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상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해야 하는 경우를 당한다고 한다면 본인에게 큰 충격이요 비극적인 일이며 또 무서운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보다 더 열심을 내어 일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평소에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책하며 곧 자기의 생활을 정리하고 빠른 시일 안에 주님을 위해 못 다한 충성을 바치겠다고 늘 다짐해 오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더 충성은커녕 모른다고 부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시몬 베드로가 짧은 시간 안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제자가 생명의 위협 앞에 자기의 체면도, 주님의 체면도 완전히 몰수하고 주님을 전연 모른다고 딱 잡아 땐 베드로를 소개해 주고 있으며, 반면에 이렇게 까지 철저히 주님을 버리고 있는 베드로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소개해 주며, 또 자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과 맞부딪친 후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애통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본문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듯 약한 육신을 입은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임을 깨닫고 행여 라도 주를 부인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미리 자신을 늘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으며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애통하게 될 때에는 무한정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4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69-70)
[2]두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71-72)
[3]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73-74)
[4]베드로의 회개(75) 입니다.
[1]맨 먼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잡혀가시는 모습을 보고 낙망을 하고 또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서 도망치다가 잡혀가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되실 지가 궁금하여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의 뒤를 좇아간 베드로의 모습을 지난주에 소개받았습니다. 자기 목숨도 아깝고 주님께의 충성심도 아까워 둘 다 버릴 수 없는 베드로가 어정쩡한 태도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소개되는 본문의 결과만을 보면 주님께의 충성보다는 자기의 목숨을 선택하므로 배신한 제자가 되고 맙니다. 요한 복음 18:15이하를 보면 예수님을 뒤 좇아간 제자가 베드로 말고 다른 제자가 하나 더 있었음을 보게 되는데 이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자라 대제사장의 집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고 또한 생명에 위협도 전연 없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이 제자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지만 베드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었는데 이 다른 제자가 와서 문 지키는 여자 종에게 말해서 대제사장의 뜰에 베드로가 들어가도록 도와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지키던 여종이 베드로더러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기록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이 여자 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복음 본문에 ‘비자’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비자라는 단어는 여자 종이라는 말입니다. 즉 베드로가 여자 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3년간을 주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주님의 제자요 제자 중 제자였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렸던 자였으며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장본인이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충성을 다짐했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으니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적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며 그 여종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 때었음을 보게 됩니다.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던 그 용기가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그는 두려워 주님을 버리고 자기의 목숨을 택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치심이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영적인 눈이 밝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의 충성보다는 주님을 부인할 자리에 이미 서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만일 베드로가 주님께 충성을 할 뜻이 있었다면 주님을 따라갈 때에 멀찍이가 아니라 바짝 붙어서 따라갔어야 할 것이며 또 종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있는 자리에서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불을 쪼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심문하는 자리 가까이 가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주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딱 잡아 땔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두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앞문까지 물러나 있었는데 다른 여종이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니 베드로가 맹세하고 부인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여종은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했고 두 번째의 여종은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나사렛 예수’나 ‘갈릴 사람 예수’라는 칭호가 단순히 주님께서 어느 마을에서 오셨는지를 구별하는 정도같이 보이나 실은 요한 복음 1:46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 함같이 문화 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우월감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시골뜨기라는 멸시가 석인 호칭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를 얕잡아 보고 함부로 말 하드라도 제자로서의 품위를 지킴으로 제자의 위치가 유지될 수 있었을 터인데 베드로는 이런 여종들 앞에서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부인할 때에는 자기는 예수를 전연 모른다고 부인을 했는데 이번 두 번째는 맹세를 하고 주님을 알지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맹세를 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을 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늘 ‘주님’이라고 불렀던 예수님을 여종 앞에 ‘그 사람’이라고 낮추는 말씨까지 서슴지 않고 표현하므로 자기가 살려고 주님을 공개적으로 낮추어 부르기까지 한 것을 보게 됩니다.
