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안디옥 교회에 이단 사상이 들어와 한때 혼란을 가져왔으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보내온 편지 내용과, 또 말로 표현을 전달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유다와 실라의 권면으로 문제는 완전히 수습되었고, 그 기회에 교회가 말씀을 더 잘 가르침으로 교회가 말씀에 굳게 서게되어 교회가 평안과 기쁨이 충만했다는 사실을 통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보낸 편지는 바울서신이나 신약의 어떤 책이 써지기 전이므로 성경문서 중 제일 첫 문서이기도 한 가치있는 문서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서 제2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경과를 살펴보며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전도여행 목적의 합의(36)
[2] 전도여행 방법의 의견 충돌(37-39)
[3] 두 팀의 선교여행 시작(40-41)
[1] 전도여행 목적의 합의(36)
1-2년이나 걸린 긴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 교회 내에 발생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그 교회를 중심해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영적으로나 육적인 힘을 보충하고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날 계획을 갖게 됩니다. 36절 시작에 수일 후라는 표현이 있으나, 그 수일 후가 짧은 기간의 날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머무는 기간이 최소한 1년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낳은 두 선교사는 전도 받은 지역의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나 가서 보고 더 가르치고 믿음을 격려하고자 복음을 전했던 각 성에 다시 방문해 보자는 의견을 가졌고 두 사람은 합의를 했습니다. 즉 제자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방문하자는 것이지요. 1차 전도여행을 통해 돌에 맞아 거의 죽게되었고, 추방당했고, 심한 핍박을 당했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시 1-2년간의 긴 기간동안 그 교회들을 다시 방문해보자는 그들은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의 생애를 오로지 주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에서 나온 것으로 두 사람은 쉽게 합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희생과 사랑의 대가로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2] 전도방법의 의견 충돌(37-39)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로 원칙적인 합의는 되었는데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이냐 데리고 가지 말 것이냐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그 문제가 끝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해, 그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이 갈라져서 각각 전도여행을 떠나야하는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 마가 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며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도중에 탈락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나약한 그런 사람은 새로운 전도지역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한번 재판관이 되어볼까요? 마가 요한은 데리고 갔어야 했나요, 데리고 가지 않았어야 할까요? 두 사람의 의견은 모두다 옳았습니다. 바나바로서는 자기의 조카 마가 요한이 1차 전도여행에서 되돌아 가버린 실수를 뉘우치고 재도전해보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을 훈련하는 의미로도 꼭 데리고 가서 마가 요한이란 인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꼭 데리고 갔어야 한 것이고, 새로 전도된 지역의 성도들을 위해서는 좀 희생적이고 열렬한 전도자가 가야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함께 간 선교사들에게도 힘이 될 것이므로 맥을 빠지게 했던 마가 요한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은 철저히 개인의 욕심이나,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주님을 위해서는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에 대한 관심은 우리 성도들에게 다시 강조하지만 바나바란 이름 자체가 ‘위로의 아들(권위자)’란 사람이며, 그가 사도 바울만해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사울이 전도자 된 것을 신임을 하지 않으려 할 때, 사울이 진정한 제자가 되었음을 증언해주었고, 사울이 개종 후 오랜 세월동안 고향에서 지내고 있을 때 안디옥 교회에 데려와 사역 훈련을 시킨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지요. 이와 같이 그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온유의 지도자요, 바울은 엄격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강성의 지도자이므로 두 사람의 의견은 당연히 다 옳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기의 의견은 주를 위해서는 절대 옳을 것이므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각각의 방법으로 두 팀으로 나누어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생각난 것은 둘 중 하나가 양보했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었는데도 두 사람이 상처를 감수하면서 갈라섰어야 했을까 입니다. 어려운 1차 전도여행도 둘이 잘 마치었고, 또 안디옥 교회의 문제도 어렵사리 잘 수습했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일로 갈라져서 여행을 떠났다니 좀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 떠날 당시에 마음에 섭섭하고 마음에 상처가 있었겠지만, 목적대로 각각 복음을 전했던 교회를 돌아보는 일을 지체없이 맥이 빠지지 않고 실행했고, 그후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거나 또 바울과 마가 요한 사리에 불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딤후 4:11의 기록을 보면 바울은 마가 요한이 자기에게 유익하므로 데려 오라 하였고, 고전 4:6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에 대해 호의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한 의견 충돌에 개인 감정이 전혀 작용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3] 두 선교팀의 출발(39-41)
결국 바나바는 예정대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부르 섬으로 갔고, 바울은 예루살엠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파송되었던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바나바는 배를 타고 해로로 갔고, 바울은 육로로 갔으며 두 사람 다 처음 방문지역은 자기 고향이었습니다. 바음의 상처를 달래는 곳은 고향이 제일 포근하게 생각되었겠지요.
