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 빌 3:1-11

빌립보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로 종의 형체를 입고 땅에 내려오신 주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모든 성도들이 겸손한 종의 자세로 봉사할 것을 권면했는데 3장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이비 지도자들을 경계하여 순수한 믿음을 지키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믿게 하는 어려움보다도 오히려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에게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지도자들과의 마찰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 주어지며 반면에 사도 바울이 가진 바른 신앙을 심어주어 복음을 전달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다 들어가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은 우리 모두도 성경을 떠난 신앙이 팽배해 있는 이 때에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찾고 그 신앙을 지켜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정결한 신부로써 신랑을 기쁨으로 맞아드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까? [1]거짓 지도자들을 조심하라(1-6) [2]사도 바울의 변화(7-11)입니다.

 

[1]먼저 1절부터 6절까지의 거짓 지도자들을 조심하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똑 같은 권면을 반복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문을 열면서 강한 어조로 거짓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뒤따라 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했던 유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유대주의 자들의 다른 복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서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이렇게 강한 어조로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행한 어떤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을 다 철저히 지킴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시고 십자가에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는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이미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므로 율법에서 명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데 유대에서 왔다는 거짓 지도자들이 교회마다 방문하여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고 하므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한 그들을 ‘개들’ ‘행악한 자들’ ‘손 할례당’이라고 험한 이름을 붙여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도전하고 복음에 도전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을 물어뜯는 개에 비유되며,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며, 또한 그들은 겉으로만 믿는 체하는 외식주의자들이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들의 육체적 자랑을 일삼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든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든가,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던가 하는 육체적 자랑을 일삼고 그것으로 자기의 의를 자랑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적 자랑을 일삼는 이런 자들을 조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겠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대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대신 자기의 믿음의 혈통이나 자기가 행한 자선 사업을 자랑하면서 그런 것에 의해 자기가 구원받을 것으로 자랑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된다는 신앙을 갖지 못하고 손으로 받는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그들을 두고 손 할례당이라 했으며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봉사하고 육체 자랑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가 참 할례당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미에서 영적인 할레당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너무나도 자신들의 육적 조건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육적인 자랑을 하자면 자기는 그 누구보다도 못하지 않은 육적 조건을 갖고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도 율법에 따라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중 자랑할만한 베냐민 지파요, 다른 피가 전연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율법을 거스리는 자들을 핍박하였으므로 율법으로 보자면 자기는 누구보다도 의롭고 흠이 없는 자라고 자기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가진 사도 바울이지만 이런 육체적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데에는 아무런 유익이 못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임을 깨닫고 일체 자기의 육체적 자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 각 교회를 순방하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들을 두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요, 개요, 행악 하는 자들이며, 손 할례당 이라고 표현하기에 주저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육체적인 손으로 받은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받은 할례 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는 7절부터 11절까지의 사도 바울의 변화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육체적 자랑을 일삼는 유대주의 자들과 대비하여 사도 바울 자신은 이전에 자기도 대단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육체적 모든 조건을 다 버리되 쓰레기와 같이 미련 없이 버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고부터는 상대적으로 자기의 육체적 자랑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한다면 버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쓰레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과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임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에 의해 인정받기 위해서는 방해되는 그 무엇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신뢰나 육체적 자랑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방해가 됨을 깨달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볼 때에 성도에게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뿐이겠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신 그 부활의 능력을 사도 바울도 체험하고 자신도 그리스도가 가신 길인 고난의 길에 동참하여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같이 자신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다른 복음을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파가 있고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 수많은 교파나 교회가 다 사도 바울이 전한 똑같은 복음에 의해 신앙 생활을 하므로 온 세계가 한 교회, 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교파나 많은 교회가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른 복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내 귀에 잘 들어오고, 내 마음에 딱 맞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비 성서적이면 배설물과 같이 버려야 합니다. 모든 교훈은 성경과 대조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개’ ‘행악자들’ 또는 ‘손 할례당’ 이라고 심한 비판을 하였는데 그런 자세로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방해되는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에 발견되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습니다. 오직 그의 소망은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꼭 부활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그렇게 뚜렸하므로 자기의 목표를 이루는 일에 방해되는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의 목적과 목표를 사도 바울과 같은 목적과 목표로 일치를 시켜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목적과 목표가 오직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아 주님 재림하실 때에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기 원한다면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고난을 이겨나가야 하며 큰 소망을 위해 작은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또 그리스도에게 발견되기 위해 방해되는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큰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많은 것을 버리듯 우리들도 미래의 생명의 부활을 쟁취하기 위해 현실적인 어떤 것들을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버릴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성령의 능력이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의 능력의 체험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자기의 많은 것을 버리고 자기 부정의 생활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가야할 몸들입니다. 이사하기 위해 아깝지만 버려야할 묶은 살림들을 많이 버려야 합니다. 새 집에는 맞지 않은 묶은 살림은 아까울 뿐이지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다 열심히 말씀을 상고하여 다른 복음을 멀리하고 순수한 복음에 거하며 또한 부활의 소망을 목표하고 믿음을 키우는데 방해되는 각자의 생활을 많이 정리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