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십자가 고난 – 마태복음 27:26-44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마구간에 초라하게 탄생하셨던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최악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채찍질했고, 군인들은 조롱했으며,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 또 심지어 십가가에 함께 못 박히는 강도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한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죄 없으신 분이 우리들의 죄 때문에 당할 수 없는 모든 수난을 당하셨음을 깨닫고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우리들의 귀한 생명을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 다짐대로 일평생 살아 나가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군인들에게 조롱 당하신 예수님(26-36)

[2]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 조롱 당하신 예수님(38-43)

[3]강도들에게 조롱 당하신 예수님(37,44) 입니다.

 

[1]맨 먼저 군인들에 의해 조롱 당하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의한 처형을 받으셨는데 이 십자가 처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적용치 않고 단지 이방 식민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한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 처형의 일반적 진행 과정은 죄수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야하며 형장까지 가는 길에 사형의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행인들에게 보게도 하며 또 백부장이 말을 타고 길을 인도하고 전령은 뒤따르며 죄수의 죄명을 외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가지를 돌아 형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긴다고 합니다. 로마법에는 죄수들을 벌거벗긴다고 하며 다만 유대의 산해드린 규정에는 허리 아래 부분을 가리게 했다고 합니다. 옷을 벗긴 다음 독한 술을 먹여 정신과 육체가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혹은 묶어 십자가를 반드시 세운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로 그대로 두어 서서히 죽게 한다고 하는데 건강한 남자는 3일이 경과해야 완전히 죽게 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 외상을 가함으로서 어떤 소생 가능성을 없애 버린다고 하며 외관상 죽은 것이 확실하면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죽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절차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데 26절에 보면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군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40에 하나 감한 채찍을 맞으셨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채찍이란 가죽 채찍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달아서 때리는 것으로 온몸이 패이고 찢어져 예수님은 채찍을 맞고 피를 많이 흘려 기진 맥진한 상태에 계셨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의 저택 뜰로 대려 가서 치욕스런 모든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다고 했습니다. 마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홍포라는 단어 대신 자색 옷이라 했는데 여기서의 자색 옷이란 왕이나 황제가 겉옷에 두르는 망토로 권위의 상징이며 주님께 이것을 입힌 것은 주님께서 유대의 왕이라 하셨다고 이것을 입혀서 조롱한 것입니다. 또 그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무엇이며 갈대는 무엇입니까? 가시 면류관은 왕관을 또 갈대는 왕이 가진 홀을 흉내낸 것으로 유대인의 왕이라 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신하들이 왕 앞에서 존경과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흉내낸 것이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 중 공동 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조롱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왕 꼴 좀 보자 이런 꼴을 한 사람이 유대인의 왕이냐는 조롱이었겠지요. 그들의 조롱과 멸시는 계속됩니다. 30절에 보니 주님께 침을 뱉었다고 했습니다. 가장 추악한 자에게나 할 수 있는 경멸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쥐어 줬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다고 했습니다. 면류관을 가시나무로 엮어 만들어 그 가시가 머리를 찌르고 있을 터인데 갈대로 그 머리를 때렸으니 가시는 더 깊게 머리를 찔렀을 것입니다. 이렇게 실컷 희롱하고 홍포를 벗기고 다시 주님이 본래 입으셨던 옷으로 갈아 입혀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는 기록입니다. 40에 하나 감한 채찍을 맞아 이미 온 몸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피가 엉켜 있을 터인데 그런 상처투성이의 몸에 옷을 입히고 벗긴다는 것은 주님께 엄청난 아픔을 더해 주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왕’을 조롱하고 있는 장소는 총독의 관저의 뜰이었는데 이젠 십자가에 못 박힐 장소인 골고다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의 관례에 따라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 원칙인데도 주님께서는 이미 기진 맥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법에는 로마 군인이 누구에게든지 강제 사역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는 곳까지 가게 했다는 기록입니다. 해골이라고 하는 골고다 언덕 사형장에 도착하여 그들은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으나 예수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이것을 마시게 했을까요? 마취제로 이것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이젠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죄인을 다루기 쉽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막 15:25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제 3시라 했으니 현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벗겼던 주님의 옷을 군인들이 나누어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군인들은 사망 확인을 위해 완전히 죽을 때까지 거기에 앉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37절에 보니 주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 쓴 죄 패가 붙었다고 했습니다. 죄목을 써서 목에 걸게도 하고 가슴에 차게도 하며 머리 위에 써 붙이게도 하는데 주님의 경우에는 머리 위해 써 붙였습니다. 이 죄 패는 빌라도 총독이 쓴 것이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되 히브리어, 로마어인 라틴어, 그리고 희랍어의 세 언어로 써서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알아볼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의 기록을 보면 대 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써 달라고 했으나 빌라도가 쓸 말을 썼다고 말하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음을 보게 됩니다.

[2]두 번째는 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 조롱 당하신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큰 능력을 베풀었던 나사렛 예수가 너무나도 싱겁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못 박힘으로 그들은 더욱 힘을 얻어 희롱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가 오셨다고 믿고 따랐던 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다른 나라를 정복해야 할 메시야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군중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뭐라고 조롱했다고 했습니까?

