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반론에 대한 답변 – 로마서 3:1-8

우리 나라는 옛날 양반과 쌍놈의 구분이 있었는데 양반과 쌍놈의 신분은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이 완전히 구별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양반과 쌍놈의 차별된 신분을 아는 우리들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양반과 쌍놈의 수준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족보에 의해 유대인이 된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요, 비록 이방인이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참 유대인이 될 수 있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풍습에 비교한다면 족보로 된 양반은 표면적 양반이요 비록 쌍놈의 족보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바르면 참 양반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 것이나 같은 선포였던 것입니다. 양반과 쌍놈이 구별될 수 없고 양반이나 쌍놈이나 다 똑 같다고 선포했다면 그 당시의 양반들이 얼마나 분하며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둘 다 똑같은 신분으로 선포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졌던 자부심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충격을 받은 유대인들이 털어 놀만한 세 가지의 불평을 가상하고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털어 놀만한 불평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고 답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윱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이나 하는 유대인들은 믿지 않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현대의 교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1-2) [2]유대인의 불 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하게 할 수 있는가?(3-4) [3]유대인의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가?(5-8)입니다.

 

[1]맨 먼저 1절부터 2절까지의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취급한데서 올만한 불평이요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율법을 주셨으며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시되 갖가지의 이적적인 사건들을 보여주시면서 보호하시고 구출시켜주신 그 많은 과거의 체험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해주시므로 입혀주셨던 그 많은 특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이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아온 자녀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자녀를 두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견해로는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불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듣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그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혜택이나 특수가 아무 것도 없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같은 차원에서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부모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고 크리스천 가정의 좋은 삶을 보아왔을 것이므로 좋은 믿음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므로 불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보다는 큰 혜택을 본 셈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일찍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혜택을 받은 그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메 달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아 남은 가르쳤으나 자신들은 지키지 않았으므로 율법을 받지 않고 양심의 법을 지키지 못한 이방인이나 그 불신에 대해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2]두 번째로 3절부터 4절까지의 유대인의 불 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하게 할 수 있는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 그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지만 자기 아내가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좀 참았으면 이스마엘을 통한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한 그의 불신이 현재의 중동 전쟁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즉 이스마엘의 후손과 이삭의 후손의 싸움이라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히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파기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앗인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하심으로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은 자기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을 무효화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들은 거짓되어 약속을 지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므로 그가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지키신 다는 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답을 주기 위해 시편 시 51:4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를 인용했는데 이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론에 따라 변한 것은 없고 늘 의로우시며 그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시는 판단은 늘 옳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 신앙을 가진다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사람들 때문에 그 무엇을 변경하시지 않고 그의 계획대로 다 실행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5절부터 8절까지의 유대인의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점점 의로와 진다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간의 의로움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말을 한다면 만일 인간들이 점점 더 악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인간과 하나님의 의로움의 격차가 점점 커질 것이므로 인간이 불의 할수록 하나님의 의가 돋보이게 들어 나게 된다는 이론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준 불의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옳지 않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죄이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지 그 죄로 인해 나타난 주변 사정은 전연 고려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거짓을 많이 행한 결과로 하나님은 더욱 의롭게 보이시고 영광스럽게 보이시게 된다 할지라도 죄인은 그 지은 죄를 인하여 심판하신다는 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안는다면 하나님의 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우리들은 더 많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자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50이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50의 자비를 베푸신 50짜리 하나님이 되신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0이란 숫자의 자비를 베푸신 100짜리 하나님이 되시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이 100이란 죄를 다시 짓겠다는 것은 하나의 궤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경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궤변을 좋아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표준으로 죄인들을 심판하시며 심판시에는 말씀의 표준 외에 어떤 변명과 궤변이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렇지 않다는 뱀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 때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선포하셨는데 역시 말씀대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겠다고 심판의 의지를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대로 심판이 이뤄질 것이며 그 심판의 표준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실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선 사람들마다 많은 변명과 특수한 사정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많은 궤변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왔지만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오래 믿었으며 교회 일에 몸바쳐 봉사했다는 내역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믿음을 버렸다고 한다면 그 좋았던 사정이 심판에서 아무런 변명도 되지 못하고 자기를 구출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더욱 의롭게 하고 그의 자비가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궤변을 한다면 지은 죄를 다 물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엄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어 죄 사함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셨는데 하나님을 위해 죄를 지었다고 한 자를 심판하실 것은 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에 대한 궤변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실 계획이셨으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인류 구원의 공로자라는 궤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아니고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메 달리게 하실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양을 준비하신 거와 같이 말입니다.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요단 강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대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세례를 꼭 받으라고 하면 이것이 못마땅하여 궤변을 말하기를 전쟁터에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믿기는 했으나 세례 받을 기회가 없이 전쟁 중에 사망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냐고 특수한 예를 들어 대항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교훈은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어떤 족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의 표준에 의해 집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어떤 궤변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대로 심판하시되 그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말씀 받기를 거절하고 변명을 좋아하는 자는 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