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과 잡히심 – 마태복음 26:47-56

 

오늘 본문 말씀이 주어진 장소는 주님께서 땀 방울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의 기도를 드린 겟세마네 동산이며 시간은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수난의 길을 자진해서 가기로 결단하시고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직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실 때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큰 무리들을 안내하여 오므로 주님께서는 순식간에 무리들에 의해 불법으로 체포당하시며 너무나도 힘없이 잡혀가시는 장면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내용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가룟 유다의 배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이었으며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도 강도나 잡으러 온 것같이 칼과 곤봉을 가지고 와서 불법으로 잡았으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반항 없이 몸을 내 맡기셨음을 보게 됩니다. 죄를 지은 자들은 자기네들이 지은 죗값을 받게 되겠지만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일들은 성경에 예언된 하나 하나를 이루어 가는 과정인 것을 아시고 다 순응하신 모습을 소개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신자들의 모습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 순종자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배신자도 순종자도 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바로 행사하므로 주님의 제자들이 누릴 놀라운 복을 다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유다의 배신(47-50)

[2]베드로의 육신적 행동(51)

[3]주님의 책망(52-55)

[4]제자들의 도망침(56)입니다.

 

[1]맨 먼저 유다의 배신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자기의 선생님을 팔기로 하고 때를 기다리던 중 자기의 범죄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생각하고 대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계신 곳을 알려주기위해 유월절 식사 자리를 떠났는데 요 13:30에 보면 이 때가 밤이었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식사 후에 어디로 가실 것을 지금까지의 습관에 따라 충분히 짐작을 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유월절 식사 후에 주님께서 어디로 가실 것이라고 가룟 유다가 짐작을 했었나요? 겟세마네라는 곳이었습니다.

 

본문 47절에 보니 열둘 중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다고 했습니다. ‘열 둘 중 하나’인 유다라 했는데 제자가 열 둘이므로 모든 제자들은 열 둘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열 둘 중 하나란 가룟 유다에게만 붙여진 별명이 되어 버렸고 열 둘 중 하나란 어떤 숫자적 의미가 아닌 ‘배신 자’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유다의 안내를 받고 큰 무리가 왔는데 그 무리들은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자들이라고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란 유대 최고 기구인 공회의 회원들로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일이 어떤 불량배들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공식적인 처사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사람을 잡기 위해 큰 무리가 파견되었고 또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검이란 칼이요 몽치란 경찰들이 차고 다니는 곤봉을 말하는 것으로 검이란 로마 군인들을 상징하는 말이요 몽치란 유대인 성전 수비대를 말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여 예수님 한 분을 체포하기 위해 각 기관에서 다 몰려온 모양입니다.

