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도 이제 26, 27, 28 세 장 남았습니다. 26장과 27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28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기록되어 잇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본다면 30세 까지는 성장과 준비의 기간이었고 3년 동안에 전도 활동을 하시고 육적 삶을 청산하시게 되는 인생의 나이로 본다면 참 짧은 수명을 사시다가 가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주님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 2일을 남겨 둔 날의 일을 기록해 주고 있으니 이 날은 주님이 돌아가신 주간의 수요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1-5절까지를 보면 긴장이 고조되고 긴박한 상반되는 두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2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제자들을 위해 하셔야 할 남은 일을 완수하시느라 숨가빠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며, 다른 하나는 만민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는 의인 예수님을 꼭 잡아죽이겠다고 숨어서 공모하는 유대 종교 최고 지도자들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한 장면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순종의 모습이요 다른 한 장면은 하나님의 뜻을 한사코 거스리고 그 뜻을 파괴하는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십자가까지 지신 주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결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예수님(1-2)
[2]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3-5) 입니다.
[1]먼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게 될 것을 몇 번 예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소화하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메시아가 나타나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회복하여 전 세계를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를 이룩할 것으로 믿고 있던 차에 그 대망의 메시야가 드디어 오셔서 지금 곧 그 날을 보게 될 기대로 많이 부풀어 있고 심지어는 그 때에 자기들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 외에 다른 말은 귓전에 와 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갑자기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을 제자들이 목격하게 된다면 그 충격이 너무 클 것이므로 이제 다시 보다 더 구체적으로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현실을 제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폭동과 지진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하는 피해자들이 많은 현실인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도 제자들에게는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 내는 좌절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폭동이나 지진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충격을 줄여 주는 방법이라고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또 되풀이하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고하셨다는 것은 돌아가실 날짜를 예고하시기를 이틀밖에 남지 않은 유월절이라 하셨고 돌아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며 이를 위해 팔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고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성경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들이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꿈이 깨지고 그들의 이상이 흔들릴지언정 주님의 십자가 수난은 꼭 치러져야 하는 사건이었으므로 이 계획은 전연 변동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주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더 자세히 배우게 됩니다.
수난의 의미 중 하나가 주님의 죽으심과 유월절의 관계에 대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단 한번의 유월절만 언급하고 있으나 요한 복음에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3번의 유월절을 기록해 주고 있어서 주님께서 3년 동안 사역하셨음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첫번 유월절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 전후이고 두 번째는 5천명을 먹이신 이적 전후이며 세 번째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로 정하신 유월절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유월절은 그림자와 실체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유월절이란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시고 치시기 위해 애굽 사람의 모든 장자를 다 죽게 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은 살리시기 위해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게 하므로 천사가 문지방의 피를 보고 장자를 죽이지 않고 지나갔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하는 것으로 어린양의 피를 인해 죽음에서 건져진 것같이 예수님께서도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만 인류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뛰게 해 주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에는 죄와 상관없는 양들이 죄가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됨으로 사람의 죄가 속죄됨같이 예수님께서도 죄 없는 양으로서 죄 많은 인류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대략 주전 1450년에 첫 유월절이 시행한 이후 매년 이 유월절에 많은 양들을 잡아 희생양들을 바쳐 왔으나 이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의 모형으로 이젠 주님께서 짐승 양 대신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단 한번 드려짐으로 매년 유월절의 희생양이 그 이상 희생되지 않고도 인류를 속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월절에 돌아가시게 된 것 또한 더욱 의미를 강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 1:29 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고백한 바 있는데 이 역시 유월절 희생양이라는 상징적 고백인 것입니다. 요일 1:7 에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 했는데 유월절 새끼 수양의 피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 주듯 주님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유월절 양이 되신 셈입니다. 즉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출애굽 시켜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성도들을 죄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도록 하는 제 2의 출애굽을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 하신 바대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므로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이 다 정해져 있는 사실로서 주님께서도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한번은 죽듯 주님께서도 한번은 죽으셔야 하는 사람의 운명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인간이 다 죽게 되지만 주님의 죽음은 만인을 속죄하는 큰 죽음이요 만인을 살리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의 죽음 중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수난은 돌발적으로 누가 팔았기 때문에 일어난 피동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의지와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갈 1:4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 함과 같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두 번째로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여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때에’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대비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계신 바로 그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란 마가복음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최고 의결기관인 공회 회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당시 공회는 대제사장 24명, 서기관 24명, 장로들 24명 총 72명으로 구성하며, 모든 것을 의결할 수 있되 로마 통치하에서는 사형만큼은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최고 회의 회원들이요 종교 지도자들인 이 공회 회원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는 기록입니다. 