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인내 – 로마서 8:18-25

우리가 어렸을 때에 체육관에 가보면 ‘우리의 무대는 올림픽이다’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붙여둔 목적은 체육관에서 수련 받고 있는 모든 수련생들에게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할 큰 꿈을 가지라는 것이며 그 영광을 이루려면 날마다 큰 꿈을 마음에 두고 모든 어려움을 참아내며 큰 영광을 차지할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라는 목표를 세워주기 위함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8장 앞부분에서 성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영광된 신분을 얻었음을 소개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이 영광된 신분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만 눈여겨볼 지 모르므로 그 영광을 얻기 위해 그가 감당했던 십자가의 큰 고난을 먼저 감당하셨음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앞으로 받게 될 영광과 고난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서 영원한 영광을 회복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고난을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리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현재의 고난과 장차 얻을 영광(18) [2]피조물들의 소망(19-22) [3]성도들의 소망(23-25)입니다.

 

[1]맨 먼저 18절의 현재의 고난과 장차 얻을 영광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18절에서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란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말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당할 수 있는 핍박을 포함하여,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과 육의 싸움에서 당하는 내적인 고통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길을 좁은 길에 비유하셨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불신자들의 길을 넓은 길에 비유하셨는데 이는 장래의 영원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가는 모든 길은 좁은 길이요 참아 내야할 고난의 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엄마가 10달 동안 많은 고생을 해야 하고 또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듯 영원한 영광의 월계관을 쓰려면 당해내기 힘든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밝혀주고 있는 것은 그 고난을 이겨내기가 어렵겠지만 그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장래에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현재 받는 고난은 비교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엄마들이 아이를 낳기까지 힘든 것은 사실이나 아이를 낳은 그 기쁨과 비교한다면 힘든 것은 낳은 기쁨과 비교가 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후에 얻게될 열매가 아주 갚진 것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도 감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앞으로 승리할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의 가치를 바로 깨닫는다면 성도에게 나타날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각오를 하고 있을 것이고 닥친 고난을 기어이 이겨낼 것입니다.

 

18절에서 아무리 큰 고난이라도 장래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족히 비교하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영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이 영광이란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일입니다.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 재림시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은 다 불타 없어지게 되고 불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될텐데 고난의 시험에 합격한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과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으며, 다시 저주가 없으며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는 곳이라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승리한 성도들은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에서 고난과 영광을 대조하여 표현하기를 현재의 고난은 잠시 받는 것이요 가벼운 것이라 했으며 장차 받을 영광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귀중한 것이라 했습니다. 장차 승리한 성도들이 받을 영광이 크고 귀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고난이라도 그 고난은 가볍고 잠깐이요, 견디어 낼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9절부터 22절까지의 피조물들의 소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연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인간들이 고난의 시험에서 합격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것이 자연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17 에 보면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라 했습니다. 이 말은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그 죄의 영향으로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산천 초목, 날짐승, 들짐승, 물고기등 자연 생태계가 많이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부패의 결과는 자연계의 부패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사람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로록 맡기셨던 자연계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바라고 고대하는 것은 인간들이 고난의 시험에 합격하여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들이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자연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과 함께 파멸되어 갈 수밖에 없는 위치이므로 자연계가 더 이상 썩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또 하늘 나라의 상속자로 나타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연계가 바라고 고대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이 승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연계의 주인이 되는 인간들이 승리하므로 자연계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들과 함께 해침을 받지 않는 자유와 번성을 누리기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23절부터 25절까지의 성도들의 소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연 계의 피조물들의 소망을 소개함으로 인간들이 자기가 얻어내야 할 영광의 회복이 얼마나 절실한 범 우주적인 요구인 것을 암시적으로 앞부분에서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당연히 우리 인간들이 탄식하며 소망해야하는 것은 주님 재림시에 온전히 구원되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도들은 처음 익은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함을 받았지만 온전한 구원과 영원한 양자 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과 온전한 양자 됨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소망하는 소망이 아니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소망하는 자들은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누릴 영광을 소망하라는 것이며 이 소망을 이루기까지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라는 교훈입니다. 가을철에 풍년이 든 들녘을 보면 참 아름답지만 그런 풍성한 열매가 있기까지의 농부들의 땀과 수고가 담보되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농부가 도중에 땀과 수고를 거절했다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도 그렇고 세상 만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성공한 자들의 영광만 보게 되지만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피눈물나는 고통이 많이 투자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와 살도록 하기 위해 예비해 두시고 몇 가지 조건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이며, 둘째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당하는 모든 고난을 오래 참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순종하고 따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양자됨과 상속자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하며 이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끝까지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장래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서 현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 성도들은 장차 받을 영광을 얻기 위해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늘 두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욕심이 원하는 길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어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길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해당됩니다. 이 고난이 때로는 재물이나 세상 명예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때로는 대인관계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 한다는 성령의 주장과 내 욕심대로 하고자 하는 육의 주장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때에 육이 원하는 대로 따르면 쉽고 가기 편한 길이나 이 길을 버리고 성령이 원하시는 길을 갈 때에는 여러 종류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을 소망하여 현재의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믿음 생활을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고 욕심나는 어떤 것도 잠시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소망을 택한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릴 것이고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육체의 욕심에 따라 편하고 쉬운 삶만을 살아간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광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크게 하고 이 큰 소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고난도 끝까지 이겨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