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신앙 모범 – 사도행전 2:42-4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주님께서 외치셨으며, 또 주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여기서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고 성령을 받든 베드로의 설교들은 청중들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자기들의 주님이시오, 죄를 구속해 주시는 구세주로 믿고 3천명이 세례를 받으므로, 약속하신 바로 그 교회가 그 천국이 예루살렘에 세워지게된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떤 건물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 즉 세례 받으므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 자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보통 교회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고 예배당이라도 하나 새로 지어 들어가거나 또 새로 사서들어 거면 “성전 봉헌” “성전 건축”이라고 하여 건물에 “성전”이란 단어를 사용하므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임재하시었던 성전과 같은 개념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분명한 무엇이 성전인지 이미 성령을 배우면서 확인했습니다. 누가 성전이어요? 너희가 성령의 전 인줄 알지 못하느냐? 어떻게 크리스천들이 성령의 전이 될 수 있을까요? 세례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는데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이 사시기 때문에 우리 몸이 바로 거룩한 집, 즉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서 우리의 신앙이 구약의 그림자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3천명이 세례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으므로 3천 성전이 예루살렘에 탄생하게된 셈입니다. 3천 성전이 연합되어 한 교회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첫 교회가 된 것입니다. 비록 몇 구절 안 되는 본문 말씀이지만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 모범을 보여주고 있어서 너무나도 귀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 신앙의 특징을 찾아보면 우리 신앙에 적용하여 우리 신앙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 모습으로 환원되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배 처소 문제입니다.

46절에 보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라는 성전과, 집이다 2개의 장소가 나옵니다. 46절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요, 집이란 개인 집입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예배 처소는 그 당시 유일하게 한 장소만이 지정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로부터라도 꼭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야 했고, 기도를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의 담을 헐어 버리시므로, 하나님은 지성소에만 나타나심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도 계시고, 개인 집에도 계시고, 산에도, 들에도, 바다에도 계시게되므로 어디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장소가 개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초기 교인들이 어떤 개인의 집에서도 떡을 떼었다, 만찬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이며, 빌레몬서 1:2에 보면 “제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 4:15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고린도전서 16:19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함같이 신약 교회들을 보면 개인 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가졌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배당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며야하는 교회 의식이나 예배당 건물을 신성시하여 성전 예배당에 있는 물건을 성물이라고 물건을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미신입니다. 내 주님 모신 곳이 성전이요, 주님 모신 곳이 교회요, 주님 모신 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혹 이슬가정이 한국으로 가게되고 마땅한 교회를 찾지 못한다면 이슬네 집에서 교회가 모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가 편지하기를 이슬네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합니다 라고 편지 써서 보낼 수 있게되어지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2] 예배의 요소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는 전연 교회가 없었으므로 예배 내용 중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는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요소 등 예루살렘 교회의 모법에 따라 그 당사 예배를 위해 어떠한 요소가 있었는지를 찾아 알 수 있게 되는데, 42절에 보니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고, 물질 바치는 것이 있었고, 만찬 즉 떡을 떼는 일이 있었고, 기도가 나오며, 47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찬송이 나옵니다. 이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현대 교회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요소를 하나하나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①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 시에 설교가 있는데 이 설교가 바로 사도의 가르침에 해당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예배 때 지켰던 요소 중 하나인 사도의 가르침이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잘 시행되고 있다고 외형상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만일 설교를 통해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온전히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 하는 그런 말씀이 못되고, 주님께서 마태복음 15:9에 말씀하심같이 “너희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라고 하셨는데, 만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강해되어 전달되기보다는 인간의 철학과 문학과 지식과 개인의 체험이 전달되어 전하는 자의 마음에 흡족하고 듣는 자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사도의 가르침이 변질되어 있다고 한다면, 예배에 “사도의 가르침”이 빠져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강단은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사도의 가르침”으로 다시 회복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②헌금입니다

본문 말씀과 또 사도행전 4:32-34의 말씀을 보면 그 당시 교인들은 10분의 1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밭과 집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아무도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교회 것으로 공동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 그 누구도 모자란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죄사함 얻어 영적으로 구원 얻는 일이 너무 귀한 일이기에 재산, 다른 물질 같은 것은 아무 것도 귀하게 생각되지 아니했고, 자기의 영혼과 지가의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어 가질 수 있는 욕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천국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 것을 가지고 교회를 구제하고 주님을 도와 드리는, 또 개인을 구제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철저히 소유권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고, 나는 청지기로서 관리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가지고 있다 필요한 자가 있으면 나누어주어, 내 주변에 가난한 자가, 배고픈 자가 없어야 함을 깨달아 초대 교회는 물질에 관한 가장 모범적인 헌금을 한 교회로, 이렇게 사랑을 보여준 이 교회가 흉년으로 어렵게 될 때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성도들이 각각 힘대로 구호 품을 보낸 기록이 사도행전 11:19에 있습니다. 물질은 서로 교인과 교인이 나누고 교회와 교회가 나누는 좋은 모범을 우리가 보게됩니다.

