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결과 – 사도행전 13:42-52

지난 주에는 우리 성도들 배타고 어디로 여행했던가요? 비시디아 안디옥. 그곳에 가서 누구의 설교를 들었던가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요점적으로 전하고 결론으로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분이요, 그분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실 분이요, 그분만이 우리의 재판장이 되실 것을 강조하며 바로 이 메시지를 믿도록,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믿는 자의 축복을 강조했으며, 또 믿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멸시하는 자들에게 쓰여진 예언서를 인용하여, “보라 멸시하는 자들아, 너희가 놀라고 망하라”는 이 말씀이 진리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는 너희에게 미칠까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주 예수를 믿도록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에게 강권했던 것입니다. 이 설교의 반응이 42,43절에 기록되었고, 그 다음 안식일에 또 설교를 청함받고 설교를 했는데, 그 결과가 44-52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겠는데, [1]청중들의 반응 [2]말씀전한 설교자의 태도 [3]하나님의 예정으로 나누어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훈이 우리 각자의 마음에 와 부딪혀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시간되시게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청중들의 반응

42절에 보니 마치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사람들이란 단어가 이방인들이라 되어있고, “말씀을 하라”의 “하라”가 “간청하여 탄원하다”란 뜻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설교 다시 듣고자 부탁한 것입니다. 또 43절에 보면 다음 주까지 기다리지 못한 당장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폐회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자와 더불어 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44절에 보면 1주간 동안 온 성에 사도 바울의 참신한 설교가 소문이 나서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의 사람이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부도덕, 부정과 권위주의적 전통적인 종교에 싫증이 난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설교는 생명력이 있고 소망을 갖게 해주는 죄사함과 영생의 vision을 분명히 제시해주었기에 온 성 사람들이 갈급한 마음 가지고 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설교를 듣고는, 48절에 보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되어 있고,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2절에 보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지를 환영하고 열광하는 청중이 있는가 하면, 45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했다고 기록이 있습니다. 설교 도중에 설교를 반박하고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기는 당연합니다. 온 성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했고, 그 말씀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설교와 전혀 다른 힘을 가졌으므로 시기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5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그 지경에서 쭟아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귀부인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부인이요, 권세있고 뷰유한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여자들을 선동해서 결국 두 선교사를 그 도시에서 추방해버린 것입니다. 주님 돌보던 여자들도 있었고 제자들에게 박해를 가한 이런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선교사는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됩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는 청중에서 듣고 택함받는 무리가 있고, 또 마음으로 오히려 반대하는 버림받는 무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한 상에서 떡을 먹었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를 판 것 또한 같은 진리입니다.

 

[2] 전도자들의 반응입니다.

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반대하는 무리들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당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마땅히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청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 전하기를 원하시어 이렇게 복음을 들고 유대인에게 찾아 왔으나 스스로 그 구원의 길을 거역하니 결국 너희들 스스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판정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결과적으로 택함을 받지 않은 무할례자인 이방인에게로 복음 들고 가게되며, 나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이방인을 위한 일군으로 세워주신 것이라고 전도대상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이동입니다. 에서가 장자이나 장자의 직분이 야곱에게로 넘겨지듯, 택한 자가 장자의 직분을 못 지키므로 선택이 바뀌어 이방인이 복음전파대상에 들게 된 것입니다.

51절에 보니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털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보내실 때, 누구든지 제자들을 영접치 아니하고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셨고, 그것이 증거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그대로 했던 것입니다.

 

[3]하나님의 예정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한 성구에 대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캘빈의 예정론을 대체로 믿고 있는데, 이 예정론은 롬 8:30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정론자들은 하늘나라에 갈 자는 처음부터 인간 개인 개인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요 6:44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고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 가지고, 아무리 믿으려해도 하나님께서 끌어주시지 않으면 주님께 올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본문 48절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한 절만 본다면 누가 믿었느냐하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믿었으니, 작정에 들지 않은 자는 믿지 아니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정론자들은 누가 구원받을지 지옥 갈지 다 예정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믿지 아니하려해도 구원받을 자는 결국 믿도록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회개시키며, 아무리 잘 믿는 것 같아도 예정하지 않은 자는 다시 타락한다고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심판이 필요없지요. 각자 행위대로 심판한다 하셨는데,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나왔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심판하실 결과가 되니 모순이지요. 공평, 정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으나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므로 결국 이방인을 택하셨다는 뜻은 무엇이며, 12제자 택했으나 배신한 가롯 유다는 빠지고 대신 맛디아로 세우신 뜻은 무엇입니까? 아니 요 3:16의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신다”는 뜻은 무엇인가요? 엡 2:8에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하셨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젠 이방인도 택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이끄시는 그의 역할을 다하셨고, 이젠 남은 것은 인간이 그의 부름에, 그의 초청에, 이의 이끄심에 응하여 입을 벌려 말씀을 받아먹고, 손을 벌려 주님의 손을 잡아야하는 인간의 역할만 남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정이란, 택함이란 하나님의 초청과 인간의 응답이 합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초청만 가지고는, 택함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혼인잔치 초청은 받았으나 이 핑계 저 핑계로 잔치에 참여치 못한 비유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할 일을 하지 않은 예를 말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는 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의 반열에 끼게 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46절과 같이 스스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옥 갈 자를 예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옥을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만민 예정하시고 구원받을 자로 만민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나 올 수 있도록 만민을 이끌어주십니다. 누구의 손도 잡아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가 손을 내밀고 초청에 응하고 믿어야 예정, 초청, 이끎의 성과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목말라 하는 자들이 되자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같이 진리의 말씀 듣기 좋아하며, 다음 주에도 이런 생명의 말씀을 듣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교인들 되어야 합니다. 아니 다음 주까지 참지 못해서 예배 끝나고 또 남아서 말씀을 또 듣는 열정을 가지셔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그리워 온 성이 사람이 다 모였다니, 교회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성황을 이루는데 말씀을 듣고자 몰려드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 들음에서 나온다 했지요. 진리를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어야 구원 얻게 되는 것이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 속에 드는 것이지요. 듣지 아니하면 스스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진리를 몹시 갈급해 하고 목말라하여 늘 말씀을 듣고 가까이 하는 여러분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 중에 들으셔야 합니다.

 

둘째, 전도에 용기를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반대파에 의해 쫓겨나 이고니온으로 가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건 소수였고, 시기심 때문이었고, 말씀을, 진리를 듣고자 하는 순박한 마음 가진 자들이 온 성에서 다 몰려왔고, 다음 주에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자들이 있었고, 폐회 후에도 2차로 또 말씀 들었던 진리 고수, 말씀 선호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할 때 예수 싫어하고, 비판만 일삼는 사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집 나올 때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발을 다른 집으로 옮기십시오. 복음을 몹시 그리워하고 고마워하는 순박한 자들을 만날 것입니다. 너무 변질된 기독교에 염증을 느껴 순수한 복음 듣기를 기다리고 그런 교회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확신가져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 갈급해 하시고, 또 말씀 갈급한 사람 만나 말씀 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