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장사 – 마태복음 27:57-66

오늘 주신 본문 말씀에서는 주님을 장사지낸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로마 법으로는 십자가에 처형된 자의 시체는 십자가에 그대로 메달아 두어 날 짐승들이 먹게 하거나 또는 그대로 썩어져 없어지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혹시 가족이나 친척이 시체를 요구해 오면 로마 행정관의 허락을 받고 시체를 인수받아 장사를 지낼 수 있었으나 그것도 대역죄로 죽을 경우는 시체 매장이 결코 허락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리마데 출신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기 소유의 무덤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군중들의 분노를 전연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또 빌라도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여 장사지냈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에서 자세히 소개되지만 이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유대 산헤드린 회원이었으므로 자기의 명예와 지위를 한꺼번에 잃게 될 위험이 있었음에도 그런 세상적인 것에 메이지 아니하고 돌아가신 메시야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그런 담대한 행동을 하게 하여 우리들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을 소개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져 세상적인 것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3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아리마데 요셉의 헌신(57-60)

[2]두 여인의 충성과 사랑(61)

[3]종교 지도자들의 걱정(62-66) 입니다.

 

[1]맨 먼저 아리마데 요셉의 헌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27:57에서는 아리마데 요셉을 부자요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해 주고 있으며 마가복음 15:43에는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였고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 자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또 눅 23:50-52에는 공회 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자였으며, 공회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아니한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소개했으며, 요 19:38에는 유대인이 두려워 드러내지 아니한 제자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아리마데 사람 요셉을 정리해 본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 중 하나였으나 숨은 제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왜? 드러내 놓지 못하고 숨은 제자 노릇을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두려워 드러내지 아니한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믿었으면서도 예수님을 장사지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현재의 직업과 신분과 생명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으면서도 자기가 주의 제자임을 감추었던 자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산헤드린 회원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결정을 내렸던 바로 공회의 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산헤드린 회원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아니한 자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왜? 반대했을까요?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할 죄가 없을 뿐 아니라 바로 메시야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요 존경받는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즉 불의를 싫어하고 늘 옳은 자리에 서 있는 자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부자였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리마데 요셉은 부자이면서도 이 세상의 물질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부자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넘겨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했습니다. 막 15:44,45에 보면 빌라도는 그의 요구를 받고 형장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시체를 내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빌라도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고 유대인들로부터는 말할 필요 없이 미움을 받게 될 것을 잘 알면서도 대담한 행동을 한 것이며 또 유대 공회에서 십자가형을 결정하였던 죄인의 시체를 공회회원인 그가 시체를 요구하여 장사를 지냈으니 공회에서 그를 파면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각오하고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숨은 제자가 어떻게 이런 대담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재판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조롱 당하시고 못 박히시는 모든 장면을 하나 하나 목격하였고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 지진이 났고 해가 어두워졌으며 성소 휘장이 두개로 갈라진 큰 변화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그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메시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어떤 위험과 두려움을 이기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큰 사랑은 시체를 찾아다가 자기 소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던 것입니다. 요 19:39에 보면 장사를 지낼 때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몰약과 향품을 바르고 새 마포로 싸서 장례법에 따라 잘 안장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니고데모도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예수님께 나아 올 때에 밤에 나아 왔던 자 즉 숨은 신자였는데 주님을 장사지낼 때에 요셉과 함께 장례를 치르는 일에 동참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주님을 안장하고 무덤 문에 큰 돌을 굴려 놓고 갔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60절에 보면 주님께서 묻힌 무덤은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이었습니다. 바위를 뚫고 만든 무덤에 묻고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장사를 치를 때에 방부제인 몰약과 향품을 사용한 것을 보아 주님께서 3일 후에 다시 살아나리란 사실을 믿지는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안식후 첫날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요셉의 다른 한 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절기에 참예할 사람들은 마땅히 시체를 만지는 일을 삼가해야 하는데 율법을 가장 치밀하게 지키고 시행해야 하는 산헤드린 회원이 유월절 절기에 참예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체를 만지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 동안 부정한 자가 되어 어떤 성례 전에 참석치 못하도록 율법에서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의식에만 치중하고 사랑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허구성과 위선을 많이 책망하셨는데 아리마데 요셉도 의식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우선 순위에 두었음을 보게 됩니다. 니고데모도 주님께 큰 사랑을 보인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두 번째로 두 여인의 충성과 사랑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61절에 보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 16:9에 보면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개해 주고 있어 악한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자였으나 주님의 도움으로 귀신으로 부터 해방된 자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마리아란 막 15:40을 참조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가 있는데 이 제자들의 어머니 마리아인 것입니다.

