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에서의 기도 – 마태복음 26:36-46

오늘 주신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할 제목이란 사람이 자기의 죽는 날을 모르고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전연 생각을 못했는데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언제 고난을 당하고 어떻게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너무 잘 아시고 계셨으므로 그 수난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제자들에게 들어내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수난을 당할 때를 알고 계셨음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문에서 보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 3번이나 연속적으로 기도를 했으며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진한 슬픔과 고통을 갖고 온전히 아버지께 매달리는 기도를 드렸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도 십자가 수난을 면하고 싶은 인간적인 면을 지니신 주님께서 언젠가는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중압감을 갖고 30년간을 사셨다고 생각을 해보면서 30년간의 고통은 십자가에 실지로 못 박히시는 수난의 30배가 넘는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자신이 죽지 않고도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죽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하신 독자 아들의 기도에 ‘거절’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새롭게 깨닫게 되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자기의 길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길 중에서 아버지의 길에 순종하기로 한 아들의 결단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모든 성도들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의 뜻을 끝까지 고집 부리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의 순종심을 배워 그대로 실천하실 수 있는 복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이르심(36-38)

[2]아버지께 부르짖는 인간 예수(39-44)

[3]응답 받은 성자 예수(45-46) 입니다.

 

[1]맨 먼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이르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6절에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제자들이란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7절 이하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과 함께 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만찬 석상에서 예수를 팔자로 지적을 받고 그의 배신의 계획을 실행하러 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란 곳은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눅 22:39에 보면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이곳에 오셨다고 되어 있고 요 18:2에 보면 유다도 이 장소를 알더라고 되어 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습관이셨다고 표현된 것을 본다면 제자들과 자주 오신 곳임을 알게 됩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기름 짜는 틀’인데 주님께서 이 장소에서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를 드린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조용히 만날 공간, 큰 시험 작은 시험을 하나님께 은밀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이 동산을 자신과 하나님과의 공간으로 활용하신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오늘 날 이곳에는 ‘땀흘린 교회’라는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인 우리들에게도 이런 피땀의 공간 즉 기도의 장소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하시는 권고로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곳에 오시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음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앉아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기도할 필요가 있으셨겠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제자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치는 시험에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자들이었을 것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줌으로 11제자들이 앞으로 만나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제자들을 기도 동산에 데리고 오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변화 산상에도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시어 주님께서 변화되신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 일이 있는데 이번에도 이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시어 주님의 고통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뿐 아니라 심히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도 보여 주시어 제자들도 큰 영광을 받게 되겠지만 역시 심한 수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 되도록 하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 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일로 마음이 너무 고민스러워 이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려 겟세마네에 오신 것임이 사실이나 또한 세 제자들에게 고민으로 가득 찬 심정을 나누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위로와 격려도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주님의 심히 고민하신 고민 거리들이 무엇이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유대인들의 배척, 가족들의 불신, 유다의 배신, 제자들의 도망침,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유죄 판결, 매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심,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 당하시는 일 등 주님의 머리에는 이런 모든 일들로 심히 고통스럽고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인간 예수의 고통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모양입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가? 육의 예수는 아버지께 고통을 전해 드리고 그 고통을 해결 받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 고민을 나누고 위로 받고자 겟세마네에 오신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아버지께 부르짖는 인간 예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조금 나아가사’로 기록되어 세 제자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서 기도하신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떨어진 거리를 보다 더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돌 던질 만큼의 거리이므로 30-40여 미터쯤 떨어져서 기도하시되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로는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도 기도를 했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뭐라고 기도하셨다고 기록했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잔’이란 주님께서 마셔야 할 잔 즉 지셔야 할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만민을 구속하실 다른 방법이 있으시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죽는 것은 싫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세상 사람 중에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 역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까닭에 보통 인간들이 느끼는 보통 감정을 똑같이 가지셨으므로 십자가를 지실 생각을 하니 두렵고 떨리며 피할 수만 있다면 이 길을 피하고 다른 방법으로 대치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의 주장만을 관철하시겠다는 자세는 아니었으며 자기 소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도록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의지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되신 주님께서 죽음이 두려워서 피하고 싶다는 그 울부짖음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솔직히 많이 친근감이 갑니다. 우리 인간의 약점을 다 아시고 많이 이해하실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들에게 와 보니 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제자들로부터 위로 받고 격려 받게 되기를 기대하셨으나 심지어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세 제자마저도 주님의 큰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심히 괴로워하시는 주님과는 대조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고 호언 장담을 한 제자들이 잠시도 깨어 있지도 못한 나약한 모습을 들어내고 있으니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시고 다시 두 번째의 기도에 들어가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기도를 본다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고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다시 와 보니 제자들이 또 자고 있음을 보시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이들에게 책망을 하시지 않고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보셨다고 하는 것을 보니 피곤한 제자들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신 것 같고 다른 면에서는 이젠 인간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을 체념하시고 오직 아버지께만 의존하시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 번째의 기도에 들어가십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하니 역시 ‘제가 꼭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제 욕심을 꺾고 아버지의 계획대로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므로 인간 예수가 가졌던 고통과 갈등이 많이 정리되어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지금부터 펼쳐질 모든 수난을 감당하시겠다는 쪽으로 굳히신 것을 보게 됩니다.

