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의 종말 – 마태복음 27:1-10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에 따라 되어진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사건에는 미혹된 세 부류의 범죄자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범죄요 두 번째는 불의한 체포와 심문의 과정을 통해 죄 없으신 주님을 사형에 해당한 범죄자로 정죄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이며 세 번째는 사형을 집행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범죄입니다. 분명히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죄가 없으신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이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유대 산헤드린의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로마 총독에게 이송된 사실이 소개되며, 사형이 확정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 본 가룟 유다가 양심에 심한 죄책감을 갖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찾아온 유다의 모습과 또 찾아온 유다에 대응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3년을 따라 다녔던 가룟 유다도 자기 중심으로,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따라다녔으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불법을 자행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한 사실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자기 중심적이요 이기적인 삶의 결과는 자기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삶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중심한 삶을 사시어 내 삶도 풍성하고 하나님께도 영광 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정죄 받는 예수님(1-2)

[2]유다의 잘못된 회개(3-5)

[3]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인본주의적 태도(6-10) 입니다.

 

[1]맨 먼저 정죄 받는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법에 의해 죄인의 심문은 해 있을 때에 시작하여 해 지기 전에 심문을 마쳐야 함에도 이들은 밤에 시작하여 밤 사이에 이미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해 두었다가 자기들의 재판이 합법이었음을 가장하기 위해 공식적인 산헤드린 모임은 아침 일찍, 아마 해가 뜨자 마자 소집하여 ‘신성 모독죄’로 죄목을 확정하고 주님을 결박해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큰 죄인이나 된 것 같이 손을 뒤로 묶여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넘겨진 것입니다.

만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주님을 죄가 없으신 자로 인정하고 쉽게 풀어 주었을 것이나 주님께서는 바야흐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였는지 빌라도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잔인하고 매우 외골수의 사람이며 그는 성전에 고르반 된 예물 중에서 취하여 수도 가설비로 유용했으며 이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 군대들을 파견해서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주후 26년에 총독에 임명된 그는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3년 후인 주후 36년에 황제에게 소환되어 남 프랑스 지방에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여야 할 특별한 이유도 찾지 못했으면서도 불의한 세력의 기소를 받아 드려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최종 사형 집행자가 되었으므로 가룟 유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의 피를 물으시며 압제 당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로 유다의 잘못된 회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흠집이 있어 팔기로 했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요사이 말로 자기는 왕의 실세가 되어 그 실세를 이용해서 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엄청난 부를 누리겠다는 물질적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없음을 알아차린 그가 낙망하여 저지른 범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너무 겸손하고 세상 욕심이 전연 없으며 너무 정직하고 너무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께서 잡히시는 장면부터 심문 받으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못 당할 야만적인 수모까지 당하신다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흉악범같이 두 손이 뒤로 묶여 끌려가는 모습이나 주먹으로 맞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며 눈을 가리고 조롱하는 그들에게 단 한마디도 대꾸하시지 않고 다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종교 지도자들이 너무 한다는 생각도 가졌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산헤드린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뉘우쳤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그가 받았던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적은 돈이나마 탐나서 그런 짓을 했으니 그 돈을 돌려주므로 자기의 잘못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되돌려 줄뿐 아니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사형을 의결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주님은 무죄임을 증언을 했고 그런 분을 판 자기는 죄를 범했다고 통분함을 보게 됩니다.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말은 죄가 없는 자의 목숨을 팔아 넘겼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으로는 돈도 돌려주고 주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라고 함으로 주님께서 묶임에서 풀려나고 사형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행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가룟 유다의 심경의 변화를 전해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4절에 보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 공회원들의 책임이라면 옳고 그른 것을 재판하여 무죄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 주는 일임에도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 없는 자를 죽이기로 확정한 그들은 가룟 유다가 분명히 ‘죄 없는 분’이라고 증언을 했음에도 그 문제가 자기들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회피했으며 예수님을 판 죄책감으로 심히 고통 당하는 유다에게 “네가 저질렀으니 네가 모든 고통을 당하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이젠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마음에 밀려온 번민과 고통의 물결을 해결 받기 위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 온 가룟 유다는 조금도 해결 받지 못하고 오히려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한 무거운 짐까지 또 지게 된 그는 가지고 왔던 은 30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되돌아와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행 1:18에 보면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어 종합한다면 유다가 목매어 죽었으나 줄이 끊어져 땅에 떨어졌고 마치 땅에 뾰쪽한 바위 같은 것이 있었는지 배가 터지고 창자가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의 범죄를 뉘우치고 퍽 고민하였으며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본인이 행동에 옮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회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에 미치지 못한 잘못된 회개임을 지적 받게 됩니다. 첫째는 자기의 범죄는 주님께 저지른 범죄이므로 주님께 찾아와 자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고 사함을 받았어야 할 터인데 종교 지도자들에게 찾아간 잘못입니다. 아직까지 자기가 팔아 넘긴 사실을 주님께서 모르고 계실지 모르므로 돈을 돌려주고 이 번 사건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더 지적한다면 자살해 버린 사건입니다. 자살이란 죄를 사함 받는 방법이 아니라 죄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모른 다고 배신을 했으나 진심으로 통곡하고 그의 심령이 회복되어 본래의 제자의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지 죽어 버린 것은 순전히 자기 중심적인 죄의 청산 방법일 뿐인 것입니다.

