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받으라 – 로마서 15:7-13

오늘의 설교 재목은 서로 받으라 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교회 내에 상대적인 두 그룹이 있었는데 민족적인 측면에서 한 그룹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그룹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믿음이 강한 그룹이 있었고 또 믿음이 약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두 그룹들 사이에 늘 갈등과 의견 대립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고 서로 받으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옛날 보다 사회적 구조가 훨씬 복잡해져서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의 그룹이 보다 더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그룹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할지라도 모든 그룹은 서로 용납하고 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소개된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의 형편과 위치가 아무리 다르다할지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좋은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너희도 서로 받으라(7) [2]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8-11) [3]소망의 하나님(12-13)입니다.

 

[1]맨 먼저 7절의 너희도 서로 받으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 내에는 서로 다른 많은 계층이 있어서 서로 충돌되고 서로 비판하고 서로 입장을 달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의 말씀에서는 아무리 다양한 환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받으라고 분명히 권면하면서 서로 받아야 마땅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확인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이었거나 유대인이었거나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아무리 큰 죄라도 그 죄를 들추어내시지 않으시고 다 받아 주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의 예전 형편이 어떠했든지 상관하시지 않고 다 받아주심 같이 우리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내 형제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간에 따지지 말고 그들을 다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다 받아 주셨는데 이 주님의 너그러우신 자비를 외면하고 형제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지 아니하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서로 갈등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2]두 번째는 8절부터 11절까지의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받고 하나로 마음을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근거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은 시편 18 : 49에서 인용한 것인데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아드린 사실을 두고 그가 기록한 편지들을 통해 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감사의 글이 써지기 오래전에 이런 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쓴 다윗의 시인 것입니다.

 

10절은 신명기 32:43에서 인용한 것인데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까지 높아지게 되어 이제는 차별받는 신분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1절은 시편 117편 1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이방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이방인들이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 유대인들과 동등한 자리에 들어갔으니 이 은혜를 하나님께 찬송으로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7 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위에도 성령이 내려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높였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성령이 불같이 제자들에게 내려 제자들이 방언을 한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방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이들에게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그 당시의 율법으로만 말한다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만 들어가도 부정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때였으며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전혀 제외된 존재로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령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방문하게 하셨으며 성령의 지시대로 방문하여 설교를 할 때에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내렸던 똑같은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내려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성령을 받고 같은 방언을 했으니 유대인들이 받는 세례를 이방인에게도 받게 하는 것을 누가 금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때를 기하여 그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이 구별되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함께 어울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동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2절과 13절의 소망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2절의 말씀은 이사야 11:1에서 인용한 말씀인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란 다윗의 아버지 되는 이새의 뿌리로 다시 말을 하자면 다윗의 후손 중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열방을 다스리실 분이 나타나시게 될 터인데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새의 뿌리나 다윗의 후손은 누구를 두고 한 말씀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소망이 없었던 존재였으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예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 받게 될 것이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예언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며 천국에서 천국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같은 소망을 마음에 두게 될 것을 강조하고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강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통하여 점점 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의 열기가 더욱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었던 이방인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졌던 유대인들이나 다 같은 소망을 함께 갖게 되었으니 한 소망을 가진 모두는 더 이상 나누지 말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합해서 서로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한 소망가운데 하나가 되어 서로 받으라는 교훈입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각자는 자라난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며 다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다 다르며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다 다른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식구들끼리, 아니 한 가정에서 사는 가족끼리 서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나누어지고 서로 등을 돌릴 수 있는 요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격이 딱 맞는 부부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으며 딱 맞는 교인들로만 구성된 교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상당히 잘 맞는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맞지 않은 것만을 들추어내자면 서로 맞지 않은 점이 서로 맞는 점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또 교인들의 관계에서도 서로 다른 점들이 서로 마음에 드는 공통점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교인 간이든 혹은 가족 간이든 서로 다른 점들을 내놓고 서로 다르다고 나누어지고 서로 다투지 말고 큰 것 하나를 생각하며 서로 다른 작은 것들은 묻어두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한 큰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우리들 모두를 다 받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들의 부족한 것을 전혀 들추어내시지 않고 무조건 받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서로 다른 내 형제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큰 잘못을 주님께서 다 받아 주셨는데 내 형제의 적은 잘못을 들추면서 불화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배반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작은 것들을 묻어 둘 수 있는 큰 것이 무엇인가요? 한 소망입니다. 영원한 빛을 보지 못할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있는 큰 소망을 받은 우리들이므로 그 큰 소망을 마음에 두고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적은 것들은 못 본체하거나 못 들은체하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소망을 뒷전에 두고 형제들끼리 서로 다른 점을 들추면서 다투기에 재미를 보게 된다면 예수를 믿어도 참 기쁨이 무엇인지 참 평강이 무엇인지 참 소망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부부간에나 교인간에나 서로 따지고 말다툼을 일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더 많을까요 잃은 것이 더 많을까요? 우리들이 때로는 심각하게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실지로는 어떤 중대한 사실때문이라기 보다는 정말 별것 아닌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 서로 물고 뜯어 결과적으로 피차 상처 나고 험상궂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불이나 홍수가 났는데 이웃과 싸우고 있을 만한 큰 문제가 무엇이 있겠으며 싸울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신랑을 맞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신부가 이웃과 말다툼하고 있는 어리석은 신부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재림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 큰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세상에서 당한 크고 작은 불편한 것들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소망을 가진 우리들은 큰 기쁨과 평강의 복을 누리기 위해 적은 어려움과 적은 불편들을 능히 이겨나가시어 가족간에나 성도간에 서로 받아주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