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장사를 위한 향유 – 마태복음 26:6-13

주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셨던 생활 환경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때 세상적으로는 너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셨던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고백하신 대로 심지어 날아다니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그대로 오두막 한 칸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반듯한 옷 한 벌도 없으셨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명 강의를 수없이 해 주셨지만 강사비는 커녕 목을 적실 수 있는 물 한 컵이라도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님 대신 전달하는 현 시대의 주의 종들 중에는 철따라 양복도 잘 얻어 입고 살 집도 제공받고 좋은 차에 높은 존경과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사실들은 주객이 바뀐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마리아란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아름다운 장면을 오늘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생애에 처음이요 마지막인 큰 선물을 그녀로부터 받으시고 주님께서는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선한 일을 기념하라고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코자 기회가 왔을 때에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던 결과로 향유 값에 비교가 안돼는 큰 보상을 차지한 사실을 우리가 소개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성도들도 자기가 이미 받은 은혜와 또한 앞으로 베풀어주실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라도 아깝지 않게 드릴 수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드린 우리들의 마음도 기쁘고 이를 받으신 주님께서도 기쁘시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아낌없이 받게 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본문의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첫째로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6-9)

[2]둘째로 주님의 칭찬(10-13)입니다

 

[1]먼저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소개받은 마26:1-5절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2일전에 일어난 사실이었으나 오늘 소개받는 본문의 시기는 요한 복음 12:1에 보니 십자가를 지시기 6일전에 일어난 일이라 말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이 주일에 일어난 일인데 오늘의 일은 바로 전날 즉 토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장소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죽은지 나흘만에 나사로를 살리신 나사로의 마을이며 오늘 일어난 일은 베다니 마을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임을 마태복음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시몬은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의 남편일 것이라고 보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문둥이 시몬’이라 이름한 것을 보니 그가 문둥병에 걸렸던 자이나 예수님을 통해 나음을 받은 자일 것으로 생각되며 나사로는 죽음에서 살아난 일이 있으므로 이 가정은 누구보다도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은 가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도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일하시고 저녁에는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시곤 했는데 베다니에는 친근한 시몬의 집이나 나사로의 집이 있어서 그러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 12:2 에 보면 “이곳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라고 한 것을 보면 주님께서 이 가정을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가 감사하여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의 기록을 보면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자리에 있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런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으며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지 않으나 요한 복음에는 이 여자는 마리아요, 그 향유는 300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드 향이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으로 매우 귀하고 비싸서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에게 바쳐지는 예물이라고 합니다. 요한 복음에는 이 향유의 값을 300 데나리온으로, 마가복음에는 300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이었으므로 마리아가 주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노동자가 1년 동안 일을 하여 받는 품삯에 해당되는 정말 값비싼 향유였음을 알게 됩니다. 요사이 한 사람이 한 달에 1천불을 받는 것으로 비교한다면 12,000불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라고 그 값을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되어 있고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차이가 있는 듯하나 그 당시에는 머리에서부터 온 몸에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다고 하므로 예수님의 몸에 부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사이 돈으로 12,000불 짜리 향수를 어떤 분에게 선물을 했다고 한다면 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분들께 선물을 하게 되는데 그 선물은 감사의 표시일 뿐이지 받은 은혜의 값과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은 것과 같이 12,000불 짜리 선물은 은혜에 감사해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일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즉 마리아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어느 정도 인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꼭 자기뿐 아니라 자기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신 그 은혜까지 생각해 볼 때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로 깨달았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비롯하여 마리아의 가정에 사랑으로 기름 부어 주신 주님께 마리아 자신도 자기가 주님을 얼마나 믿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 봅니다. 아니 어찌 보면 1 주후에 십자가의 수난을 당해야 하는 일로 위대하신 영적 지도자 예수님의 얼굴에 어둔 그늘이 있고 무언가 근심이 있는 눈빛을 예리한 여자의 눈에 비쳐져서 그분을 위로해 드리고 격려해 드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이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 장면을 본 제자 중에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하기를 왜? 이렇게 돈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했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기록을 보면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말한 것이 아니고 그가 예수님의 돈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돈이 들어오면 그 돈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는데 은 30은 120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하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300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은 30의 배가 넘는 돈이니 가룟 유다는 횡재할 기회를 놓쳤으므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예수님의 칭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책망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를 괴롭게 하느냐고 제자를 나무라시면서 마리아가 책망 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심을 보게 됩니다. 11절과 12절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시게 되는데 그 하나가 가난한 자들은 앞으로도 제자들이 구제할 기회가 있게 되지만 주님께서는 수일 내에 십자가를 지셔야 하므로 주님을 돌보아 드릴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요 다른 기회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 드리는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향유를 부어 줌으로 주님의 장사를 위해 한 결과가 됐다는 것입니다. 유대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 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어 직분을 세우게 되고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몸에 향유를 발라 주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것이 바로 이런 풍습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로서는 예수님이 일주일이 못되어 돌아가실 것을 알고 주님의 장사를 위해 향유를 그의 몸에 부은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까지라도 드리도록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주님의 죽으심을 위한, 주님의 장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한 것이 된 것입니다. 