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구 – 빌레몬서 1:8-25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부탁을 하는 편지 내용입니다. 즉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인데 그들의 관계를 보자면 빌레몬과 오네시모 두 사람은 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아 복음으로 사도 바울에게 빚진자의 관계에 있으며 또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물질적으로 주인에게 빚진자의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노예가 만일 도망치다 잡히면 죽여도 되는 노예 제도가 인정된 사회였으므로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죽어 마땅한 큰 죄를 지은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관계에 있었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죄와 빚과 노예로부터 사면해 달라는 간청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오네시모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과 둘째는 이제는 빌레몬이 복음으로 받아드려 새사람이 되었으니 빌레몬을 대할 때에 노예로 그를 대하지 말고 우리와 똑같은 믿음이 형제로 아니 또 복음 전파의 동역자로 대해 줄 것과 세 번째는 오네시모를 다시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을 돕도록 사도 바울 곁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간단한 한 장의 편지에는 기독교 안에는 노예와 주인이, 또 주인과 종업원이, 상관과 부하가, 부자와 가난 한 자가 신분과 상관없이 주안에서 한 형제이므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상을 교훈 해 주고 있으며, 신분은 다양하나 삶의 목표는 복음 전도에 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많은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생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변화된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8-14) [2]오네시모에 대한 부탁(15-22) [3]끝 인사(23-25)입니다.

 

[1]먼저 8절부터 16절까지의 변화된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는 동안에 오네시모와 만날 기회가 되어 그에게 복음을 전해 오네시모가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오네시모를 ‘옥중에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 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만 해도 오네시모는 남에게 손해나 끼치는 쓸모 없는 사람, 아니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뻔한 인물이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거듭난 오네시모는 변화를 받아 모두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고 특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에게는 꼭 있어야 할 인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이 많아 육신적으로 약해져 있었고 몸이 자유롭지 못한 감옥 생활을 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사도 바울을 도아 줘야 했었는데 그동안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생활해 보니 오네시모는 바울을 돕는 일에 큰 몫을 해낸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는 주인 몰래 도망쳐 나온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되 주인의 허락을 받고 오네시모를 자기 곁으로 오게 하기 이해 무게 있게 그리고 간절하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의 요청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호소력이 있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되게 쓴 편지의 요점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복음으로 낳은 아들의 관계이므로 빌레몬에게 명령을 해도 되는 권위가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 자신이 나이 많고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를 돕는 자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또 오네시모가 전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사도 바울에게나 빌레몬에게 쓸모 있는 자로 변화되어 특히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마음이나 몸의 일부 같은 정도의 그를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즉 오네시가 빌레몬에게도 필요한 존재이겠지만 사도 바울 자신에게 더 필요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빌레몬이 직접 로마에 와서 바울을 돕는 대신 그의 노예인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 곁에 두고 돕도록 하고 싶지만 주인인 빌레몬의 승낙을 받지 않고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일단 돌려보낸 다음에 빌레몬이 다시 자원하여 그를 돌려보내 준다면 이 선한 일이 억지가 아닌 자원하여 베푼 선으로 될 수 있을 것을 알고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의 편지라면 능히 빌레몬을 설득시킬 수 있는 호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2]두 번째로 15절부터 22절까지의 오네시모에 대한 부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다시 사도 바울에게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바라는 목표가 꼭 실현되도록 완벽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니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라 하여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도망쳐 온 것은 큰 잘못이었지만 그런 잘못을 통해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변화된 사람이 되게 했으니 빌레몬을 잠간 떠나게 된 것은 오히려 영원히 한 형제요 동역자로 남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선으로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인 것을 암시하므로 오네시모가 지었던 큰 죄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용서할 뿐 아니라 오네시모를 대할 때에 이전의 노예, 또는 물건을 훔쳐 가지고 달아난 노예의 신분으로 그를 맞지 말고 그보다 훨씬 뛰어난 사랑 받는 형제로 맞아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한다면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맞기를 마치 사도 바울을 대하듯 영접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견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예요 죄진 노예를 사도 바울을 대하듯 영접해 달라고 썼으니 빌레몬으로서는 오네시모를 최상의 사절같이 대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탁하기를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어떤 불의를 했거나 빚진 것이 있으면 그 빚에 대한 청구서를 사도 바울 앞으로 보내라고 쓰고 있습니다. 빚까지 책임지겠으니 그 빚으로 인해 오네시모를 잘못대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책임진다는 이 글을 친필로 쓰고 있으므로 진실임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사도 바울 자신에게 진 빚 즉 복음으로 진 빚을 말하지 않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네시모의 빚을 돈으로 계산한다면 몇 푼 안되겠지만 영적으로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돈으로 계산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빌레몬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 평안한 마음을 평안하게 해달라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사도 바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해주기를 바란다는 강력한 부탁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도록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의 말에 순종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쓴 것이며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썼습니다. 이 정도의 편지를 받고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는 그 당시에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성령을 통해 곧 석방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나 봅니다. 빌레몬에게 바울 자신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라는 부탁을 또 남기고 있습니다. 곧 방문할 것을 대비하여 방을 준비하라는 뜻이겠지만 다른 효과로는 곧 바울이 빌레몬을 방문하게 될 것이므로 이런 점도 감안하여 만날 때에 서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기쁨으로 대할 수 있도록 바울의 요청을 기꺼이 승락해야 한다는 가벼운 부담이 될 수 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마지막으로 23절부터 25절까지의 끝인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의 안부를 전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사도 바울 혼자 부탁을 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부탁한다는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이들의 안부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과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세상 적인 신분과 상관없이 형제를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신분이 너무 높으면 필요 없는 거부 반응을 느끼거나 반대로 상대방의 신분이 천하고 낮으면 무시하는 편견을 갖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는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만나는 그가 누구이든 신분과 상관 없이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요, 범죄자인 그의 과거의 편견을 전연 고려치 않고 현재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인 면만을 바라본 것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같은 범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어떤 편견 없이 성도를 성도로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은 자였거나 전에 어떤 큰 실수를 한 자이거나, 또는 그가 현재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이거나 낮고 천한 신분이거나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를 어떤 편견 없이 똑같이 대접할 줄 알아야 하며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죄인이었던 우리를 주님께서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한국인은 멕시칸이라고 천대하고 중국 교포를 천대하며 심지어는 같은 미국에 살고 있음에도 전라도치라고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해내는 우리들은 많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남이 자기를 차별대우하면 제일 먼저 소리지를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차별대우하는 일에는 일등들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기독교인이면 기독교인답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두를 공평하게 형제로 우대할 줄 아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님과 같은 사랑, 우리 모두 본받아 우리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이 기쁨을 얻고 평안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