골고다를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모욕했다고 했는데 그 당시 머리를 흔드는 일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멸시하고 조롱하는 몸짓을 하면서 입으로 모욕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말을 어디서 들어본 말입니까? 누가 예수님께 이런 말을 썼던가요?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마치시고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가지고 떡이 되게 해 보라 한 것이며 당신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발을 받쳐 주시어 아무런 상처가 없이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다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마귀의 도전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지 못했으므로 주님께서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무리들은 당신이 남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남은 고사하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무리들은 주님께서 손과 발에 박혀진 못이 주님을 땅에 내려오지 못하게 묶어 둔 것인지 알고 한번 내려와 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무엇이 주님을 십자가에 묶어 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이에 대한 순종심이 묶어 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주님께서 약이 오르시어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인류 구원의 큰 뜻을 저버린 불순종의 아들, 마귀의 친구로 전락해 버린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군중들을 동원하여 조롱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도록 십자가를 지신 시각까지 도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역시 대 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면서도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네가 유대인의 왕임을 우리가 믿겠노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과연 저를 기뻐하시면 지금 그를 살려주지 않겠느냐고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약을 올린다고 한다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우리더러 끝까지 참으라고 할 것이고 또 마귀는 그냥 두지 말고 배로 갚아 주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마귀의 조롱에 말려들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3]세 번째로 강도들에 의해 조롱 당하신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8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기록되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 다른 죄수들도 함께 사형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날 강도 둘이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 날 예수님을 못박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못박으면서 예수님을 일반 강도와 함께 못박음으로 예수님의 명예를 낮추려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주님의 좌우에 흉악범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다는 사실입니다. 외경 중 도마 복음에 보면 좌편 강도의 이름은 게스타이요 우편 강도의 이름은 데스마이라고 기록해 주고 있어서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 44절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강도가 조롱했다고 했으며 누가복음의 기록에는 두 강도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다른 하나는 그 강도를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강도 중 하나가 예수님을 조롱한 것은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네가 남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면 남은 고사하고 너를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는데 이 강도는 예수님 자신과 함께 강도 자기까지도 십자가에서 구원받도록 해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심지어 강도로부터도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그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조롱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말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신앙이 좋다는 말을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로 풀 수 있을 것이며 신앙이 없다는 말은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을 잊고 있다는 말로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같은 측면에서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효도란 우리를 낳아 주시고 양육하시느라 당하신 부모님들의 많은 고통과 수고를 기억하는 것이고 불효란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이라 풀 수 있으리라 봅니다. 평상시에 부모님의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사십니까? 우리를 낳고 길러 주실 때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얼마나 기억하면서 사시느냐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곰곰이 하나하나 생각해 볼 때 얼마나 감동이 오는지 모릅니다. 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서 가슴이 찡하고 또 눈물이 돌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그런 은혜를 잊고 살 때에는 부모님의 은혜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이 하루하루를 특별한 느낌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효도란 부모님의 은혜를 하나 하나 기억하고 그 은혜가 고마워서 부모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드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날, 또는 아버지날에 선물 사 드리는 것만으로 효도를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물을 드릴 수밖에 없도록 고마움이 가슴에 벅차 올라와서 선물을 사 왔다고 한다면 은혜를 아는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박병수 전도자님이 시무 하시는 뉴욕 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일년에 한번씩 기쁘고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의 추도일이 든 주일에는 자녀들과 그들의 배우자들 그리고 손자 손녀가 음식들을 준비해서 매년 그 교회를 찾아온다고 해요. 물론 자녀들은 다 다른 교회를 나가면서도 자기들의 어머님을 기억하고 꼭 그런 행사를 매년 해 온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다니셨던 교회를 기억하는 그 자녀들은 그 어머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자녀들이라고 저는 크레딧을 주고 싶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어머님 꿈을 꾸면 어머님께서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의 꿈을 꾼다고 해요. 그러니 어머님을 만나 뵈려면 어디로 가 보아야 하겠어요. 그 교회를 가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전도자여서 그런지 모르나 정말 훌륭한 자녀들이고 믿음을 중심한 좋은 자녀들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을 기억하고 선물을 사다 드리는 것도 기쁜 일이겠지만 부모님을 기억하되 더욱 믿음과 연관해서 하는 행동은 참 모범적인 행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이 드십니까? 좋게 생각이 드시면 여러분의 자녀들께 권장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살아 계신 부모님의 생신이 낀 주일에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들이 함께 부모님과 예배드리고 음식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참 화목해 보이고 효성스럽게 보여서 모범이 되지 않겠어요? 혹시 불신 자녀가 있다면 교회에 올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같이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식어질 때가 있는데 믿음이 식어진다는 것을 열심히 떨어졌다는 단면으로만 말하고 싶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날을 기해서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라는 가사를 노래 불러 갈 때에 가슴이 찡하듯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의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고통, 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당하신 조롱, 심지어 함께 못 박힌 강도까지 조롱했던 조롱의 현장을 기억하고 그렇게 당하신 모든 고통과 조롱이 바로 나를 위해 당하셨다고 기억할 수 있다면 믿음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런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지 못할 때에는 믿음이 식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모든 봉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뽐낼 것이 없으며 교만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큰 선물을 부모님께 드려도 부모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거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의 몸은 여기에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골고다의 언덕으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나를 위해 빌라도의 관정에서 40에 하나 감한 채찍을 맞은 것을 상상해 보시고 그 아픔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채찍 끝에는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예수님의 살이 찢어지고 패이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에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갈대로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장면과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장면도 상상해 보시고 그 아픔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회상하며 이런 수치와 모독이 나를 위해 당하셨음을 분명히 믿게 될 때에 우리의 믿음은 산 믿음이 될 것이며 우리의 봉사는 진실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황송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봉사를 하든 안하든 내게 전연 문제가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진심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미지근한 믿음도 가질 수가 없으며 집회에 빠지는 어떤 핑계도 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개으름을 피우고 변명을 늘어놓게 됩니까?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잊고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 또 나눔반 시간에 가끔 빠지는 분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과 조롱은 바로 나를 위해 당하셨음을 다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나도 주님을 위해 많은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조롱을 기억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