 

[3]세 번째로 응답 받은 성자 예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45절과 46절은 주님께서 세 번째의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 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제는 자고 쉬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치 못하지만 주님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잠만 자는 제자들에게 계속 잠이나 자라는 실망하신 나머지 하신 말씀인 듯 하며 이젠 제자들의 위로와 격려가 없어도 된다는 말씀으로 풀이해 보기도 합니다.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라 하셨습니다. ‘때’란 분명히 주님이 십가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시기 전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눅 22:44에서 기록된 대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아버지께 세 번이나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한 결과 응답을 받으신 것입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착잡했던 그의 마음에 평온을 완전히 회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눅 22:43에 보면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했는데 천사가 그를 격려하고 힘을 주어 슬픔도, 고통도, 갈등도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께서는 어떤 응답을 받았기에 마음이 평정을 찾았고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면케 해 달라는 그의 요청을 아버지로부터 ‘안된다’ 즉 ‘노’라는 응답을 받으신 것입니다. 아들의 간절한 간청이 거절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므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응답을 받으신 것입니다. 내 뜻보다도 아버지의 뜻이 존중된 사실 앞에 모든 갈등이 해결된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주님께서 영육의 갈등에서 심한 고통을 받으셨지만 결과적으로 영이 승리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되찾으신 것이며 현재 참기 어려운 잠시 동안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원한 영광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 예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는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들에게 훨씬 좋을 것이므로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신 그 원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한 아들의 간청을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영원히 죽는 길이요 살려 달라는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므로 분명히 거절하신 것입니다. 히 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되어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거절된 것이 아니라 응답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언제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께서 살고자 하는 기도가 응답되었고 영원히 사시게 되었으며 무한한 영광까지 주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간청했던 것에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응답을 받으신 결과가 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아들의 간청을 즉시 들어주시지 아니하고 3일 후에 들어주셨고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 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가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시는 것이 습관이셨다는 사실을 통해 주님께서도 시시 때때로 아버지께 모든 것을 아뢰고 문제를 해결 받았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실상 우리 인간으로서는 만 가지를 도움 받아야 하는 입장이므로 더욱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만나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부탁하며 우리들이 갖는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아버지를 만날 공간 ‘겟세마네’ 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겟세마네는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진지하게 아버지께 내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해결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해결 받을 때까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해결 받아야 할 것이 있음에도 아버지께 부탁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심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부탁드려도 이 문제는 해결 받지 못할 것으로 알고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아뢰기를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하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믿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께 구하되 언제 어디서든 구하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언제 무슨 일로 우리가 시험에 당하게 될지를 모르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부탁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주시고 또 보호해 주시겠지만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며 찾는 이가 찾을 것이며 구하는 이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열심히 두드리고 진지하게 찾으며 지속적으로 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요구는 자녀들의 입장에서 요구하게 되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실 부모들에게는 부모들의 입장이 따로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때에 오직 나의 입장만 생각하고 구하게 되나 주실 하나님의 입장이 따로 있으시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모범적인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형편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지만 자기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형편을 따르겠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진지하게 부탁드리되 부탁을 들어주실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들어주실 것인지 어떤 응답을 주실 것인지는 아버지의 소관으로 온전히 아버지께 맡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은 즉시 나타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응답이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오는 응답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 줄 알아야 하겠고 분명한 것은 내가 부탁드린 것보다는 아버지 차원에서 내게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혹시 때로는 ‘거절의 응답’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인데 ‘거절의 응답’을 거절된 쪽으로만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 즉 응답을 하시되 다른 방법으로 응답된다는 사실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다 응답되되 어떤 기도의 응답은 느리게 응답이 되고 어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주문한 바로 그 물건이 아니라 다른 물품으로 바꿔서 보내 주시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딸을 아버지께 주문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문품을 바꿔서 보내 주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을 것으로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노’라는 응답, 즉 거절된 응답을 실망으로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좋은 물품으로 바꿔서 보내 주실 응답으로 소화할 수 있는 차원으로 우리 아버지를 더욱 신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밥을 달라 하면 밥을 주시고 떡을 달라 하면 떡을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문한 것을 보내 주시지 않는 즉 ‘거절의 응답’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절된 응답’을 받고 낙망을 하기보다는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차원까지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계속 하나님께 계속 의존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내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무엇이든 응답된다는 확신을 가지시며 거절의 응답도 역시 더 좋은 응답으로 받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