열 한 제자와 함께 계신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밤중에 체포해야 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어려우므로 가룟 유다는 자기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미리 짜고 무리들을 이끌고 주님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다가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라고 말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제자들이 주님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른 예가 두 번 있는데 두 번 다 가룟 유다만이 사용한 경우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하였으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보통 선생님 그 이상으로는 영접하지 못한 증거인 줄 압니다. 예수님을 팔기로 이미 은 30을 받은 유다가 시치미를 딱 떼고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 참석했고 주님께서 열 둘 중 하나가 주님을 팔리라고 하실 때에 뻔뻔스럽게 “내니이까?”라고 묻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이끌고 예수님께 왔으면서도 “안녕하시냐”는 속임수를 쓰게 됩니다. 곧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빤히 알면서 주님의 안녕을 묻고 안녕을 기원하는 위선적 행동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유다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제자들도 속아넘어갈 것이라고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입을 맞추었다는 단어는 열정적으로 또 반복적인 사랑의 표시를 했다는 말로서 외형상으로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연기를 잘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근사한 위장적 입맞춤이 있었습니다. 삼하 20:9,10 에 보면 요압이라는 다윗의 군대 장관이 아마사라고 하는 대등한 장군을 평안을 빌고 오른 손으로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는 동시에 다른 손에 있는 칼로 배를 찔렀던 일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 정의, 사랑을 부르짖고 속으로는 파멸과 살의가 있는 겉과 속이 다른 ‘샬롬’과 입맞춤의 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로서는 완벽한 위장술로 연기를 하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속여넘길 수 있을 지 모르나 누구만은 속일 수 없나요? 주님은 가룟 유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므로 그가 머리를 쓴 만큼 더 죄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속임수는 그만 쓰라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아니 체포당해 줄 것이니 계획한 대로 소원을 풀어라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자마자 누가 예수님인지를 확인한 무리들은 주님께 손을 대어 잡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유다에게 “친구여”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에서의 친구라는 말은 어떤 저주스런 나쁜 뜻이 내포된 어휘도 아니요 그렇다고 정이 어린 그런 사랑의 뜻이 담긴 말도 아니요 감정이 석이지 않은 ‘이 사람아’ 정도의 호칭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베드로의 육신적 행동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충성을 맹세한 자인데 그 충성심을 만인 앞에 보여줄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곧 왕이 되실 메시야를 사람들이 체포하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칼집에서 칼을 빼서 체포하는 사람 중 대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 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호대장 노릇을 잘해 내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수수 방관하고 있는 그 찰나에 베드로는 순발력이 있어서 용맹성을 발휘한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예언을 받은 베드로로서는 자기의 충성심을 보여 드려 자기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마태복음에는 칼을 쓴 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고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라고 되어 있으나 요한 복음 18:10 에 보면 이는 베드로이며 귀가 잘린 종의 이름은 ‘말고’요 그의 오른편 귀가 떨어져 나갔다고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복음 22:51에 보면 주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저 다시 회복시켜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3]세 번째로 주님의 책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고 또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큰 무리들을 책망하신 것을 봅니다. 먼저 베드로에게 뭐라고 책망하셨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자기가 철저히 보호해 드린다고 생각해서 그런 무술 실력을 발휘했겠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모시고 있는 주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아버지께 구하신다면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고 하셨습니다. 열 두 영에서의 영이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으로 한 영은 보병 6100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12영이라면 칠만 이천이 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해서 잡으러 온 사람들로부터 얼마든지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면 7만 2천명 이상의 천사가 와서 주님을 보호할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적인 존재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 천 명을 먹이셨던 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주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또 알지 못한 것은 조금 전에 피땀어린 세 번의 간구를 통해 이미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기로 마음을 정리하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음에도 주님의 마음도 못 읽고 또 그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칼을 쓸 때가 아니라 오히려 칼을 집에 꽂을 때인데 칼을 썼으니 책망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누가복음 22:49에 보면 제자 중에서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 답이 없으셨음에도 베드로가 성급하게 칼을 휘둘렀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물어 철저히 행동에 옮기시고 계심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전에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소망하시는 나라는 하늘 나라이나 제자들이 소망하는 나라는 세상 나라이므로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지배하셔야 하므로 칼을 버리신 것이며 제자들은 세상을 차지해야 하므로 칼을 쓴 것임을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전연 다른 소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54절에 보면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지니셨으므로 원수를 향해 칼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수많은 천사들을 아버지께 요청하여 얼마든지 보호받으실 수 있고 오히려 체포하러 온 자들을 다 체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미리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되어질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메시야가 어떻게 되리라고 성경을 통해 예언해 두었는데 주님께서 자기 의지로 행동한다면 앞으로 이뤄지리라고 예언된 성경이 어떻게 이뤄지겠냐는 것입니다. 시편 41:9에는 제자 중 하나가 대적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슥 11:12에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을 예언하셨으며, 사 53:7에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체포당하시는 장면을 예언해 주셨고, 사 53:12에는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실 것을, 또 슥 12:10에는 찔림을 받을 것이 미리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잡히심을 모면하시기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하신 다면 모든 예언이 맞아 들지 않게 되어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를 높이실 모든 계획을 철회하시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책망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잡으러 온 무리들을 책망하십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공공연하게 가르치셨으므로 그런 때에 잡으려 했다면 얼마든지 쉽게 잡을 수 있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소란스럽게 많은 무리들이 밤중에 몰려오고 검과 몽치를 들고 꼭 강도를 잡는 것 같이 하느냐고 그들의 부당한 처사를 책망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일 하나 하나가 또한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께서 잡히신 것이 가룟 유다나 많은 무리들 때문도 아니요, 그들의 검과 몽치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와 계획에 따라 이뤄지고 있음을 재확인하심을 보게 됩니다.

