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 – 마태복음 26:57-68

오늘 설교 제목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다함께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 오늘 소개된 본문은 주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신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사회가 썩을 대로 썩어서 종교 지도자들의 권익을 위해 모든 불법을 동원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한 예로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확고한 위치가 불안해지자 죄 없으신 예수님을 어떻게든지 죽여 버리려 불법으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인들을 찾고 불법으로 사형의 죄목을 뒤집어씌운 사실을 소개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의 이런 불법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그 중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셨으나 그 수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입을 벌리시지 않으시고 입을 다무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또한 입을 벌리시므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결과가 되더라도 입을 벌리셔야 할 경우에는 입을 벌리셨던 주님의 모습을 소개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자기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남을 위해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경우에는 꼭 다물고 또한 자기에게 손해가 오는 경우에라도 남을 위해 입을 벌려야 할 경우에는 입을 벌리는 용기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어 주님께서 영광을 차지하심같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광을 차지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묵비권을 행사하신 예수님(57,59-63)

[2]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신 예수님(64-68)

[3]베드로의 갈등(58) 입니다.

 

[1]맨 먼저 묵비권을 행사하신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이 있은 직후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무리들에 의해 밤에 잡히신 주님께서는 그 다음 날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시게 되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크게 두 단계의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첫 단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이뤄진 유대 공회에서의 재판이고 두 번째 단계는 로마 총독 앞에서의 재판입니다. 유대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으므로 유대 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한 자로 결정이 되면 로마 총독에게 넘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 공회에서 받게 되는 심문의 일부를 소개해 주고 있는데 57 절에 보니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 18:12에 보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되어 있어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기 전에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 예비 심문을 받았음을 보게 됩니다. 57절에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고 되어 있는 것은 유대 산헤드린 즉 유대 공회가 비공식으로 소집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59절에 보면 공회가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즉 공식 재판에서는 기소된 죄를 가지고 유죄인지? 혹은 무죄인지? 판결해야 할 터인데 죽이려고 미리 가두어 놓고 그 다음 죽일 죄목을 찾고 또 거짓 증인들을 구해 내기 위해 비공식 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0절에 보면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왔다고 했습니다. 증인들이 아무리 많이 와도 말이 각각 다르면 의미가 없고 최소한 두 세 사람이 말이 일치를 이룰 수 있을 때에 증인으로 채택되므로 처음에 많은 증인들이 왔으나 쓸모가 없었고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일치된 증거를 제시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무엇을 고발했나요? 그들이 고발하기를 주님께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짓겠다고 한 줄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주님께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사신다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고발을 접수한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 이 사람들의 고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으나 예수님께서 잠잠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수난을 감당하기로 결단을 내렸고 이 길이 아버지의 길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죽이기 위해 잡아오고 또 죽이기 위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묵비권을 행사하신 사실은 사 53:7의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라는 예언을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 두 증인을 통해서도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내놓을 만한 죄목이 되지 못함을 알고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목으로 뒤집어씌우기 위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유대 율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몇 개 있는데 고의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죽이려고 거짓 증언을 하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나 간음죄 같은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거나 본인이 유대인들이 대대로 기다려 오던 메시야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한 증거가 있음으로 사형에 해당한 죄를 지었다고 로마 총독에게 죄목을 적어 보내기에 충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를 잘 아는 대제사장은 결정적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대 재판의 규례를 소개하므로 유대 지도자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지를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헤드린 법에는 범죄자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하고 해지기 전에 끝마치게 되어 있으며 만일 선고가 무죄이면 심문한 첫 날에도 무죄는 선고할 수 있으나 유죄인 경우는 다음 날에 선고하게 되어 있어 재판이 최소한 2일이 걸려야 하므로 안식일이나 절기 전 날에는 재판을 시작하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즉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랍비들의 구전 율법이 있음에도, 이들은 죄목도 없고 구속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를 했으며, 변호인도 없이 심문을 하였고, 또 공식적인 공회의 장소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하였고, 밤에 심문과 사형 선언을 했으며 하루에 다 끝을 냈으며 죄목도 없이 일단 구속해 놓고 죽이기 위해 죽일 만한 죄목을 찾되 심문을 하면서 말의 실수를 통해 죄목을 찾으려고 심문을 했던 것입니다. 더욱더 이들은 거짓 증인을 찾으려 했으므로 오히려 자기네들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규정을 다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2]두 번째로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고 대답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므로 사형 죄에 해당되는 것임을 잘 아실 뿐 아니라 지금 주님의 죄목을 궁색한 방법으로 찾고 있는 재판관들이 기대하고 있는 대답임을 잘 아시고 계셨겠지만 본인이 메시야이심을 당당하게 선포하시는 기회로 삼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으니 대답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고 대답하심으로 메시야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죽일 죄목을 궁색하게 찾으려 애쓰던 유대 지도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세계가 십자가로 끝나지 아니하고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선포하심으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심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모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뿐 아니라 모든 불법자들을 심판하실 심판자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심으로 공회 회원들을 격분께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답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왜? 정면 돌파를 하셨을까요?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완전히 끝나 버리는 것으로 알았지만 십자가의 처참한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뒤에는 보좌의 우편에 앉는 영광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65절을 보면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을 당했을 때 또는 의로운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행해진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동으로 유대 랍비들은 옷 찢는 부분과 길이 등이 세밀히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옷을 찢은 대제사장은 공회 회원들에게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필요로 하겠느냐 우리가 모두 그가 참람한 말을 들었으니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뇨”라고 하니 공회원들이 말하기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응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사형을 받아 마땅할 자라고 기소할 죄목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죄목을 늦게야 찾아낸 것입니다. 레위기 24:16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칠 것이라. 죽일지니라”고 되어 있어 하나님을 모독하면 신성 모독 죄로 유대법으로는 사형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사형에 대한 최후 결정은 로마 총독이 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형 죄목을 확보한 이들은 미움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67절에 보면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렸다고 했습니다. 또 68절과 막 14:65 을 보면 주님의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으로 주님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어 보라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조롱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에 대답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임을 잘 아시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행동은 사 50:6인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예언을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돈 없고 권세 없고 초라한 사람이 메시야라니 조롱 당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조롱을 받고도 대꾸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더욱 그렇게 했겠지요.

