이라 하시고 천국을 상속하라 하시면서, 그들을 천국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주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들 모두는 주님이 배고파하실 때에 잡수실 것을 드렸고 주님께서 목말라 하실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주님께서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드렸고 주님께서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주님께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주님께서 옥에 갇혔을 때에는 감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오른 쪽에 있던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실 때에 우리가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렸고 벗으신 것을 보고 입혀 드렸으며 주님께서 나그네 되셨을 때에 영접하였고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을 때에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서 뵈었습니까? 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의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주님을 직접 도와 드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아무도, 주님께 직접 옷을 사 드리고 잡수실 것을 직접 드리며, 병드신 주님을 간호해 드릴 영광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의 질문을 받으신 심판장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그 참 뜻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천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신 것에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란 주님께서 받으실 상속을 우리도 받는다는 말이며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도 함께 받을 수 있는 자란 말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도 중 지극히 낮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리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성도와 한 몸을 이루는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높고 깊은 하나 됨의 진리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천한 우리를 주님의 형제의 자리에 있게 해 주시고 누가 우리들에게 잘해 준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 직접 잘해 드리는 것이나 똑같은 크레딧을 주시겠다니 마음이 뭉클하지 않으십니까? 즉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똑같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이 직접 주님께 옷을 드리거나 잡수실 것을 드리지는 아니했지만 가난한 성도에게 양식을 떠 주었고 병든 성도를 돌보아 주었다면 주님을 직접 도와 드린 거나 똑같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대통령 주치의, 대통령 이발사, 대통령 주방장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명예로운 직업이 되겠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직접 치료한 의사가 있다고 한다면, 또 예수님의 옷을 직접 만들어 드린 분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명예스럽고 인기가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직접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주님을 직접 치료해 드리고, 주님께 직접 입혀 드리는 한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성도의 이름을 가진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힘없고 가난한 그 누구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 해 드리는 것과 똑같은 인정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자의 대우만 받으시는 주님이 아니시고 돈 없고 심히 약한 자도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른쪽에 선 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배고픈 자를 보고는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필요한 자에게는 입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는 자에게 마실 것을 조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를 위로해 주었는데 그들의 선행은 바로 주님께 직접 해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공적이 인정이 되어 의인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3]마지막으로 염소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오른 쪽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 했으니 아주 비교가 되는 말이지요? 또 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아와’라 했는데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라 하시니 분명히 잘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나아와’란 말은 밝은 곳으로, 영광의 자리로, 상주는 자리로, 영생의 자리로, 주님 곁으로 오라는 말이고 떠나가라는 말은 주님 품에서 나와 어두운 곳으로 영벌의 자리에, 고난의 자리로 물러가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과 너무 차이가 나는 대접을 받게 됩니다. 천국은 의인들을 위해 창세때부터 준비된 곳이요, 영원히 타는 불 못은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곳인데 마귀나 그의 부하들이 들어가야 할 불 못에 악인들은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이 교훈을 받는 우리 모두는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주님의 심각한 경고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42절부터 45절까지를 보면 왼편에 서 있는 자들이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될 이유를 밝혀 주고 있는데 그 이유가 살인, 간음, 도적질 같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시지 않으시고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지적하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리실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주님께서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대답하기를 언제 주님께서 배고파하셨으며, 언제 주님께서 헐벗으신 일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은 죄목이 바로 그들이 염소의 자리에 들게 된 주 죄목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살인하는 자, 도적질한 자는 분명히 악한 자로 판정을 하고 법의 심판을 받음이 마땅한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런 악을 행하지 않은 자는 선한 자로 판정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서는 말도 없고 행동이 없는 사람을 얌전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요구는 악을 행하지 않는 얌전에 선을 행하는 행위를 추가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이 세상의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황도, 대통령도, 검찰도 판사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나이 어린아이들도 웰퍼어 받는 노인들도 심판은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아브라함 때에 이미 죽어 있는 자들도 다 일어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엄숙한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예외도 있고 면제도 있고 특별 대우도 있어서 천대와 우대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만은 이 세상에 전에도 후에도 없을 절대적 공정의 실현이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계20:12 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 세상에 태어났던 모든 이들이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에 행했던 모든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장부를 버리거나 조작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책은 아무도 손을 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악간에 심판을 받아 복 받는 자의 자리에 가던지 아니면 저주의 자리에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심판 시에 오른편에 서는 영광을 차지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얻은 교훈은 의인의 자리인 오른 편에 서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로는 보이는 사람을 사랑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아니 염소의 자리인 왼편에 선 자들이 왼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면 주님을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을 사랑한 일에는 실패한 자들이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배운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질 뿐 아니라 자기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주님 대신 믿는 형제들에게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똑같은 맥락에서 ‘내 이름으로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서로 우애하고 사이좋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바로 이것이 효도라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작년에 교인들이 주신 옷을 입고 많이 행복을 느꼈습니다. 윤 전도자가 교인 한 가정에서 양복을 하나 사 드린 일을 보고 바로 내가 입은 것보다 더 기쁨을 느꼈으며 한 자매가 에스더회 회원들에게 사랑으로 손수 옷을 만들어 준 것을 보고 내가 얻어 입은 것보다 훨씬 기뻤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심정으로 과연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형제들의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라는 것입니다. 발이 필요한 자에게 발이 되어 주고 손이 필요한 자에게 손이 되어 주며 눈이 필요한 자에게 눈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 직접 하는 것이나 똑같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일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교인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교인들은 목사님께 경쟁적으로 잘해 드리려 애쓰는 것을 짐작하시리라 봅니다. 과연 목사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교인들을 같은 심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 교인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교인들끼리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바로 전도자를 사랑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런 사랑과 대접을 교인들로부터 받고 싶습니다. 갈 6:10 에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힘있는 대로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되 특히 성도들에게 먼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내게 없는 것으로 아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주신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의 적은 돈으로, 부자는 자기의 큰돈으로, 유식한 자는 자기의 유식으로, 무식한 자는 자기의 적은 지식으로 이웃께 봉사하도록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심판 때에 그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자기가 가진 사랑을 필요한 자에게 나눌 수 있어서 그 사랑 때문에 오른편에 설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으나 부자는 자기의 부를 가지고 또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편이 나쁘고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사랑을 또한 필요한 자에게 나룰 수 있게 해 주시므로 감사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현재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엡 2:10에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라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은 성도들이 성도의 본분인 선을 행할 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만 이기적인 삶을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살고 심판 시에는 영영한 불로 쫓겨날 것이나 자기의 본분을 깨닫고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내 시간과 내 재물과 내 능력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자는 하늘 나라를 상속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선행은 성령 충만한 믿음이 있음이 전제된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큰 선행도 믿음을 보충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선행이란 믿음의 증거요 결과로 나타나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증거인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어 심판 날에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축복의 선고를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