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버릴 제자들 – 마태복음 26:31-35

제자로 선택을 받아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던 가룟 유다가 은 30에 자기 선생님을 팔았다는 사실을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 모두를 향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을 배신한 자가 가룟 유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열 한 제자들까지도 주님을 버리고 부인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굳은 의지를 가졌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언하셨고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한지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제자들을 보면서 위축감을 느끼게 되고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버린 그런 비겁한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어린 마음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12 제자들과 똑같이 시시 때때로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가능성이 있는 우리들도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다시 만나 주시기를 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고 또한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므로 주님께는 더욱 감사하고 우리 스스로는 더욱 자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예언(31-32)

[2]제자들의 과신(33-35)입니다.

 

[1]먼저 예수님의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저녁을 잡수시면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심으로 열 두 제자가 하나씩 주님께 “주여 내니이까?”라고 확인했던 과정을 통해 가룟 유다가 바로 주님을 팔자라고 지적당하게 됨으로 나머지 열 한 제자들은 그 순간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충격적인 예언을 하시게 됩니다. ‘오늘 밤’이란 수개월 후나 수주 후에 있을 일이 아니라 수 시간 내에 일어나게 될 사건을 지금 예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다’라는 말은 12제자 중에 그 누구 하나도 예외가 없이 전부가 다 배신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이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서 돌이켜 다시 각자의 본래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중도 포기’이고 나쁜 말로 하면 ‘배신’할 것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주님을 판 적극적인 배신자이고 다른 열 한 제자들은 3년이나 함께 생활했으면서도 주님의 길을 이해 못했고 위협을 느낀 나머지 주님을 모른다고 거짓 말을 한 소극적인 배신자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소극적인 배신을 하게 될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31절에 보면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했는데 이 말씀은 스가랴서 13:7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 되신 예수를 치시면 주님의 양되는 제자들이 흩어지리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하나님의 계획이시요,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치신 것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린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왜?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게 될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제자들이 소망하며 따라다녔던 꿈이 다 깨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수난을 여러 번 예고해 주셨고 이번에는 유월절에 돌아가실 것으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될 일로 믿지 아니했고 오히려 주님께서는 메시야로서 곧,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를 통치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그 일이 수일 내에 이뤄지리란 성취감을 갖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그 메시야께서 잡히실 당시 저항도 못하셨으며 어떤 놀라운 능력도 행하시지 못하시고 잡히셨고 그렇다고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 정부에 대항하도록 데모를 충동하신 것도 아니었으므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만한 어떤 암시도 주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를 걸고 3년이나 직업과 가정을 뒤로 두고 주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는 몹시 실망하고 당황했을 것이며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의 꿈과 희망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그 이상 주님께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버리고 도망을 했을 것이며 또 제자들은 혹시 자기들까지 잡혀서 죽지나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즉 군중이 두려워서 그리스도의 편에 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버리고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다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런 뼈아픈 배신의 예고를 주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미래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예언하시게 됩니다. 배신자들을 다시 만나 주시겠다는 참음과 자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을 전연 상상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부활 후에 다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그들이 배신으로 끝나 버리지 아니하고 배신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연단이 되고 부활 후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심으로 다시 제자로서의 길을 걷고 그들이 사명을 완수할 것으로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3:8-9에 보면 흩어진 양의 1/3이 불 가운데 던져져 은같이 연단이 되고 금같이 시험이 될 것이라는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비록 배신자 제자들이지만 성령의 불을 통해 연단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룩하는 충성된 종들로 다시 사용하시겠다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함께 사업하다가 배신한 어떤 사람에게 다시 한번 인간 회복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심령을 소유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 한번으로 끝내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이겠는데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과 다시 만나 그의 큰 사업을 맡기시겠다는 사랑을 보이십니다. 이 지구상에 그 어부들 말고는 인물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죄인들을 사랑의 용광로에, 성령의 용광로에 넣고 재생하여 쓰시겠다는 큰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주님의 목적은 제자들의 배신을 노출시키는 데 있다기 보다는 수난과 배신 등의 모든 과정 이후에 있게 될 부활을 밝히는데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풀려지지 않은 모든 숙제를 다 풀어 주는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흩어짐을 모음으로’ ‘배신을 회개와 충성으로’바꿔 놓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위대한 사명을 주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어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증인들이 다 되었던 것입니다.

