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재판 – 마태복음 27:11-25

오늘 주신 본문은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인간 심판관 앞에서 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세상 끝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분인줄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흥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그들이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밝지만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한 저들이기 때문에 그런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 살인 강도 바라바는 석방시키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백성들이나 또 백성들에게 그렇게 요구하도록 선동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 그렇게 요구한다고 다수의 눈치를 보는 빌라도, 이들 모두는 자기들이 행한 대로 이젠 심판 주 예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악한 일인지도 모르는 저들, 또 선과 악도 구별 못하고 악한 일에 합세한 저들을 보면서 우리는 올바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생은 다시 기회가 없는 단 한번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 선과 악을 바로 구별하고 악은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총독 빌라도의 심문(11-14)

[2]바라바를 택한 백성들(15-23)

[3]빌라도의 책임 회피(24-25) 입니다.

 

[1]맨 먼저 총독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총독이란 식민지의 정치, 경제, 군사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최고 행정 관리자로서 황제가 임명하는 직책인데 예수님 당시에 빌라도가 유대, 사마리아 또 이두매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가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 총독으로 재직하였는데 이 빌라도는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피 통치 국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멸하였고 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빌라도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빌라도가 부임하면서 부임할 시기부터 원망들을 만한 일을 두 가지 했는데 하나는 그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러 오면서 로마 군기를 세우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에 다른 통치자들은 이를 삼가했는데 빌라도는 이를 행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는 것만 해도 택한 민족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심히 상한데 로마의 군기를 세우고 입성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에게나 백성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수도 공사를 하기 위해 성전에 바쳐진 재정으로 수도 공사를 하여 이에 항거한 많은 백성들을 살상하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지나치게 종교의 관행만을 앞세워 고집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싫지만 자신들에게는 사형 결정권이나 사형 집행권이 없고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으므로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 죄를 지었다고 고소해온 것입니다.

이 재판은 총독 관저에 행해지고 있으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고소를 하게 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수많은 죄목을 들어 고소를 하고 있지만 총독으로서는 종교적인 이념 문제로 사형을 시킬 수는 없고 사형에 해당하려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범죄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 죄는 유대의 종교적인 문제이지 총독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로도 고발을 했지만 되도록 총독인 빌라도에게 호소력이 있는 죄목을 들어 고소한 것을 보게 됩니다. 눅 23: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으며, 백성을 소란케 한 자라고 고소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런 고발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백성을 미혹하거나 소동케 했으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했습니까?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소와 함께 많은 고소를 해 왔지만 빌라도에게 조금 관심 있었던 것은 ‘왕’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나 봅니다. 혹시나 황제를 거역하고 이 땅의 새로운 왕이라고 했다면 당연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총독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으니 그 물음에 주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의 원 뜻은 ‘네가 말했다’ 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왕이심을 분명히 답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6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심을 덧붙이셨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답변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죄목으로 고소를 하되 주님께서는 그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변명도 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예수님께 빌라도가 말하기를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를 제시하여 고소하는데 듣지도 못하느냐?’고 무엇인가를 대답하므로 주님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를 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원고의 고소 내용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지요. 주님께서 아무런 답변도 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악랄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꾸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지셔야 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고히 믿고 있으므로 살기 위해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전연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런 대답을 하시지 않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요 메시야로서의 품위를 유지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2]두 번째는 바라바를 택한 백성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많은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했으나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만한 죄가 없음을 알았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고 해 순전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높아진 인기와 능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해지므로 일종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일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정치인 빌라도가 무죄한 예수님을 그대로 석방할 수 없었던 것은 고소해 온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흥분한 백성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풀어 주되 유대인들 스스로가 풀어 준 결과가 되어 예수님께도 좋고 유대인들도 좋은 한 방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 방안이란 유월절 절기에는 죄수를 풀어 주는 전례가 있으므로 이런 이유를 대서 예수님을 풀어 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 세상을 시끄럽게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흉악범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시키는 것을 원하는지 유대인들이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선택권을 유대인들에게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능력을 행한 훌륭한 선지자이셨고 바라바는 강도요 살인자였으므로 빌라도의 생각에는 물어 보나 마나 예수님을 살려 달라고 유대인들이 요구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풀어 주기를 권하게 됩니다. 성경이 아닌 외경 ‘니고데모의 복음’에 보면 빌라도의 아내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로 그 당시에 그리스에나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녀를 성자로 높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고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꿈을 통해 예수님이 무죄이니 그에게 정죄하지 말도록 충고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빌라도의 부인이 빌라도에게 자기 꿈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죽이고 강도 바라바를 살려 달라는 요구를 하도록 한 사실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냐” 하니 “바라바로소이다”라고 백성들이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큰 충격을 받았을 줄 압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택할 줄 알았었는데 백성들이 남을 살리는 의인 예수님은 죽이고 남을 죽이는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궁리라도 찾아보려고 했는지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하니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생각해 낸 궁리가 전연 빗나갔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충고한 것까지도 받아 드리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퍽 당황했을 것입니다. 눅 23:22에 보면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했으며 마태복음 본문에는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이 더욱 소리질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답했음을 보게 됩니다.

