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책임 – 로마서 10:12-21

사도 바울은 자기와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대해 다음 장 11장까지에 걸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백성이요, 많은 복을 받기로 언약된 백성으로서의 특수성을 지닌 백성이었음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실 메시아이신 것을 믿기를 거부하면서도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므로 당연히 구원될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에 대한 올바른 안내를 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구원을 얻게되는 경로와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와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늘 큰사랑으로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글을 써서 보냄으로 불신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사랑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구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체계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들의 현재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오늘의 본분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 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구원을 얻는 과정(12-15) [2]구원을 거부한 이스라엘(16-18) [3]손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19-21)입니다.

 

[1]먼저 12절부터 15절까지의 구원을 얻는 과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12절에서는 ‘모든 사람’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한 분의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고 했으며 13절에서도 ‘누구든지’란 단어를 사용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12절부터 13절까지의 요점은 한 분의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종과 신분에는 전연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사람들 앞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구원의 개방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자기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 것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보편성과 구원의 개방성을 강조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구원은 외적인 어떤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개방성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14절에 보니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전파하는 자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겠고, 두 번째는 전파한 복음을 들어야 하겠고, 복음을 듣는 과정을 통해서 믿게 되는 것이고 믿게 되었으니 예수가 나의 구세주이신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과 전파된 복음을 듣는 과정을 거쳐서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드리든지 아니면 믿지 않고 거절하든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복음을 믿고 받아드려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15절에서는 이사야서 52장 7절을 인용하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 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복음 전파를 통해 남에게 복 받을 기회를 나누어주기 때문에 복음 전파 자들의 발걸음이 복된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된 발걸음은 보내시는 이가 있기 때문에 전파하게 된다고 하여 전파하는 자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두 번째는 16절부터 18절까지의 구원을 거부한 이스라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을 소개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므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착각을 지적하기 위해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을 잘 못 밟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니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고 믿지 안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는 복음을 믿고 순종했지만 이스라엘 모두가 다 믿고 순종하지는 안 했다고 하여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들에게는 비록 택한 백성이지만 구원이 보장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록 택한 백성들이었다고 하드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믿었어야 하고 믿었으면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수가 자기들은 구원을 받기로 선택된 자들이므로 복음을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것은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고 부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다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땅 끝이란 그런 의미의 땅 끝이 아니라 복음이 상당히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분히 들을 기회가 있었음을 강조하는 말로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들은 복음을 거절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그 전파한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인데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드려 복음에 순종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민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인 것 입니다.

 

[3]마지막으로 19절부터 21절까지의 손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9절과 20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믿지 않고 불순종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이 복음을 거절하므로 하나님께서 오히려 택함을 받지 않은 백성인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하고 이스라엘로 화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므로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은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찾아가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천대받고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현실을 보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하여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의 복된 소식을 거절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까지 종일 손을 벌리고 있다고 강조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책망하여 말씀 하시기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구원의 보장이 없는 허상을 버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실상의 자리에 들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은 택한 백성이요, 할례 받은 자요, 언약백성이라는 특수에 자만하여 복음을 거절하므로 구원의 보장이 없는 허상을 갖고 살았었는데 현세 교회에서도 구원의 보장이 될 수 없는 허상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높은 직분, 오랜 신앙 경력, 산더미 같은 헌금과 봉사, 전도를 많이 하여 받은 전도 상, 교파적인 풍부한 교리 지식이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믿고 성경에서 제시한 구원의 단계를 무시한 신앙이라면 구원의 보장이 없는 허상을 지닌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저녁에 보면 온통 십자가 네온싸인이 한국 전토를 메우고 있지만 그 네온싸인 십자가가 붙은 예배당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을 한 사람에게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믿고 죄를 회개하며 죄 사함 받는 세례를 받아야 구원이 보장되는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예배당도 허상이며, 수가 많은 교세도 허상이고, 교회에서 받은 높은 자리도 허상이며, 퍽 잘나서 남을 깔보는 자기의 뽐냄도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강조되지 않은 교회가 허상이며, 주님의 십자가를 전파하지 않는 목사들도 허상인 것입니다. 이곳 L.A.만해도 신학교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신학교의 목적이 주님의 십자가를 전파할 전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직업 학교로서 목사만 많이 길러내겠다는 신학교가 역시 허상인 것입니다. 교계 지도자들일수록 구원의 실상에는 관심이 줄어들고 허상인 명예와 재물과 자기 이력서 자랑에 집착해 있기 쉬운데 어떤 화려한 것도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리 싸움과 세력 싸움에 전력 투구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키기 어려우므로 교계 지도자들은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은 뒤로하고 자리 지키기에 마음을 다하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든 자리이든 구원을 얻게 하는 일에는 허상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갖는 기득권은 구원의 실상을 반납하고 오히려 구원의 허상을 차지하게 하는 비극을 낳게 하지만 감각이 무디어져서 이런 큰 손해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세례 받아 구원된 자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며 진리를 사랑하고 겸손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구원의 실상을 안고 사는 신앙인 인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의 행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구원을 두고 늘 감사하며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긴장감을 갖고 가다리는 신앙이 구원의 실상을 안고 신앙 생활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허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자들이 돌아와 구원의 실상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기를 두 팔을 벌리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허상을 버리고 우리 모두 구원의 실상을 안고 신앙 생활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