구부르로 떠난 바나바는 더 이상 그의 활동이 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그의 마지막 장면이 되며 2차 전도여행, 3파 전도여행은 오로지 바울을 중심해서 기록이 되어지게 됩니다. 물론 바나바의 기록이 성경에서 없지만 위로자 바나바가 그의 사역을 꾸준히 잘 감당했을 것입니다.
대선배인 바나바 때문에 바울이 잘 양육되었고 역시 마가 요한도 바나바 때문에 마가 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음을 기억할 때 바나바의 심지가 무척 감동을 줍니다. 비록 다툼 때문에 속은 좀 상했지만 그 때문에 선교팀이 2개로 늘어났고, 마가 요한과 실라가 제자로서 양육된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일에나 동기가 순수하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면 약간의 마찰은 있더라도 결과는 합심하여 선을 이루고 유익을 가져온다는 신념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저는 3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의견 차이 때문에 목적이 깨지는 일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의견은 달라도 목적은 성실히 이루어 나가여 한다는 것이지요. 결혼식이 성대히 기쁘게 잘 끝났는데 피로연에서 결혼케익을 언제 잘라야하느냐는 케일 자르는 시기에 대한 의견 차이로 신랑 신부 양가가 크게 싸우고 그날로 결혼이 파기되는 어리석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깨지고, 가정이 깨지고, 친구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 거의 결혼케익을 언제 자를 것이냐는 그 시기 문제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당을 새로 짓고 무슨 색을 칠할 것이냐는 의견 차이로 교회가 둘로 나누어진 사례가 있어요. 어처구니없지요?
교회를 위해 의견을 내놓고 자기 의견 관철이 안되면 교인들 선동해서 교회 시끄럽게 하고 본인은 교회를 위해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신앙 포기하는 사람들 이 L.A에 허다한 일들입니다. 일 좀 열심히 하구나 하고 보면 그 사람 그 이상 교회 다니지 않고 교회를 옮기는 것을 보게됩니다. 교회를 위한 의견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첫 번째 교훈은 목적이나 목표가 그것을 이루게 하는 수단과 방법 때문에 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두 의견 때문에 헤어져야 할 정도라면 두 사람의 의견은 그 정도 내놓고 성령께서, 주님께서 의견을 내놓으시도록 주님께서, 성령께서 일하실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한 다툼은 피하십시오. 다툼이 의견 차 좁히지 않을 것입니다. 다툼을 중지하고 각각 기도로 상령의 지시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교회 일이든 가정 일이든 사회 일이든 친구관계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장이 전연 물러서지 않은 다툼은 감정을 낳게 할 것이고 결국 우리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두 사도의 머리에는 전도와 전도된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이 전부였었고, 그 일 하기 위해 핍박과 심지어 돌에 맞아 주는 일까지 감수해야 할 때도 전도여행하며 일생을 전도와 제자양육으로 일관했는데, 우리의 일생도 그들의 모범을 따라 전도와 이웃 신앙인들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여기에서 얻은 교훈대로 우리의 의견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키고 분열을 가져오는 의견을 양보하고, 자나 일하나, 먹으나 굶으나 두 사도와 같이 전도와 제자양육에 대한 생각과 기도가 끊이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