 

[3]세 번째로 종교 지도자들의 인본주의적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에 보니 가룟 유다가 성소에 던지고 간 은 30을 대제사장들이 거두어 이 것은 피 값 즉 한 목숨의 값으로 계산된 돈이므로 율법에 따라 그 더러운 돈을 성전 기금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신명기 23:18에 보면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하였음에 근거하여 부정하게 벌어 드린 돈은 하나님께 드려져서는 아니 된다는 율법에 따라 가룟 유다가 가져 온 돈은 사람을 죽이는 흉악한 돈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인본주의 적 신앙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은 30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이 것은 어떤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전 공금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성전 공금이 어찌 부당한 일에 사용될 수 있겠으며 부당한 목적으로 유출된 돈이 다시 성전 공금으로 회수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부정한 일로 판단을 하고 있다면 자기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가룟 유다와 함께 공모한 모든 짓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법을 거역하며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율법을 위반한 자들을 처벌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 행동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7절에 보면 그들이 의논하여 그 돈으로 옹기를 굽는 자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기로 했다고 했으며 오늘날도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는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가난한 자들이나 또는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여행 왔다가 죽은 나그네들을 위한 공동 묘지가 필요했는데 마침 그 돈으로 무료 공동 묘지를 사서 사회에 헌납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고 또 연고가 없는 자들이 묻힐 수 있는 공동 묘지를 구입한 것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일관성이 없음이 지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를 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까지 찾는 자들이 자선 사업을 한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는 일입니다. 범죄자의 죄가 자선 사업을 하므로 용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회개하는 길뿐인 것입니다. 성전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가난한 자의 돈을 착취하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려고 이런 아이디어까지 내놓는 저들의 모순성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9절, 10절에 보면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 값을 준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에 미리 말씀하신 예언이 이뤄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팔리신 그 몸값 은 30으로 옹기 그릇을 구웠던 장소를 구입하게 될 것까지 구약 예언에 미리 정하신 바였는데 결과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이 이를 구입함으로 그 예언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슥 11:13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는 말씀이 있어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스가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 해야 더 타당하게 보이나 렘 18:2; 19:1,2; 또 32:8-15에도 근접한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어떤 선지자가 하신 말씀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예언서에 기록되어진 말씀대로 이뤄졌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으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었는데 이와 정 반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의 방식이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회개를 했으나 용서받지 못하는 자기 방식의 회개를 했는데 이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한 삶이란 내 인생의 목적을 내 일신상의 이익만 챙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인가? 아니면 오직 나 자신 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인가? 를 진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이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삶인가 아니면 이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삶의 방식 하나 하나가 내 방식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방식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찬송, 기도, 헌금, 만찬이 하나님의 방식인가 아니면 내 방식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고 내가 드리는 구제, 봉사, 헌신이 하나님의 방식인지를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하나님의 방식 대신 인간의 방식이 동원되는 것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라도 안되며 큰 교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라도 안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일에도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많이 얻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어야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일은 다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큰 자선 사업도 그렇고, 교육 사업도, 선교 사업도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나타난 열매를 보고 그 동안의 과정이나 원인에 대해서는 혹시라도 잘못이 있다 해도 얼마든지 묵과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의 동기나 과정이나 또한 결과가 다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기 중심으로 된 것인지에 따라 평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큰 헌금도, 큰 교회도, 큰 선교 사업도 아무 것도 아니되 오직 그 것들의 동기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과 연관을 시켜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전제하여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내 욕심에 따라 하거나 내 생각 중심으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이유가 꼭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라는 이유를 대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그 사업에 손을 대셨습니까? 아니 왜? 그 사업을 그만 두셨습니까? 둘 다 주님 때문이라는 답이 주어져야 합니다. 왜?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까? 아니 왜? 입을 벌리십니까? 주님 때문에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주님 때문에요 지금 죽는 것도 주님 때문이라는 이유가 따라다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손해를 보셨냐고 누가 물을 때에 주님 때문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한 생활이란 하나님의 스케듈에 내 스케듈을 맞추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며 자기 중심의 생활이란 내 스케쥴때문에 하나님의 스케쥴을 밀쳐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스케쥴에 맞추어 내 스케쥴을 짜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스케쥴과 상관없이 내 스케쥴을 짜십니까?

예수님을 팔고 임시로 이익을 볼 수 있으나 그런 생의 마지막은 허탈이고 불행인 것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예수님 때문에 조롱 당한 삶의 결과는 큰상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못박고 조롱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워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계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결과적으로 손해보도록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행여라도 눈앞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제쳐놓는 실수를 저지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의 양식으로 나를 먹이실 분이시요 우리를 그의 품에 보호하실 분이시며, 하나님은 내가 일시적으로는 지게 하시나 영원히 이기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침에도 나의 하나님이시요 저녁에도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하나님은 내가 성공할 때에도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실패할 때에도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늘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시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방식대로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