진심으로 한 일이라 꼭 알 맞는 시기에 꼭 필요한 예물이 주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제자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 것인 가에만 치중하였지만, 아니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한 자리씩 차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기도 부족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주님께 드리는 충성심을 보여준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유월절이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어떤 제자도 주님의 죽으심에 대비하여 향유를 준비하지 않은 것과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고를 하시게 되며 반대로 마리아께는 크게 칭찬하시고 높여 주신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선행을 소개하여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기념하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세상에 이 이상 더 큰복과 칭찬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형상으로만 말을 한다면 12,000여 불을 주님께 드리고 이런 큰 칭찬을 받았다고 과소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여자에게는 그것은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물질 중 가장 귀한 것이었고 이미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녀는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의 생명까지라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롬 16:3에 보면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칭찬하기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라 하였는데 마리아도 그와 같은 충성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드 향유 한 옥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다 드릴 수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주님을 위해 나드 한 옥합을 드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더 큰 액수의 헌금을 교회에 바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드 한 옥합을 드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을 때에 주님의 큰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마리아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기로서는 갚을 길이 없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마음을 표현했던 것뿐인데 결과는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큰 보상을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만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위대한 죽음을 위해 그 누구도 관심을 쏟거나 그분의 고뇌를 눈치채지 못했으나 마리아는 만 인류를 대표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위해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해 드렸고 이 일을 통해 주님을 크게 위로해 드리고 힘을 드린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보상을 받을 만한 자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연약하다고 하는 여자라는 존재이지만 한 여자가 구세주의 사역에 큰 몫을 해냈고 구세주께 큰 격려를 드렸음을 생각하며 올바르지 못한 여자는 남편 아담을 넘어지게 하는 존재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지금도 바른 여자는 큰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알려주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어떤 제한이 없었던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 어떤 제한이나 한계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나드 한 옥합을 주님께 드렸는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이 요구하신다면 무엇까지는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나가되 자신의 안락한 삶과 재물이 간섭받지 않고 자기의 프라이버시가 전연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원하게 됩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의 교훈에 따라 내 생활을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내 방법에 의해 일구어 온 현재의 생활이 혹시 라도 파괴되지 않고 보다 더 단단해지도록 보호받기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고 말해도 모순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신앙이란 신앙의 첫발부터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의 직업과 자기의 생활을 버렸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왔을 때에도 주님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도록 명령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눅 12:33에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고백했음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깨뜨려 버리는 희생과 버림이 없었더라면 주님께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의 행함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감동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지극히 상식 선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란 상식을 훨씬 초월한 헌신이요 자기 부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되 자기의 상식을 초월하여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의 보상도 우리의 상식을 훨씬 초월한 큰 양의 보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즉 그녀가 주님께 베푼 사랑에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의 보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에 얼마나 비싼 옥합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평가를 하게 되지만 주님의 평가는 정 반대로 주님을 위해서, 내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값비싼 옥합을 얼마나 깨트렸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주님 재림시에 주님께 선택되고 발견되려 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주님을 얻기 위해 내 은행 통장을 헐고, 내 주머니를 비우며, 주님을 얻기 위해 내 직업을, 사업을, 내 명예를 깨뜨려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희생한 양에 비례해서 주님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희생 없이 얻게 되는 행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신앙에서는 희생한 양만큼 주님을 얻게 되고 기쁨과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재물과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깨트리지 않고 자기의 희생이 요구되는 곳에서 빠져나가는 신앙 생활은 주님의 칭찬과 축복에서 빠져나가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내 호주머니를 깨트리고, 내 시간과 내 귀한 것을 깨트리는 자에게만 주님께서 수십 배, 수백 배의 귀한 것으로 보상해 주신 다는 진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나 남을 위해 바치는 사랑의 양이 인색하다는 말은 신앙이 그만큼 자라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를 위한 일에, 남을 위한 일에 많은 희생을 감당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되고 성장된 믿음의 열매를 거둘 목적으로 좋은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의 귀한 것을 깨트릴 수 있는 자는 복된 자들이 다 되셔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 이 때가 바로 옥합을 깨트릴 때임을 알고 주저하지 아니하고 깨트렸던 것입니다. 야구에서 적시에 안타를 터트린 통쾌한 깨트림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수 있지만 모두 기회를 놓치고 오직 모든 인류 중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위해 옥합을 깨트린 자는 마리아뿐이었던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몇몇의 여인들은 분명히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으므로 결국 기회를 놓친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머니를 털어서, 우리의 옥합을 깨트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선을 행할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상과 행운이 자기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내 귀한 옥합을 깨트리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깨트리시어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