[3]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73절에 보면 ‘조금 후에’라고 되어 있으나 눅 22:59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 되어 있어 두 번째의 부인을 하고 한 시간쯤 있다가 이번에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고 되어 있는데 눅 22:59에는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맹세도 했지만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이 볼 때에는 ‘진실로’ 또는 ‘장담하여’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 복음 본문에서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정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까?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갈릴리 지방 사투리가 바로 증명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의 억양은 예루살렘 지역 사람들과 판이하게 달랐겠지요. 사투리, 또는 억양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말투로 보아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한 당이라고 판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북에서나 경상도 또는 전라도에서 막 온 사람의 말하는 것을 듣고 어디서 왔는지 너무 쉽게 알아맞힐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 맞추었는데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거짓 말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26에 보면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잘랐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했던 말고의 일가 친척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았다’고 목격자의 증언까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정도 됐으면 베드로는 항복 할만도 한데 그래도 살아보려고 이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말은 내가 거짓 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말을 했겠지요. 베드로의 거짓말의 색깔이 점점 짙어지고 있지요. 왜? 그럴까요? 한 번 거짓 말을 뱉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거짓 맹세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맹세를 잘하는 사람, 즉 무슨 말을 할 때에 수식어를 많이 붙이는 자들의 말이 상당히 거짓 말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거짓 말을 하나도 안 붙이고 말한다면 어떻다든지, 내가 거짓말을 하면 무엇이라는 등 꼭 말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에 이 사람은 상당히 신빙성이 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베드로는 어떤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수식어가 붙으면 붙을 수록 새 빨간 거짓 말, 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7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악독한 거짓말을 세 번이나 연속으로 하고 나니 닭이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네 번째로 베드로의 회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75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나니 닭이 울었는데 그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눅 22:61-62에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고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고 주를 부인하되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면서도 그의 양심의 눈은 주를 바라보았는데 주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사랑의 시선은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성격이 급하고 어찌 보면 좀 경솔하게 보이는 베드로는 길게 잡아야 24시간 안에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도하고, 주님을 잡으러 온 자 중에 있는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하고, 주님을 세 번이나 확실하게 모른다고 부인을 했으며 또 부인하자마자 통곡하는 회개가 이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에게는 변화 무쌍한 하루였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하루의 모습인데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연약한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끔찍한 죄인 베드로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바라보신 결과 베드로의 통곡을 폭발시켰고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유대에 또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한 대표적인 인물로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네로에 의해 순교 당한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함 같이 우리들은 결과적으로 가서 주님을 부인하게 될 수 있는 그런 자리에는 아예 서 있거나 앉아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연탄을 가까이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검정이 묻게 되겠지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술집에 가까이하면 술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주님을 부인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뒤를 멀찍이 따라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예수와 상관없는 종들과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예수 믿는 것을 중도에 그만 두고 싶거나 또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자가 아무도 계시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거나 바깥뜰에 앉아 있는 버릇을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믿음을 버리게 되고 때로는 주님을 부인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활이 주님의 뒤에 멀찍이 따라가는 것이며 또 바깥마당에 앉아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주님 서신 곳에 나도 서겠다고 야무지게 주님을 따라다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느긋한 신앙 자세가 바로 멀찍이 뒤따라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어떠한 일이 좀 있다고 쉽게 교회 집회를 게을리 하거나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자나 교회 일에 소극적인 자가 바로 멀찍이 뒤따라가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일에는 혹시 뒤 따라 가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하는 일에는 주님의 뒤를 멀찍이 뒤따라가다가는 언젠가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주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느끼십니까?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어디든지 따라가셔야 합니다. 헛 눈을 파시지 말고 늘 우리에게 눈을 떼시지 않으시는 주님의 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주님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맞부딪칠 때에 올바른 신앙 생활이 지속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자, 주님을 바짝 뒤따라가는 자, 주님을 늘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어떤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예할 뿐 아니라 또한 개인적으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을 매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도의 사투리를 말하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투를 보고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요 갈릴리 사람임을 장담할 정도로 알아맞힌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지방 사투리를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투리에 의해 그 사람이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알듯이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쓰는 말씨로 우리가 성도인 것을 남들이 쉽게 판명할 수 있도록 성도의 사투리를 말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자기의 고향을 숨기기 위해 자기 지방 사투리를 숨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들은 우리가 성도인 것을 남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성도들만이 말하는 성도들의 사투리를 말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도들의 사투리일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거짓 말을 합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거짓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거짓 말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언어는 거짓 말일지 모르나 성도들의 언어는 참말입니다. 성도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누가 나를 무시하고 푸대접을 하더라도 정직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없으면서도 있는 척해서도 아니되며 있으면서도 없는 척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거짓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 성도의 사투리는 온화한 말을 하고 남에게 친절한 말씨를 쓰는 것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만 보고도 당신은 틀림없이 믿음을 가진 성도이군요라고 알아볼 수 있게 말입니다. 되도록 품위 있는 단어를 잘 골라 말하도록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잘되어 있나를 스스로 테스트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화가 많이 나 있을 때에, 기분이 퍽 나빠 있을 때에 자기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아름다운 단어인지? 자기의 말투가 온화하고 친절한 언어인지? 를 점검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성도의 사투리를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또 성도의 사투리는 칭찬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투리는 어떤 것인가요 남을 쉽게 헐뜯는 것인데 성도의 사투리는 남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또 성도의 사투리는 긍정적인 말입니다. 세상의 사투리는 입만 벌렸다고 하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성도의 사투리를 말하시어 여러분을 누가 보던지 좋은 신앙을 가진 자라고 쉽게 판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나 인사를 하다가 제가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라고 하니 정말 반가와 하시고 참 좋은 교회로 알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알고 있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모르지만 자기 교회에 나오는 어떤 여 성도가 있었는데 그 여성도께서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행동 거지 또 말하는 사투리를 통해 아름다운 성도라고 또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연 참된 교회라고 남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성도의 사투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지방 말씨인 이북 말씨나 경상도 또는 전라도 사투리를 서울 말씨로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무슨 사투리를 써서 말하더라도 성도들의 언어인 정직한 말, 온화하고 친절한 말, 칭찬과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성도들의 사투리라고 말한 것이며 이런 사투리를 쓰게 될 때에 세상 사투리를 쓰는 자들이 자기들과 다른 말을 쓰므로 우리가 성도인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자리에 앉지 말며 성도의 사투리를 말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