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류관 쓴 스데반 – 사도행전 6:8-15; 7:55-60

스데반은 성경에 기록된 첫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즉 우리의 기억 속에 전혀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값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오고 믿음이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국 기독교 순교사를 들추어보았습니다. 맨 먼저 순교당한 분은 누구이고, 신사참배 때에, 6.25 때에 얼마나 순교당했나 궁금해지더군요. 기록에 있는 첫 순교자로서는 토마스목사란 분과 지달수란 분이시더군요. 한국에 물건을 팔아볼까 하고 미국상선이 한국을 가고싶은데 한국에 대해 너무 몰라 한국선교 위해 몰래 한국에 들어와 본 경험이 있는 토마스목사의 안내를 받아 한국 항구에까지 와서 입항을 요구했으나 한국정부가 허가하지 않았고, 갑자기 바닷물이 많아져 모래사장까지 밀려왔다가 물이 나가므로 배는 모래사장에 박혀 빠져나가지 못해 한국해군이 포격을 가해 배에 있는 사람 모두 죽을 때 토마스목사도 순교를 당했는데, 그때가 1886년 10월이었데요. 그런데 포격을 당하기전 실고 온 중국어 성경을 바다에 다 던져 누구라도 읽어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던져 넣었다는 사실을 안 한국 당국에 의해 주워져 불살라졌고, 또 민간인들도 혹시 손에 쥐었다가도 목숨이 위험하여 불살랐는데, 그 중 지달수란 청렴한 학자가 성경책을 손에 쥐게 되어 열심히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이 인생의 행복과 영생하는 구원의 도리가 적혀 있어 도를 깨닫고 이웃 친척과 친지들에게 이 도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평양시내에 퍼져 소문을 들은 관헌은 지달 수란 분을 불러 위협하고 더 이상 도를 전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 생명을 버릴지언정 이 진리는 버릴 수가 없다고 단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대동강변에 사형대를 세우고 평양시민이 보는 가운데서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으나 마귀는 어떤j 형태로든지 박해를 하게 되었는데, 만주나 시베리아에 선교 나가서 순교당한 분이 기록에 남은 분이 16명 정도, 일제시대 신사참배 결사반대로 순교당한 분이 20명 정도, 북한 공산당에 순교당한 분들이 30명, 6.25사변으로 교직자가 40명 정도요, 교회별로 교인들을 한꺼번에 죽게한 기록을 보니 예수 믿는다고 73명, 66명, 43명, 24명, 20명, 이렇게 6,25때 학살을 시켰더군요. 한국만 하도라도 이것은 개신교 순교자일뿐 카토릭 순교자는 또 별도로 있습니다. 스데반이 제1호로 순교 당한 이후 수없는 성도들이 순교당했는데 우리는 그들이 믿음에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고 또 힘을 얻어 스데반의 모범적 신앙을 닮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이란 이름은 면류관입니다.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진 면류관, 그런데 그가 믿음에 승리하여 이름대로 면류관을 썼습니다. 스데반은 지난주 예루살렘교회에서 7일군을 뽑았는데 그 7일군 중 하나였습니다. 12사도는 모두 히브리파 사람들이었는데 7일군은 모두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사람들이라 했지요. 7일군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집사라는 교회 직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성령충만한 스데반

7명을 뽑을 때 어떤 자격자를 뽑았던가요? 6:3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라 했습니다. 또 칭찬을 듣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스데반이 7명 중에 뽑혔으므로 스데반 역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이고 칭찬듣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6:5에 보면 7명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6:8에 보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됩니다. 또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 변론자 스데반

스데반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 희랍어를 쓰는 자들이 별도로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 모이므로 그들을 전도하기 회당을 찾아가 도를 전했으므로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통에 어긋나는 가르침인고로 각 회당에서 여러 유능한 자들이 찾아와서 스데반과 토론하지만, 10절에 보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스데반은 가르치기를 주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라든지, 또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우리는 꼭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이 진리를 유대인들이 토론에서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니 스데반을 모함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죽게할 도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이었을 때 스데반의 가르침을 들었고 변론한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잡아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15절에 재판받기 위해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는데,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3] 순교자 스데반

스데반은 7장 2-52절까지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등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거역하고 선지자를 배척한 사실을 지적해주면서, 결국 선조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의인을 잡아죽인 살인자요, 의인이 전해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그들의 죄를 지적함으로, 그의 설교를 잘 듣고 있던 그들이 갑자기 폭도같이 변해 그를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로마법에 어긋난 처사이지만 흥분한 그들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에 사울이라는 사도 바울이 함께 했음이 58절과 8장 1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행2:37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3천명이 구원얻은 사실이 기록되는데, 7:54에 보면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듣고 이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갈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살인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스데반이 순교 당한, 월계관을 쓴 모습입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찟기는 순간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하고 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 보이셨던 그런 평안과 자비를 나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 월계관을 쓴 스데반의 교훈을 우리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믿음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지혜 충만한 사람이었으므로 월계관을 쓰기에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충만을 가져다 준 것은 오로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기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순종함으로 은혜를 깨닫게 되고, 능력 충만과 지혜 충만까지로 채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충만은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므로 가능해집니다. 믿음과 성령과 은예가 충만키 원하시면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에 소망을 전혀 두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한창인 아파트 투기, 광역의원에 욕심이 없었고, 호화로운 가구나 여성들의 자랑인 보석들에도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소망은 말씀전도요,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꾸 우리를 끌고 가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에 말려들지 맙시다. 좋은 저택도 좋고, 좋은 학교도 좋되 더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살게될 믿음임을 깨닫고, 믿음 좋은 사람 부러워하며, 믿음 키워 하늘나라에 사는 소망을 두며 사는 생활되시기 바랍니다. 사업 키우기 위해 믿음 팔지 말고, 사업 큰 것 줄여서라도 믿음 키우시기 바랍니다. 일류대학 가기 위해 믿음 팔지 말고, 대학 못 가도 믿음 지켜 하늘나라에서 월계관을 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셨고, 스데반도 자기를 죽인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사랑하고, 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이 월계관을 쓰는 믿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돌로 쳐죽인 사람보다 더 나쁜 친구가 어디 있겠어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일 수 있었는데, 우리가 미워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친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읽는다고, 예수 믿는다고, 전도한다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시면서 우리는 너무 행복한 시기에 있음을 한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경 읽는 자유를 누리며 할렐루야! 외칠 수 있어야 하겠으며, 전도의 자유 누리며 아무도 나를 죽이지 않는 사실을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생활 하다보면 어느덧 스데반이 썼던 면류관을 우리에게 쓰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면류관을 쓰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