 

[3]세 번째로 베드로의 갈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58절에 보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자였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던 자이며 변화 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하시는 주님을 목격한 자이며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고, 주님을 잡으러 온 자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떨어뜨렸던 용맹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세우시지 않고 또 힘없이 잡히시는 것을 보고 도망을 쳤었는데 마음에 갈등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의 충성과 자기 목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하던 발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으리라고 봅니다. 그에게는 또 어떤 미련도 있고 또 주님께서 어떻게 되실 것인지를 알고자 하여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왜? 멀찍이 입니까? 목숨이 무서워서 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따라간 베드로의 용기도 인정해 줘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아예 나타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종들이 불을 피워 놓고 있는 대서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상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입을 다무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라면 또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운 대로 행동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입을 다무시는 주님의 모습을 소개받았습니다. 심문을 받는 장소, 시간, 방법등 모든 것이 불법이었음을 주님께서는 잘 아셨을 것입니다. 또 거짓 증거를 조작하려는 종교 지도자나 무리들의 조잡하고 말도 안돼는 고발을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삼일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뜻도 이해 못하는 영적 무지자들의 고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변명할 기회를 준다 해도 입을 다무셨습니다.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뺨을 치며 조롱하는 자들의 모든 무례한 행동도 다 참으셨습니다.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네가 참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추어 보라는 비아냥거리는 도전에도 전연 대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입을 다무셨다고 생각되십니까? 주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사소한 세상일은 크게 상관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면 피해를 받은 일에 강력하게 대꾸하셨겠지만 주님은 겟세마네라는 사선을 넘어 예비된 나라가 그분의 목표이므로 좀 얻어맞고, 조롱을 받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만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하게 있기 때문에 그 목표대로 실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입을 다무셔야 한 것입니다. 즉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입을 벌리셨겠지만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입을 다무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 모두에게 입을 다물라는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입어야 할 유니폼을 다 입으시라는 교훈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또 사회에서 무엇 때문에 입을 벌리고 있습니까? 아주 사소한 조롱, 사소한 뺨맞음, 사소한 침 뱉음을 당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또 억울한 누명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실 때에 입을 다무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따라 하셔야 합니다. 만일 입을 다물지 못한다면 제자로서 걸어 온 길이 내게 무익함을 알고 입을 다무셔야 합니다. 신앙 경력도 직분도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입을 다무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비록 사람에게는 이런 천대를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환대를 받기 위해서 입을 다무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대접다운 대접을 받겠다고 입을 벌리게 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도 만족할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큰 손해를 보고야 말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자신을 위하여 또 남을 위하여 입을 다무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남의 유익을 위해 내가 참고 입을 다무시는 품위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입을 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입을 벌리시면 십자가를 지실 줄 알면서도 입을 벌리셨습니다. 입을 벌리시므로 자기는 죽지만 만인을 살리게 되는 사실을 확신할 때에 두려움 없이 입을 벌리셨음을 본문을 통해 전달받았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왜?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며 왜? 입을 다물게 됩니까? 내가 살아야겠다는 아우성이 아닐까요? 반대로 내게 손해가 날것 같으면 또 입을 다물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우리에게 손해가 난다 하더라도 남을 살리는 일이라면 내 입을 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손해가 나지 않는 선에서만 입을 벌리는 것은 주님의 제자답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될 기미를 알아차렸다면 운영자들은 매상에 좀 손해가 나더라도 손님들에게 대피하라는 입을 벌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도 남을 위해서는 입을 다무셨으며 또한 자기에게 죽음이 예고되어도 입을 벌려야 할 때에는 입을 벌리신 확고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인을 살리셨고 또한 본인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영광을 차지하신 것입니다.

입을 벌려야 할 때에 벌리지 않은 삼풍백화점 운영진은 법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입을 벌려야 할 때에 입을 벌리지 않은 주님의 제자들도 책임 회피의 죄를 추궁 당하게 될 줄 압니다. 우리가 무슨 입을 벌려야 할까요? 세상이 무너지는 종말이 왔음을 백화점 물건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에게 방송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무너지면 세상 백화점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는 다 깔려 죽을 것이므로 빨리 세상 백화점에서 나와 예수님께 피난해야 한다고 입을 벌려야 합니다. 또 조금도 미움이 없는 오직 사랑으로 이웃의 죄와 잘못을 권면하는 입을 벌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일에는 많이 너그러워야 하겠으나 믿음 생활에 대해서는 깐깐하게 이웃에게 참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가지 않은 자녀를 보고도 참견하지 않는 부모는 입을 벌리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영혼을 위해 입을 벌리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입을 벌려야 하겠습니다. 또 어떤 입을 벌려야 할까요? 내 잘못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고 입을 벌려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해 달라는 입을 벌리지 못하는 자에게 심판시에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작은 일이나 큰 일에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다는 입을 벌릴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감사에 입을 다문 자는 기쁨이 못 오도록 문을 잠근 자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입은 다물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입을 벌리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입어야 할 유니폼은 입을 다무는 것이며 또한 입을 벌리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야 할지 입을 다물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까? 주님께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물 때에는 꼭 다물고 끝까지 다물며 입을 벌려야 할 때에는 크게 벌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