③기도입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19세기의 러시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은 여행할 때도 언제나 연습용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그 이유를 말하기를 내가 만일 피아노 연습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내 친구들이 알게되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마침내 청중들이 알게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더 많이 안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그런 좋은 습관을 가졌었고, 더욱 재산을 다 내 놓은 저들인지라, 저들의 힘썼던 기도는 개인적인 어떤 번영을 위해 기도할 리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늘 나라의 확장, 전도의 문을 위해서 핍박을 이겨내고 전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였습니다. 누구나 밥이 없으면 밥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기도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하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는 기도가 위대한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떡 떼는 것입니다.

떡 떼는 것이란 영어의 번역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주의 만찬을 떡 떼는 것, 친교, 주의 만찬 등으로 불리우게 되는데 떡 뗌이란 만찬 때 떡을 떼어먹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사용된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좋은 의미로 1년에 2번하므로 보다 진실 되게 만찬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받았고, 초기 교회들은 사도행전 20:7에 보면 교회가 모이는 주목적이 떡을 떼는 것이었음을 보게됩니다. 주님에 의해 명령되었고, 사도들의 지휘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열심히 준수했던 주의 만찬을 어떤 의견에 따라 예배에서 뽑아내고 1년에 2번 정도 한다고 하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못됩니다. 사실상 1년에 2번하므로 보다 진실 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이유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1년에 2번 드려서는 아니 되듯, “성수주일”을 강조한다면 마땅히 그 주일에 예배드려야할 모든 요소가 본질 그대로 지켜서는 성수주일을 강조해야할 것입니다. 매주 만찬을 하지 않은 교회는 초대교회 예배 모범에서 벗어난 것이요, 또 인간의 가르침을 용납한 교파이므로, 만찬뿐 아니라 많은 것을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변경시켰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뿐 아니라, 주의 만찬은 매주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⑤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찬미 대상은 분명히 하나님이었습니다. 또 기쁨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알찬 찬미를 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인간의 귀를 위해 목소리 자랑 같은 허탄한 인간 접대의 찬미는 전연 발을 부치지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악기가 있었고,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었지만, 교회 시작부터 이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마음으로 찬양하기 위해 전연 악기가 필요 없었습니다 이렇게 1000년을 지나는 동안에 예배에는 악기가 들어와 하나님을 더 잘 찬양해 보겠다는 인간의 이론이 들어오게 되고 찬양은 점점 인간의 귀를 중심한 찬양으로 질이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순수한 찬양으로 환원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연합입니다.

크게 3번째로 초대교회의 특징은 연합이었습니다. 교회가 2로, 3으로 나누어지기 마련이고, 2, 3의 구분에서도 예수 믿는 목적이 다르기 마련인데 초대교회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4:32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말씀 듣고, 기도하고, 떡을 떼고, 찬미하는 일에 전념하고 주님의 명령대로 땅 끝까지 복음 전하고 가르칠 사명을 감당할 일에 마음을 같이하고 한마음 한뜻이 된 것입니다. 아주 귀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예루살렘교회는 47절 보면 온 백성이게 칭찬을 받았고, 주님께서 구원 얻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해주심으로 교회는 3천명, 5천명으로 질적, 양적으로 성장했음을 보게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또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나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시는 영생을 주시는 분, 구원자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나의 주시요,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어 실천한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그 나머지 것을 아버지께서 다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한 분들입니다. 물질과 주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믿고 실천했으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여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부자 청년에게 한 말을 믿고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육적 번영이 아니라 오로지 영적 구원이요, 전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견이 엇갈릴 수 없습니다. 이기적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욕심으로부터 해방되고, 진실 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되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교회는 성장하게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시오, 구세주이심을 확신하는 신앙과 그들의 순수한 예배와 교인들의 일치된 연합을 본받아 그대로 실천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