이 두 여인이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례하고 돌아간 후에도 무덤을 향해 앉아 있었던 충성을 보였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미 우리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남자들은 다 도망을 쳤으나 여자들이 갈릴리로부터 와서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았던 지극한 사랑을 소개받은 바 있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서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와서 무덤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법에는 사형수의 죽음을 두고 애곡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 두 여인들은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를 조용히 지켜보았고 이제는 다 떠난 후에도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막 16:1과 눅 23:56 기록을 보면 그들은 집에 돌아간 후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 향품과 향유를 사 두었음을 보게 됩니다. 향품을 사 두었다가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자들의 일행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동참했음을 보게 됩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이모님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위협과 두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했음을 보게 됩니다. 누구더러 충성된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꼭 필요할 때에 함께 해준 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주님께서 어려울 때에 위로와 격려를 준 이 여인들이야 말로 충성되고 착한 종들이란 칭함을 받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 여인들과 같이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서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자원하여 주님의 곁에 있어 드리고 주님께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인들은 주님 살아 계실 때에도 물심 양면으로 숨은 봉사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지켜보았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 지켜보았던 충성심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의 사랑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맨 처음에 이 여인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 여인들에 의해 부활의 첫 증인이 되도록 큰 영광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음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일면을 보여주신 증거로 받게 됩니다. 특히 여인들 중에도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해 주어 막달라 마리아가 우선적으로 기록된 것을 보아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께 향한 사랑이 더 뜨거웠음을 우리가 충분히 짐작하게 됩니다.

 

[3]세 번째로 종교 지도자들의 걱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62절에 보면 예비일 다음날에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였다고 했습니다. 예비일 다음날이란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나 일반 안식일과 구별하여 유월절 절기를 준비하는 예비일 다음날이란 말로 즉 유월절이 낀 안식일이란 말을 강조하기 위해 안식일을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자기들의 걱정거리를 전달한 것을 보게 됩니다. 63절에 보니 그들이 빌라도에게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을 보는데 이것은 존칭어로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기를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저 유혹하던 자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많은 권능을 행했으므로 백성들이 많이 따라 다녔기 때문에 주님을 유혹하던 자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말하기를 죽은 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니 빌라도 총독께서 명령을 내려 사흘까지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 예수님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는 주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면 백성들이 전보다 더 크게 유혹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실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이런 걱정거리를 전해들은 빌라도는 그들의 요청대로 파수꾼을 그들과 함께 보내고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보내니 그들이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는 기록입니다. 빌라도가 승인하기를 파수꾼들을 데리고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했으므로 우리가 상상하기로는 수많은 군인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단단히 지켰을 것은 뻔한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을 또 인봉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무덤을 인봉하는 방법은 무덤 문을 막은 돌과 무덤 입구 벽에 시멘트로 접착시키거나 또는 무덤을 막은 돌을 밧줄 같은 것으로 멜 수 있도록 돌이나 무엇을 굴려 와 무덤 양쪽에 잡아 메고 초나 진흑같은 것으로 접착시킨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인봉했다는 뜻은 만일 이것에 손을 데는 자는 로마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시체가 도둑질 당하지 않게 그런 엄격한 경계를 펼치고 있지만 그 당시 사정으로는 주님의 제자들은 오히려 잡혀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가운데 다들 도망간 입장이었으므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갈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전연 잘못된 추측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무덤을 엄중하게 지키면 지킬 수록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인들이 그렇게 엄하게 지켰는데도 무덤에 있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셨음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부활 말고는 다른 어떤 말로도 해석을 내려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게 되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더욱 뜨겁게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시체를 찾아다가 몰약과 향품을 바르고 자기의 묘실에 장사지낼 수 있는 뜨거운 자들이 다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방법으로,

첫째는 우리들을 사람들 앞에 주의 제자인 것을 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모든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모임에 자주 빠지는 자를 두고 믿음이 좋다든지 열심히 있다고 말할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임마다 열성적으로 참석하는 극성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모임마다 열심히 참석하는 것을 보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참 열심이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말을 남에게 들을 수 있게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 예배에 보이지 않던 숨은 교인들이, 또 기도 모임에나 나눔반에 숨은 교인들이 얼굴을 나타내는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모임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요사이 많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더 뜨거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두 번째 방법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더욱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아리마데 요셉이나 니고데모나 향품을 사 들고 온 여인들을 볼 때에 주님을 위해 바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쉽게 볼 수 있듯이 우리들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위해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물질을 드려야 할 때에 인색하지 말고 더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해 지나치게 기복 신앙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드릴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이 더 뜨거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적게 드리는 자는 주님을 덜 사랑하는 자이며 더 드릴수 있는 자는 더 사랑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헌금을 은밀하게 바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도 지금보다 더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세 번째의 방법은 열심히 말씀을 보고 열심히 기도하며 열심을 내어 찬양하는 길입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참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욕심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하는 자는 자기의 욕심대로 살았던 삶에서 점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으로 바꿔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데 요셉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장사지낸 것은 주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한 그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은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고 기도하는 데서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큐티를 중지한 사람들도 다시 시작하므로 자신을 들어내야 합니다. 나눔반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 다시 자신을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모두 다시 회복할 뿐 아니라 더욱 열성적으로 말씀을 상고하고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영적 인물들이 다 되셔야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네 번째의 방법은 지금보다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은 주님의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내가 더 희생하고 내가 더 이웃을 위해 땀을 흘리는 삶이 바로 주님의 제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더욱 이웃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숨어 있는 믿음은 참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리마데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숨은 자리에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신을 들어내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듯 우리들도 열심히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주의 사업을 위해 더 뜨겁게 헌금하고 더 뜨겁게 말씀을 보고 기도하며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해 나가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큰상을 예비해 두셨다가 주실 것입니다. 큰상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