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활 – 마태복음 28:1-15

마태 복음이 모두 몇 장이지요? 예, 28장입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된 1장과 예수님의 탄생이 기록된 2장으로 시작된 마태 복음 강해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록된 27장을 마치고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기록된 28장에 이르렀습니다. 마태복음 강해가 오늘로서 103번째의 주일 설교이며 이제 한번의 설교를 남겨 두고 있어서 104주만에 끝나게 되므로 정확히 2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33년 동안의 생애를 2년에 걸쳐서 마치었으므로 16배가 빠른 고속 열차를 타고 주님의 생애를 따라다닌 결과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세 마디로 압축하자면 주님의 탄생,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부활이 되며 이것을 또 두 마디로만 압축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생애의 꽃이요 열매인 동시에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란 십자가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만 나타나는 영광이 되므로 십자가가 없는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와 부활로 압축되어질 뿐 아니라 또한 십자가와 부활은 성경 66권을 압축한 것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설교는 알맹이가 빠진 설교라고 말들 합니다.

 

오늘은 어두움과 빛, 수난과 영광으로 대비되는 십자가와 부활 중에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 증거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했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켜보았던 여인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했으며 물론 대제사장들과 기타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누가 믿던 믿지 않던 아무 상관없이 주님의 예언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사심같이 우리도 모든 고난 후에 영광스런 부활을 입게 될 것을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소망이 더욱 뜨거워져 이 소망 때문에 모든 고난을 잘 이겨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활시에 나타난 이적적 사건들(1-4)

[2]부활 후에 여인들께 나타나신 예수님(5-10)

[3]부활을 불신케 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궁리(11-15) 입니다.

 

[1]맨 먼저 부활시에 나타난 이적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니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라고 되어 있어 주님의 부활의 시간을 대략 알려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갔다는 말은 안식일이 끝났다는 말로서 안식일이란 토요일 해질녘이면 끝나는 것이며 안식 후 첫날 미명이란 주일 아침 먼동이 트는 시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라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주일 아침 일찍 무덤에 와 보니 무덤이 비어 있었으므로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른 새벽에 되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주님께서 여러 번 예언하셨는데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히시고 3일째 되는 날인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예언대로 부활하시어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에 의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덤 속에 계신 이유 때문에 33년만에 처음으로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시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부활하셨는데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분되어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게 된 유래가 되었고 주님의 십자가 후에는 기독교에서 유월절을 같은 절기를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무덤에 찾아간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두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이모 되는 살로매가 추가되었으며,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무덤을 보려고 왔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에 왔다고 했음을 보게 되는데, 종합하여 볼 때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았으나, 그 중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 충성심이 누구보다 컸던 이유로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만 거명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2-3 증인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두 여인이나 세 여인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왔을 때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부활시에 이적적 사건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진이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 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해주는 것으로 자주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이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 복음에 보면 여인들이 무덤에 오면서 누가 무덤 문을 막아 둔 큰 돌을 굴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하고 와 보니 이미 돌이 굴려져 있더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이 돌을 굴려 주었다고 했습니까?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주었다고 했습니다.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왜? 돌을 굴려 주었을까요? 무덤에 들어가 보고 시체가 없음을 확인하므로 부활의 증인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죽은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의 무덤에서도 무덤 문을 막은 돌을 굴러 냈었는데 그 때는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도록 한 것이나 주님의 무덤은 부활의 증인들이 들어가 보도록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막아 둔 무덤에서도 나오실 수 있고 문을 닫아 둔 방에도 들어오실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니 그 천사의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찬란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4절에 보니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빛난 옷을 입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되었다고 했습니다. 용감한 군인들이 왜 이렇게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되었을까요? 큰 지이 일어났고, 천사가 나타났으며 무덤이 비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심을 알고 심히 무서워 떨었을 것입니다.

 

[2]두 번째로 부활 후에 여인들께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에 보니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분명히 “너희는 무서워 말라”고 했습니다. 군인들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은 무서워 죽은 자들과 같이 될지언정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들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던 것을 잘 알며 너희들을 돕고자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기 와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고 표현되어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이 여인들에게 무덤이 비어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빈 무덤의 이유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나신 것은 갑자기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 계실 때에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시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 뵙도록 하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이 갈릴리에 도착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부활하시어 갈릴리에 먼저 가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세 이래 모든 일반 사람들과 성인이라고 했던 자들이 죽어 묻힌 무덤과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시체가 없는 빈 무덤입니다.

