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적 유대인 – 로마서 2:17-29

유대교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비록 지옥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져 준다는 교훈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요,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수 민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보장되었다는 우월감을 가진 이유로 이런 사상이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이런 우월감과 특권을 누리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켜나가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받은 자답게, 또 할례를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면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가졌지 자기들이 받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형식적 율법(17-24) [2]형식적 할례(25-27) [3]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입니다.

 

[1]맨 먼저 17절부터 24절까지의 형식적 율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애굽으로부터 구출해주셨으며 홍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체험했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는 완전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부심만 갖고 이방인들을 깔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란 율법과 하나님과 연계된 민족으로 그들이 가진 율법과 하나님은 바로 자기네들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나 선지자들을 통해 율법의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라 믿었습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어두운데 있는 소경 된 자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길을 인도하는 자들이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선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퍼붓기를 남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남에게 가르치기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네가 도적질을 하며 간음하며 심지어 우상에게 드려진 물건들을 도적질하느냐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율법을 자랑하고 또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니 이런 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지만 율법이 있다고 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범했으니 이것을 보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꼴이 되었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가 종의 생활을 하게 했는데 이런 일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결과가 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25절부터 27절까지의 형식적 할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맨 처음 할례가 시행될 때에는 아브라함은 99세에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할례란 요사이 남자아이들에게 행하고 있는 포경수술과 같은 행위이지만 할례란 그런 외과적인 수술이나 외형적인 흔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순종해나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 행할 때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이 앞부분에서 지적된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할례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25절에서 27절까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과 차별화 하기 위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을 두고 무할례당이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어서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는 전제 아래 받은 징표이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할례는 받지 않했지만 언약을 지킨다면 그는 무할례자가 아니라 바로 할례자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무할례자가 온전히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나 다름없게 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할례자 유대인들을 오히려 비판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3]마지막으로 28절과 29절의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8절부터 29절까지에서는 누가 참 유대인이며 누가 참 할례자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양 믿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남의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율법을 받아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과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아니라 참 할례자는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드려 죄 사함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갈 5:6 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는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한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린 것은 신약시대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이미 그 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받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이방인이었으며 룻과 욥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땅히 믿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함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주는 교훈은 참 그리스도인 즉 참 신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갖는 대단한 자부심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자기 동족들이 자부심만 가졌지 내적으로 참 유대인이 되지 못한 그들의 죄악들을 폭로하며 그들이 그런 죄악에서 벗어나 참 유대인 그리고 참 할례자가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퍼붓는 그 공격을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연관시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인 또는 성도라 부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인데 오늘의 교훈은 우리들이 참 그리스도인이요 참 성도이냐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라는 질문에 우리들의 대답은 당연히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받은 그 말씀을 몸으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못을 저질렀을 때에 남을 가르치고 충고했던 그대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했을 때에 비록 그를 두고 충고를 직접 못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참 성도답지 못하다고 마음에 걸렸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삼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많이 배워 알고 있다고 한다면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한 자들을 비난하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해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어 소경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 많아 말이 많고 남의 잘못에 대해 많이 참견하는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든지 저희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말은 많고 행동이 없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하신 책망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만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많은 공격을 퍼부으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만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또한 공격을 퍼부으실 것입니다. 실행은 없고 성경지식만 쌓아 올리며 자랑을 일삼는 것은 형식적인 믿음이며,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소리로 소리 질러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도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며 선을 행하는 것도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면 형식적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삶과 가정에서나 사회에서의 삶이 각각 다른 것도 형식적인 믿음이요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늘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삶도 형식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신 삶을 본 받아 최선의 성도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외모도 갖추고 또 속 사람도 갖출 때 이런 성도를 향해 참 그리스도인이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