대 제사장이란 아론이 첫 대제사장이요 그의 족보에서 세습되어지는 제사장직으로 종신직었으나 로마 통치하에서는 로마 정부가 자기네들의 통치에 잘 협조하는 사람을 선택했고 임기도 마음대로 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가야바라는 대 제사장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로 18년간이나 대 제사장직을 유지한 로마 정부에 아첨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대제사장들은 평균 3년 정도 대 제사장직을 유지하였다는데 가야바는 18년간을 유지했으니 대단한 정치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공회 회원들이 공회 회당에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대 제사장의 공관에서 모였다니 이것은 숨어서 음모를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궤계로 잡아 죽이려 했다는 말은 주님을 정죄 할 죄목이 없으므로 죄를 거짓말로 꾸며서 잡아죽이려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잘 아는 자들로서 지난 금요일에 출애굽기 강해에서 증거 받았던 제 9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공회 회원들은 왜 이렇게 궤계를 꾸며 가며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 했을까요? 요 11:47-50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니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믿을 것이므로 로마 정부에서는 공회 회원들인 자기들에게 이 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을 염려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리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라도 해야 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세상 정치가나 종교 지도자들이나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다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5절에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니라”라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지금은 바야흐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유대의 각 지방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갈릴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참 선지자이시요, 또 메시야라고 믿는 자들이 많은데 사람들 보는데서 예수님을 체포한다면 선지자로 믿고 있는 자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며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로마 정부가 책임을 물어 공회원 모두의 옷을 벗길 것이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가 끝난 후 군중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 조용히 잡자는 신중론이었던 것입니다.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유월절 절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왔는가를 로마 정부에 보고하기 위해 유월절에 드려진 희생양의 숫자를 세어 보도록 했었는데 256,500 마리였다고 합니다. 순례자들은 보통 10명씩 무리를 지어 재물을 드리거나 20명씩 모여 함께 재물을 드렸으므로 최소한 200만명이 몰려왔다고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란 7일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이 절기를 무교절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누룩 없는 것을 먹기 때문입니다. 즉, 이 무교절 절기에는 예수님을 잡지 말자고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요 11:57에 보면 유월절 절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이므로 누구든지 그를 보거든 그가 있는 곳을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공회 회원들의 분부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200만 명중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절기에 예수님을 쉽게 잡았고 또 잡았지만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룟 유다가 팔았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고 또 누가 예수인지 꼭 찍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려 주었던 가요? 가룟 유다가 입을 맞추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암호를 짜서 그렇게 하므로 그들은 아주 쉽게 찾았고 조용히 체포할 수 있어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방금 소개받은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대로 사시다 가신 것같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목적대로 살다 하나님께 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2:14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 백성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 열심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12 제자를 택하시고 가르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장관 자리를 주시기 위해 훈련하시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일에 치중하는 종들이 되라고 택하심같이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심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중심 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계획하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이란 꼭 신학교에 가고 전도자가 되라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하던지 우리 인생의 목표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두고 나도 그것을 소망하며 그 소망을 남에게 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더 좁혀서 말한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성도의 삶을 살아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지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분명히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살고 내 욕심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결과적으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할 수만 있다면 보다 더 장수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주님의 생애는 33년의 짧은 수명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더 오래 오래 살아야 하나요? 우리의 인생을 오래만 끌고 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짧던 길던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과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또 장로들에게 남들이 갖기 어려운 공회 회원이라는 유대 최고 특권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누리고 보니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장성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잡아죽이려는 음모까지 하고 결과적으로 잡아죽이는 일까지 저질렀으니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선한 일에 사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한 사실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받고 주신 특권에 감사하여 그 특권을 선한 일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함이 마땅한데도 결과적으로 그 특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받은 특권이 무엇일까요? 높은 자리, 많은 재물, 건강, 높은 학문, 잘되는 사업,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좋은 남편 아내, 자녀 일 수 있습니다. 이런 특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런 특권들이 합력 하여 하나님을 보다 열심히 섬기고 감사하며 이웃을 보다 열심히 섬기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들이 됨이 마땅하나 대개의 경우는 잘되는 사업 때문에 믿음을 게을리 하고, 좋은 직장, 좋은 학교 때문에 신앙을 뒤로하는 경우가 많음이 사실입니다. 오늘이 어머니날인데 좋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초청으로 하루의 즐거움을 맛보느라 교회 오는 것을 뒤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못 보는 이유가 무엇이며, 교회를 못 오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좋은 가족 또는 친척 때문에, 좋은 친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좋은 직장, 좋은 사업, 좋은 학교, 좋은 환경이 나를 점점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된다면 그 좋은 것은 나를 파멸하게 하는 마귀의 시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게 특권이 주어지지 않고 차라리 외로움이, 차라리 가난이 더 나았을 것으로 판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게 지금 좋은 것, 기쁜 일이 하나님께와 내 이웃에게도 역시 좋은 것이라면 그런 특권은 그대로 누리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도 좋지 않고 내 이웃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못된다면 그 특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을 그 목적대로 지키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것 같으면 차리리 그 특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여러 모양으로 주신 특권을 본래 주신 의도대로 잘 지키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삶의 목표가 선한 일에 열심히 있는 삶으로 청산될 수 있도록 삶을 새롭게 하나님의 뜻에 조명하여 매일 매일의 삶이 본래의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지도록 하며,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주신 특권들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활용되는 삶이 되도록 삶을 운영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