 

[4]네 번째로 제자들의 도망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56절에 보니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제자들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칼을 가지고 주님을 호위하려 했던 제자까지도 도망쳤음을 보게됩니다. 무슨 능력을 발휘하여 체포하러 온 자들을 오히려 보기 좋게 꺼꾸러뜨릴 것으로 기대했던 제자들의 눈에는 주님께서 보통 사람보다도 더 미약하게 발버둥도 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잡히시는 장면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무력하실 바에는 칼을 써서라도 한번 버티어 봤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하게 하셨으니 제자들은 이래저래 맥이 빠져서 다 버리고 가 버린 것입니다. 막 14:51에 보면 청년 하나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기록해 주어 제자들이 모두 얼마나 신속하게 대피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매일 경건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구상을 했고 직접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자기 발로 찾아가서 은 30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후 유월절 식사 자리에도 참석을 했습니다. 오늘 소개된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던 대로 큰 무리들을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인도해 왔으며 누가 예수님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가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드리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것은 순전히 위선이요 위장된 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준 위선자의 초상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외식하는 자들 즉 위선자들이라고 강력하게 책망하시고 그들의 위선을 노출시키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금식도, 기도도, 구제도 사람의 눈을 중심 한 위선적 행동을 낱낱이 지적하시고 시정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제해 보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범죄와 위선에서,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졌던 위선의 생활에서 온전히 해방된 삶을 우리가 운영하려고 한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적인 공적 예배나 헌신에만 의존하는 신앙 생활이 아니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 없는 오직 하나님과의 사적 만남을 갖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며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내 하루의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경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혹시라도 죄를 계획하였다 하더라도 경건의 생활을 통해 범죄의 실행을 포기하고 또 어느 정도 위선적 생활이 우리 몸에 베어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양육되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드리는 긴 시간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드리는 경건의 시간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경건의 시간을 충실히 갖는 자 일수록 위선적이거나 범죄의 자리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진실된 회개가 따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 묻고 주님의 답에 따라 행동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칼로 치리이까?”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하겠고 물었으면 주님의 답을 듣고 행동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로 묻고 기도를 통해 답을 얻어내야 할 것이며 기도로 주님께 묻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아니한 기도만으로는 자기가 만든 답을 주님의 답으로 착각할 수 도 있는 것이며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아니한 기도는 때로는 마귀의 음성을 주님의 음성으로 혼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일 경건의 생활을 하는 자는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이 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일상 생활에서 갖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성질을 내고 싶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안된다고 하시지 않겠어요, 남을 미워하고 싶어서 하나님께 묻는다면 역시 안된다고 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답을 듣기 전에 칼을 쓴 베드로는 책망을 받았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연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한 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만 해 나간다면 결국 사람의 뜻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지론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알면서도 자기의 뜻에 따라 살므로 낙원이 광야로 바뀌었고 예수님은 광야에 사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므로 광야가 낙원으로 된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뜻대로 살 수도 있고 아버지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잘 사용하시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에 대한 응답에 따라 행동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는 충성은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가로막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육신의 목적을 중심 한 맹세도 열심도 역시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예배와 봉사의 생활도 열심만으로는 무의미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하나님과 사람들께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적은 일 하나라도 부모의 뜻을 묻고 행동에 옮기는 모범 된 자녀와 같이 우리들도 매일 매일 경건의 생활 즉 큐티 생활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므로 성도로서의 경건을 유지하고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에 옮기는 충성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