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기록상 첫 순교 당한 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12제자에 드는 사람도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격인 7명의 구제를 위한 봉사자 가운데 한 분으로. 비록 집사같은 구제봉사의 임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도 이 회당 저 회당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능력있게 전하는 그를 시기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성전과 모세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옥에 답아 가두고 재판자리에 서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재판자리에 서셨으며 같은 재판관에 의해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혔던 바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 스데반이 재판을 받고 있으므로 스데반은 자기도 사형 심판이 있을 것을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임을 알면서도 성전과 모세를 모욕한 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아니요 라고 간단히 대답하여 사선을 넘어 보려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담대하게 재판하는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임을 지적해주는 긴 설교를 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의 설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1]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고 있습니다(2-7).
그가 소개한 간략한 역사를 보면
①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복을 주어 창대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던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②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사실을 소개하며,
③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로 다른 나라에 400년간 종노릇, 노예생활 했던 것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④노예생활로부터 다시 구출해주시어 약속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구원의 계획, 축복 언약의 성취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8-43).
①요셉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자기 가족을 구원케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누구지요?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 이삭의 아들은 야곱, 야곱은 12아들을 낳았는데, 요셉은 12 아들 중 하나입니다. 형들이 시기하여 애굽으로 팔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요? 9-10절을 보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 아시지요? 요셉의 부모와 자기를 판 형들이 사는 나라는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없으므로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양식 구하러 왔다가 동생 요셉을 만나게 되었고, 요셉은 자기를 판 형들에 보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선대하고 바로왕의 배려로 애굽의 좋은 땅을 따로 지정해주어 살도록 이민허가를 해주어 살도록 하여 75명이 이주(창세기 70명)합니다.
시샘이 나서 팔아버렸는데 오히려 그가 자기들을 살렸던 사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대로 구원의 은총으로 배신자들을 포용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됩니다.
②모세를 배신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산파들을 시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사내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 마자 죽게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부모의 배려로 갈대상자에 띄워 강에 버려졌는데, 마침 바로 왕의 공주의 건짐을 받게 되어 왕궁에서 40년을 살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택함과 부르심이 있어서 노예생활하고 있는 자기 민족을 돌아볼 생각이 있어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움으로 이를 말리고 꾸짖자, 그들은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책망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40년동안 살은 애굽에서 도망쳐 미디안 땅에서 40년을 다시 준비케 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거쳐, 유월절의 이적을 거쳐 애굽으로부터 떠나와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그들이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모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들을 인도한 지도자 모세가 없으니 자기들을 인도한 신을 하나 만들기로 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하고 기뻐했디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마음이 애굽으로 향했다고 했습니다.
[3] 51-53에 보면 이렇게 역사적으로 설교를 이끌어 오던 스데반은 분위기를 바꾸고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라고 지금 재판하고 있는 그들이 죄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목이 곧다고 지적했습니다. 교만해서 목이 빳빳하고 수그러들지 못한 죄입니다.
②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어서 그 마음과 귀에서 그리스도를, 예수를 거절하고 영접하려는 순종하려는 마음 바탕이 없는 자, 성경을 거스린 자, 하나님의 뜻 거역하는 자, 바로 너희들이 의인 예수를 잡아준 자, 십자가에 못박은 자, 말씀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한 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적을 받은 자들이 54절에 보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재판 과정 끝내지 아니하고 돌로 쳐죽이므로 순교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는 스데반을 잡아 옥에 가두고 재판하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 스데반의 설교가 지금 우리의 삶에 생활에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스데반이 지적한 목이 빳빳하고 교만한, 목이 곧은 자들이 우리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순종치 아니하는 할레받지 아니한 마음과 귀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기다리고 참으면 모세가 내려와서 지도해 줄 터인데 조금을 못참아 우상을 만들고 옛고향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신앙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조금 어려움 있다고 교회를 떠나거나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더 좋아하는 우상들을 각자 만들어 우상에 빠져 되돌아갈 수 있는 우리들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리에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주일을 범했거나, 남을 미워했거나, 남을 속이거나,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또는 내 마음이 평안하지 아니하고 기쁘지 아니하고 세상 근심에 빠져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리에 있음을 충분히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속성이 있는 자들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축복은 옛 고향 친척집을 떠나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도 , 네 씨가 창대케 되리라는 축복도 옛 고향 내 친척 아비집을 떠나야 하는 조건, 즉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지 아니하고는 가나안 땅에 발을 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옛 고향이란, 아비집이란, 애굽이란 내 아집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나입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치 아니한 나입니다. 육의 나는 아무리 이스라엘의 피가 있다하더라도 가나안 땅에, 천국에 갈 수 없고, 아무리 이방인인 죄인이라도 죄의 속성인 나에게서 떠나서 말씀 안으로 순종 안으로 들어갈 때, 놀랍게도 종노릇한 소망 없는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 천국, 평강, 소망의 세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잘 믿었던 사람도 일시적으로 믿음이 떨어져 마귀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마귀의 사단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다던 부부가 당장 헤어져야 할 정도로 심각하면 사이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친했던 형제사이가 원수같이 사이가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생각에는 옳으나 육의 열매를 맺는 경우로 하나님의 뜻에, 성령의 뜻에 어긋나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아직 애굽에 있다며, 내가 아직 아비 집에 그대로 있다며 평강과 기쁨과 자유를 얻게 하는 옛 육이 모습에서 벗어 나와 축복의 자리에 들어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설교를 아멘으로 받아 축복받는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마음에 찔렸으면 회개하라는 교훈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반응이 나오고, 베드로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하고 세례받고 구원얻는 반응도 있었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마음에 찔렸으나 회개한 것이 아니고 이를 갈았다고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갈고 회개치 아이하고 오히려 돌로 쳐죽임으로 살인죄까지 저지르는 결과적으로 지옥을 선택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아비집 애굽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으며 설교들 듣고 이를 갈고 더욱 진리에 거스리는 선택도 가능하고,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옛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발을 옮겨질 선택도 가능합니다.
우리 한인교회 성도들은 모두 아비 집을 떠나 축복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