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개종 – 사도행전 9:1-18

사도행전은 구원의 역사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3천명, 5천명의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사실을 기록해주고 있으며, 교회에 핍박이 심하므로 사도 외에는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모든 땅에 흩어지게 되므로 봉사자로 뽑혔던 7명 중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고 주께 돌아온 기록을 보게되며, 지난 주에는 이사야서를 읽으며 가는 내시를 빌립을 통해 일하게 하심으로 그가 구원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개종된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개종에 따른 기록이 본문 9:1-18에 있고, 또 사도행전 22:1-16, 26:1-18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는지 소개하는 글을 통해 알게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핍박자 사울(1-2)

사울은 유명한 희랍의 도시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희랍학문의 보금자리요, 상업중심지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했으며, 바리새파이며 로마시민권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다소에서 희랍학문을 잘 배우고, 그때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유대의 전통으로는 비상시를 대비해 한가지씩 기술을 익혔습니다. 자라서는 예루살렘에서 가마리엘 문하에서 양육되었습니다. 이렇게 교육받고 울법을 철저히 지켜왔던 사울은 갈 1:14에 자기를 소개하기를 “내가 내 동족 중 어떤 연장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 열심이 지나쳤던 사울로서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신앙을 철저히 싫어했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라는 불경스러운 믿음이나 율법을 버리고 새로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율법 모독죄요, 성전을 헐고 3일만에 짓는다든지 성전을 떠나서도 예배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은 성전 모독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요 마땅한 일로 생각하여 죄의식 전혀 없이 앞장서서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미 스데반 순교시 그를 죽이는데 앞장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것입니다.

메시야라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나사렛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장사됨으로 기독교란 허무맹랑한 종교로 믿었던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지고 가서는 부활했다고 믿고 있는 제자들의 꼴보기가 싫었고, 반면 그들의 순교를 각오한 믿음에 시기가 났던지 9:1에 보면 제자들에 대하여 살기가 등등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다는 말은 종교심을 이미 감정적 처리를 하고 있다는 표현이겠습니다. 살기등등 하여 예루살렘에서 140마일쯤 떨어진 다메섹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청하여 잡아올 공문을 얻어 가지고 남녀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예루살렘까지 데려다 재판을 받게 하고 죽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씨를 말려버릴 셈이었습니다. 당당하게 다메섹을 향해 말을 타고 길을 가고있는 핍박자 사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 주님 만나 거꾸러진 사울(3-9)

3절을 보니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고 했으며, 4절에 보니 그가 땅에 엎드려 들으니 소리가 들리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대낮 정오쯤 되었는데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나타나므로 땅에 거꾸러진 것입니다. 이빛은 주님의 빛, 주님의 광채였습니다. 주님이 사울에게 나타났을 때에 주님을 보는 순간 그는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고전 15:8에 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기에도 보이셨다”고 하고 있는데, 사울은 예수를 만나뵙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러 가는 사울에게 주님께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당당하던 사울은 거꾸러지고 주님의 권위에 굴복되어 “주여 뉘시오니이까”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시었습니다. 행 22:20에 보면 사울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하니, 주님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너의 모든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시었습니다.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가서 사흘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은 빛은 보았지만 주님 뵙지 못했고 무슨 소리 났지만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3] 성도된 사울(10-18)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를 환상 중에 부릅니다. “아나니아야” 하시니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고,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자를 찾으아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사울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느니라”하시었습니다. 이때 아나니아는 자기가 사울의 살기등등한 핍박의 행위를 들은 대로 주님께 보고해드립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사울을 통한 주님의 하실 일을 알려주십니다. 사울이 기도 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살기등등한 그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로 변화되었음을 알려주시고, 이젠 아나니아 자기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되는 환상을 사울이 보았다고 해주심으로 아나니아가 초면부지의 사울에게, 또 살기등등했던 사울에게 나타나도 두려움도 사라졌고 오히려 친근함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17절에 보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니, 18절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고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 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며, 또 이를 우리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예수를 만나므로 누구나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메섹의 성도 체포하여 끌고 와야할 자가 오히려 눈이 감겨 친구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육적으로는 눈이 떴었으나 영적으로는 눈이 감겨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던 자를 오히려 육적으로 감겼으나 영적으로는 눈이 밝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살기등등했던 거칠은 황소를 아나니아가 안수해주도록 시키는 대로 따르는 온순한 양이 되게 하시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을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이라고함 같이 원수가 형제되도록 했습니다. 울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 지금의 믿는 열심히 의로와져 하나님의 상을 얻을줄 알았던 자기의 선행이 눈을 뜨고 보니 오히려 누더기 옷과 같이 되어 쓸모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일평생 지켜온 율법은 사울에게 변화를 주지 못했는데 몇초 동안에 일어난 주님 만남은 그의 모든 것을 변하게 하였습니다.

주님 만나기 원하는 자에게 주님 나타나실 것이고, 주님 말씀 사랑하는 자에게 변화주시어 말씀 깨닫는 능력도, 시험이기는 능력도, 내 성격, 내 습관 바꿔주시는 변화를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죄인 중 괴수도 구원받는 자리에 있다했는데 어떤 흉악한 죄인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나니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특별한 사건을 통해 택해주시었으나, 주님께서 홀로 그의 구원을 이루심이 아니요, 아나니아라는 무명의 제자를 통해 세례를 베풀게 하시고 사울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실입니다. 무명의 제자이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행했을 때 크나 큰 기적을 낳게된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할 사도 바울이 구원 받도록한 사실입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권하므로 일어나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얻어 구원얻고 바로 그 구원의 진리를 그대로 세계만방에 전함같이, 우리 모두는 다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되지 아니해도 상관없습니다. 평범한 아니니아 같은 인물이 되어도 하나님 안에서 큰 역사를 이룬 결과가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겠다고 부르실 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큰 인물도 사람의 손을 통해 말씀을 받게 하시고 세례받아 구원받게 하심을 믿어 주님께서 하실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일은 우리가 꼭 하도록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을 받았으나 물세례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 교파 중에는 성령의 세례를 비성서적으로 가르쳐 개인적인 체험인 뜨거움이라든지, 무엇을 보았다든지를 성령의 체험 또는 성령을 받았다든지,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물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게 이것은 비성서적인 가르침이요, 주님의 구원의 뜻을 거역하는 결과인 것입니다.

행 10장에 고넬료의 가정도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나 구원의 세례인 물세례를 받았고, 사도 바울은 성령을 체험했으나 죄씻음 받기 위해 물세례 받았으며, 행 19장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구원의 세례도 받고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해 방언도 예언도 했는데, 물세례가 필요 없다는 성령파 주장은 비성서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성령의 체험했어도 주저하지 말고 죄사함 주는 물세례, 침례를 받아야합니다. 죄용서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떤 교회 교인이 되기 위해 받은 침례는 성서가 말하는 세례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죄용서함과 상관없이 행하는 일반 약식 세례는 그 형식면에서 나 목적면에서 사도행전에서 가르치는 세례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용서함을 받기 위해 많은 물 속에 장사지내는 침례를 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은 어떤 교파의 교리가 아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 받아 행한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구원은 우리 인간의 손을 통해 이루심을 믿으시고, 주님의 손이 되어서 죄사함의 진리,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 구원을 이루게 하는 주님의 세례를 주님의 명령대로 베푸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