바라바라는 뜻은 아바의 아들, 즉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와 대조적인 인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는 악한 자 마귀의 아들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군중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고 악의 아들은 살려줘야 한다고 손을 든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세 번째로 빌라도의 책임 회피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총독인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통치 지역에서 어떤 사건이라도 일어나거나 또는 피 통치 지역 사람들로부터 황제에게 탄원서가 들어오는 일이 제일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므로 자기가 총독 직분을 유지하는데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위치에 있는 빌라도는 군중들의 강력한 입장을 보고 예수님을 살리려 하는 그의 의도는 전연 불가능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다면 군중의 소요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그 이상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의지를 나타냄을 보게 됩니다. 24절에 보면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음을 보게 됩니다. 손을 씻은 사실은 신명기 21:6,7에 근거한 것으로 성중에서 살인 사건이 나면 그 성에 가까이 있는 장로들은 손을 씻으므로 자신은 무죄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빌라도도 유대에 오래 살다 보니 유대 풍습을 잘 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일에는 자신은 전연 죄나 책임이 없음을 증인들 앞에서 선언하기 위해 보여준 의식입니다.

이때에 군중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 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인 모든 죄는 유대인 자기들 스스로와 자기들의 후손들이 다 책임지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나라 속담이 있는데 그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 값을 자신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톡톡히 당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의 비참한 사건과 그후 나라 없이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야 했으며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유대인 600 만 명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참극을 맛보았음을 보게 됩니다. 재판관의 자리에 섰으면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여 죄 없는 자는 풀어 주고 악인은 벌해야 함에도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고 죄인은 풀어 준 빌라도의 직무 유기 죄는 아무리 여러 통의 물을 갔다가 손을 씻는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3년이 지나서 황제에게 소환되고 남 프랑스로 추방되어 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나 유대인들이 육체적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고 주님 재림시에 정식 재판을 받아 판결에 따라 영구적 죗값을 또 치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막 15:15에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눅 23:24에는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하기를 언도하고’라 하여 빌라도는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무리의 눈치를 보는 타협성 인물로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빌라도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떤 자였습니까? 자기의 직위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자도 죽게 한 살인자였으며 그런 끔찍한 죄를 짓고도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던 비겁하고 무책임한 자였습니다. 또 양심을 떠나서 대다수의 눈치에 따라 행동하는 기회 주의자였으며 자기에게 분명한 판단이 있었음에도 그 판단대로 집행하지 못한 무능하고 우유 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에게 꿈을 통해 전해 준 충고를 받지 못한 미래가 없는 불행한 현세 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빽을 가진 자들로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할 때에는 악은 악이라 말하고 선은 선이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는 자들이 모두 선을 악이라 한다고 자기도 그들의 말에 합세하는 불의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아니 내게 손해가 난다 하더라도 악은 악이라, 선은 선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서 우리 사회에 다수라는 폭력으로 거짓이 판을 칠 수 있는 분위기를 차단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약한 자를 압제하는 불의의 세력에 합세하여 불의에 동참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 세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불의한 판단을 내렸다면 하나님께서 끝 날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를 불의하다고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일반 사회 생활에서나 교회 생활에서도 다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비 성서적인 실천이 있음에도 다수가 그것을 원하므로 그대로 따른다거나 오히려 진리를 두고 비진리가 옳다는 거짓 판단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 비 진리는 비 진리, 또 성서적인 것은 성서적, 비 성서적인 것은 비 성서적으로 분명히 구분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비 성서적인 실천에서는 과감하게 빠져 나오거나 혹은 이를 시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빌라도가 저지른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서 심판 때에 이에 대해 주님 앞에서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선과 악도 구별 못한 죄입니다. 지도자들이 선동하는 대로 따르는 무책임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저주임에도 이것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벌린 실수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무책임하게 행동하거나 무책임하게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에는 절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이 하란 대로했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다는 식은 전연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내가 싸인한 것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살려 달라 하라고 시킨 대로했다 해도 주님 심판시에는 그렇게 시킨 대로 말했던 그 입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입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명히 알고 선과 악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모르면서 선이다 혹은 악이다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못박은 실수를 하듯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먼저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도자들이 이것이 성서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이렇게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비성서적이라면 그 책임은 선동한 지도자가 짓는 것이 아니라 속은 본인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행동하는 무책임한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바라바와 그리스도 예수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택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중들이 다 바라바를 택한다하더라도 그 군중 속에서 예수라고 소리칠 수 있는 확실한 신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예수를 죽인 모든 죄를 자기들과 자기 후손들에게 돌리라는 말의 실수 때문에 그 말 값으로 유대인들은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고난을 받았는데 우리들도 모든 말에 조심하여 내게 저주가 올 수 있는 말을 쉽게 뱉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게나 한 말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셨다가 그대로 말 값을 물으시고 말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던지, 차라리 죽어 버리라든지 그 이상의 저주스런 말을 쉽게 뱉게 되는데 혹시 이런 실수를 흥분해서 내 뱉었다면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대로 하나님께서 하실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선과 악을 바로 분간하고 선은 선이라 악은 악이라 분명히 손을 들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들이 될 뿐 아니라 다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진리는 진리로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한 용사들이 다 되셔야 하겠습니다. 또한 책임 질 수 없는 말을 쉽게 하여 결과적으로 크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에 재삼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만을 담대하게 선포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