 

[2]두 번째는 제자들의 과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 중에서 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겠습니까? 성질이 급하고 성질이 강한 베드로가 또 제일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베드로가 말한 ‘언제든지’라는 말은 ‘결코’‘절대로’의 뜻으로 지나친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럴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러치 않을 거라고 장담을 했으니 이것은 소영웅주의적 태도에서 나온 교만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혹시 주님을 버릴 수 있다면 자기도 인간이므로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해야 하지 자기는 초인간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지나친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지만 베드로는 하지 말라는 맹세를 하므로 주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받고 있는 것을 지적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도 예외가 아님을 분명하게 하셨는데도 자기는 예외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잘 모르시는 분이라는 말이 되므로 베드로는 전지 하신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 깎아 내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장담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닭 울기 전이라 되어 있으나 막 14:30 에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만만한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예언을 하시면서 그의 장담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 될 것을 깨닫게 하시려 하십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주님을 따라다닌 일도 없다고 딱 잡아뗄 말을 하되 닭이 울기 전에 할 것이며 한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잡아 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닭이 우는 시간을 저녁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3 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 수인데 몇 시간 내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하므로 완전하고도 철저한 부인을 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자기의 교만과 자기의 성질을 누그러뜨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강도를 높여 장담을 함을 보게 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베드로는 주님께서 이제 몇 시간 내에 십자가에 처형될 것을 전연 모르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전연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장담을 한 것이겠지요. 이런 장담을 자신 있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분명히 돌아가시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의 고백대로 주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몇 시간도 않되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결심과 나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깨우쳐주시는 본보기라 생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장담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장담을 하고 큰소리치고 자신 만만한 일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어 입장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나 자신을 믿고, 현재를 믿고 장담하다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시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넘어지듯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들임을 우리 스스로 시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우리들임을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믿는 자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은 열 두 제자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예수를 버린 사실을 성경을 통해 증거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이 12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나 또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고 어떤 면에서 내가 주님을 버리거나 부인할 가능성이 있겠는지 긍정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주님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어떤 면에서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살도록 하고 계시지만 우리 인간들은 한사코 세상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살고 있는 관계로 내 세상 삶이 평탄하면 믿음도 평탄하게 되지만 혹시라도 내 인생에 위기가 오고 원치 않던 파탄이 오면 믿음을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얻고자 하는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에 취직이 되지 않는다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위협을 준다면 믿음을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을까요?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다면 꼭 입으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을 버린 결과가 되므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습관은 바로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함에도 이를 게을리 하므로 믿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으나 모임에 참석을 게을리 하므로 신앙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기도를 게을리 한다면 믿음에서 멀어져 가고 말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음에도 불평만 털어놓는 삶은 불 신앙의 삶으로 퇴보될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으므로 불 신앙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부인하고 버릴 수 있는 요인이 내게 있나 점검해 보고 그 요인을 제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내 육신의 번영을 위한 일에 치중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 제목이 영적인 문제에 치중되도록 믿음의 목적과 목표가 수정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다면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육은 죽어도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시겠다는 소망을 더욱 뜨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십니까? 매일 말씀을 대하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집회에 가끔 빠지십니까? 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자기 입에서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이 나옵니까? 감사가 더 많도록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실천이 되지 아니합니까? 꼭 성공적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 못한다면 모든 실천이 다 허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해보려 해도 결과가 없습니까? 낙망하시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십시오. 내가 세운 계획만으로는 이뤄지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꼭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 개인 생활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버리는 어떤 습관도 고쳐 나가 하나님의 복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넘어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붙잡아 일으켜 주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주님께서 배신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용납하시어 다시 큰 일을 해내는 복음의 일꾼으로 들어 쓰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버리고 부인한 그 실수에만 집착하시지 않으시고 부활 후에 그들이 다시 새롭게 일할 것에 비중을 두신 사실을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버렸으나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으심으로 결과는 그들이 목숨을 내 놓고 충성을 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에게 여러 각도에서 우리들을 배신하고 우리들을 버린 자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배신한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나를 늘 힘들게 하는 자, 내 돈을 축낸 자, 나를 늘 헐뜯는 자, 나를 망하게 만든 자를 우리들은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대처하고 계십니까? 사실상 그들의 모습도 보기 싫어질 것입니다. 심하면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시원하겠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옹졸한 우리 인간 마음으로는 어렵겠지만 주님의 심장으로 우리의 심장을 바꿔 넣어 그들을 용서해 주고 그들이 다시 죄를 뉘우치고 회생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장 그들의 실수에만 또 내가 속상한 것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들이 다시 뉘우치고 회생될 수 있을 때의 기쁨을 상상하며 그들을 잡아 줄 우리의 손에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버릴 지라도 우리들에게 늘 다시 기회를 주신 주님의 얼굴을 생각하고 우리들도 우리를 배신한 자들이 다시 회생하여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길이요, 이 길만이 승리자가 받는 월계관을 쓰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자기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 다고 장담해서는 아니 됩니다. 나도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격려와 사랑을 받아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게 잘못한 자에게 내가 대하는 대로 주님께서 내게 대하실 것이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또 내게 잘못한 자에게 내가 대하는 대로 남이 내게 대할 것이라 믿으셔야 합니다. 내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능력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내가 혹시나 주님을 부인하거나 버리는 일이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또 다른 사람을 속 상하게 하거나 배신하는 일은 없는 지 살펴보고 내 죄에 대해서는 엄하고 혹시 남이 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다시 일어서도록 손을 붙잡아 줄 수 있는 능력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