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첫 번째 설교 – 사도행전 13:13-43

지난 주에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하는 일로 따로 세우고, 협조자 마가 요한과 함께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 첫 지역인 구부로 섬의 살라미와 바보에서 복음을 전한 사실을 통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보에서 전도를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눈이 멀게 만든 이적이 나타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믿게 만든 큰 성과를 거두었던 사실을 통해 바울의 일행이, 또 우리가 크게 격려받고 전도에 힘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1차 전도여행 다음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일을 통해 교훈 받고자 합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13-14)

[2] 바울이 행한 설교(15-41)

[3] 전도의 성과(42)입니다.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13-14)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시작했던 출발지, 즉 보냄을 받았던 교회가 어디지요? 안디오 교회, 즉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입니다. 거기서 출발하여 구부로 섬의 살라미아와 바보 두 도시를 거쳐서 전도하고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버가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전도를 위해 무엇인가 했으리라 봅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올 때 이 버가에 다시 오게되는데, 그때는 도를 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버가라는 도시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마음 아픈 기억을 주는 도시가 되었는데, 함께 여행을 떠났던 마가 요한이 여기서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사실입니다. 마가가 돌아간 이유를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지 않으나 많은 위험이 따르므로 자신이 없고 겁이 난 나머지 집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 돌아가게 했으리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을 보면 되돌아간 사실이 무척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갈라디아 지방에 속했던 현재는 터키 중부의 폐허지역입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비시디아와 부르기아의 경계에 있던 중요 도시인데,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은 아니지만 수리아의 안디옥과 구별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불리었던 것 같습니다. 버가에서 안디옥까지는 약 160km정도 되는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이 있었던 전도에 어려움을 가져다 준 곳이었다고 합니다. 안디옥 도시는 해발 3,600 피트의 고원지대에 있었다고 해요.

바울과 바나바는 이 안디옥에 도착하여 전도하게 되었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안식일에 예배드리려 모여 있는 회당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이곳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2] 바울의 첫 번째 설교(15-41)

유대교에서는 누가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쉽게 풀거나 깨달음을 말할 기회를 주게되며 특히 외부에서 온 손님에게 그런 우대를 준다고 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나서는 바울 일행에게 말씀해줄 것을 부탁하게 되므로 그렇지 않아도 바울은 말씀을 전할 목적으로 회당에 들어간 것인데, 성령이 역사하시어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고 말합니다. 청중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또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나 봅니다.

그는 설교 방식을 스데반이 행한 설교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스라엘 선조들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결론을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 구원얻도록 하는 논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논법은 청중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고 끝에서는 때려부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설교 요지는 (1)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사실, 아브라함을 통한 축복의 자부심 (2)애굽에서 노예 생활했으나 하나님이 돌보시고 인도하시어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사실 (3)광야 생활, 불과 구름기둥의 인도, 만나와 메추라기 (4)불평불만, 40년간 광야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돌보심, 가나안 땅 정복 (5)가나안 정복 후 이기적이요, 자기만족으로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부르심을 잊고 살았으나 그래도 소수의 울부짖음의 소리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지도할 사사를 주셨는데, 이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요 하나님 뜻 전달하는 자였다 (6)사무엘 선지자 주셨다. 그럼에도 불만족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 원치 않고 (7)그들이 선택한 왕으로 훌륭한 사람을 요청했으나 하나님이 욕심대로 허락하심 (8)사울이 하나님의 뜻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위를 폐하시고 다윗왕 하나님이 선택 (9)그의 후손 중에서 예수님을 낳게 하셨고 (10)세례 요한 보내 그의 길 준비하심 (11)십자가에 못박히고 (12)부활하심 (13)그가 죄용서 해주시는 의롭게 해주시는 구세주이시며, 세상 심판 가져오는 분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세주가 오시기까지의 그의 족보를, 하나님의 돌보심을 역사적으로 풀어준 것입니다.

 

[3] 전도의 큰 성과(42,43)

42절에 보니 “저희들이 나갈새.” 저희들이 누구인가요? 바울과 바나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43절에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두 설교를 듣고자 온 분들이요, 그 누구도 설교에 거역할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며, 또 우리 교인은 내가 드리는 설교에 많이 동화되어 받아들이는 편이므로 기쁘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해보면 청중만 바뀌어도 귀가 달라서 어떤 교회에서는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적지에 들어가 돌로 칠지도 모르는 아니 마가 요한이 도망칠 만큼 험악한 곳인데도 구약으로 시작하여 말씀을 대답하게 전하여 이런 큰 성과를 얻게된 것입니다. 그가 성령을 의지했고 자기 힘 의지 아니했고, 그가 하나님 영광만을 생각했지 자기의 유익, 자기의 영광 위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리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생활에 적용할 교훈이 무엇일까요?

 

전도의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1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를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런 위험 무릎쓰고 전도하는 바울의 사명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철저하게 구원의 계획 세우시고 섭리하셔서 우리를 구원시켜주셨는데 그 참 뜻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얻기까지의 역사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모로 역사하신거예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죄에서 살려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이 사랑을 위해 우리가 선교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선교여행 했습니끼? 복음을 전했습니까? 선교 위해 기도했습니까? 아니 내 생애에 주님 때문에 얻은 자국이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굶었던 일 있습니까? 부끄러움 당하고 수치를 당했습니까? 잠을 못잤습니까? 헐벗었습니까? 강도 만났습니까? 죽을 뻔 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기 원했습니다. 주님 사랑한 흔적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뜻 저버리고 이기적으로 하나님 저버린 삶이었습니다. 결국 주님까지 못박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어 누구든지 저희 죄 자복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얻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떠난 자는 떠나더라도 남은 자의 수고로 복음이 널리 전파된다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이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