8절에 보니 이 말을 전달받은 여인들이 “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하였다” 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고, 무덤 문이 열렸으며 빛난 천사를 보았고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달받았으니 단순히 주님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아왔던 이 여인들로서는 전연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보고 들었으므로 정말 무서워 떨리기도 하고 또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 만나 뵈올 수 있다는 기대 속에 무서움과 기쁨의 엇갈린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9절에 보니 여자들이 달려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하뇨” 하시니 여자들이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그렇게도 사랑한 그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부활 후에 맨 처음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 주셨고 그를 사랑한 자들에게 넉넉히 보상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자들이 나아가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했으니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뵈었고 또 손으로 만져 봄으로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10절에서는 기쁨과 함께 두려운 마음에 있는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시며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부탁을 다시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탁 받게 됩니다. 이 여인들은 실망하여 주저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을 ‘형제들’이라는 친근한 단어를 쓰셨고 버리고 도망친 그들을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목자의 죽음과 함께 흩어진 양떼들을 부활과 함께 다시 양떼들을 모으되 갈릴리에서 제자로 부르셨는데 갈릴리에서 다시 부르시고 다시 크게 쓰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3]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불신케 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궁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니 여자들이 떠나고 나니 파수꾼 중 몇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자기들이 보고 들은 대로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의논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순간 파수꾼들도 대제사장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파수꾼들은 지진이 나고 무덤 문을 막고 인봉한 돌이 굴러졌으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고 천사가 나타나서 여자들과 이야기했으며 예수님은 살아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 등 듣고 본대로 대제사장들에게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고 했으니 분명히 산헤드린이 모여 의논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논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으니 지금까지 자기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했어야 할 터인데 은 30에 가룟 유다를 매수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도록 하자는 결정을 본 것입니다.

거짓 증거란 파수꾼들이 자는 동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소문을 퍼트리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혹시 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지 못하도록 빌라도에게 가서 호소하여 파수꾼들을 시켜 단단히 지키게 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를 맡은 파수꾼들은 책임을 다해 지켰을 것입니다. 한 명 두 명도 아니고 10여명의 파수꾼들이 엄한 명령을 받고 잠을 잔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요 또한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쳤는데 파수꾼들 몰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없음에도 다른 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거짓말을 퍼트리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시체가 도난 당했다면 당연히 파수꾼들이 빌라도로부터 문책을 받게 될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잘 말해서 징계를 받지 않도록 해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까지 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고 오직 편법과 술수에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었음에도 그들은 그 기회를 버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는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말로 꾸며서 부활이 없었던 것으로 덮어두려 했지만 이미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전 세계에 부활의 진리를 전파했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전파되어서 이를 믿는 모든 이에게도 생명의 부활이 약속된 진리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는 길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사신 생애를 본받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는 삶이란 바른 고향 관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로서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계셨지만 인류 구원의 특수한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임시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임무가 끝나면 아버지께로 즉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 가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땅은 임시로 머무는 나그네의 길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오래 사실 고향인 것입니다.

주님의 첫 여행길은 마구간이었습니다. 또 태어나자마자 헤롯 대왕의 그를 죽이려는 위협을 받았으며 33년 동안 사시는 동안 집 한 칸도 갖지 않으셨고 때로는 음식 잡수실 시간도 없고 쉬실 시간도 없이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마지막에는 제자에게 팔려 십자가를 지셨고 갖은 조롱을 다 당하셨으며 심지어 나머지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고 다 자기 고향으로 흩어졌던 것입니다. 또 인간으로는 아주 짧은 생애인 33년으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주님의 생애가 그렇게 험난하였으나 주님께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의 삶은 잠시 동안의 나그네 길이고 자기의 참 삶,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바로 뒤에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과 무한한 복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모두는 이 세상에서 다 장수하시고, 다 부자로 사시고, 다 지위와 명예를 누리시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요, 임시로 살고 있는 여행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자가 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가 있으며, 권세로 억누르는 자가 있고 억눌림을 받는 자가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닌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고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으며 빛이 있고 어두움이 있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참 고향이 아닌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매맞고 버림을 받거나 또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버리며 흑인 백인, 또는 전라도, 경상도로 나뉘어져 다 잘 낫다고 키 재기를 하고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받는 푸대접이나 또는 억울한 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잠깐만 지나면 그런 천대나 가난이나 무시당함을 잘 이겨낸 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혹시 부자로 한번도 살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기껏 일구어 놓은 재산을 폭동이나 지진으로 다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버림받고 천대받고 남들에게 내 놓을 만한 것 하나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병들고, 어떤 이는 불구이며 어떤 이는 너무 빨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눈으로도 너무 너무 불쌍한 인생들이 이 세상 구석구석, 아니 한 복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불운을 맞은 모두는 이런 삶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런 삶으로 인생이 다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런 십자가 바로 뒤에는 부활이 있고 부활의 삶에는 크나큰 복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공평이 있고 정의가 있으며 존경과 사랑이 있고 평화와 풍성히 있으며 감사와 찬양이 있는 그 천국이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과 같이 다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삶에 대해 너무 낙심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지라도 잠자고 눈을 뜨면 있게 될 그 새 세상을 기대하며 모두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지셔야 할 십자가를 잘 지심으로 그에게 준비된 영광을 다 차지함같이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가 지셔야 할 십자가 같은 고난과 많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잘 지고 이겨내야 합니다. 승리자 모두에게 큰상을 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달리 성공했다고 뽐내서도 아니 되며, 이 세상에서 남들과 같이 잘 살지 못한다고 풀이 죽어 살아서도 아니 됩니다. 이 세상은 임시 나그네 길이요 영원한 나라 천국이 우리들이 살게 될 고향인 것을 믿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갖고 하루하루의 삶에서 모든 역경을 참아 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실뿐 아니라 이 부활의 소망을 풀이 죽어 있고 낙담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전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