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에서의 전도 – 사도행전 17:16-34

지난 주에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해 큰 무이와 귀부인들이 믿었으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핍박하므로 형제들이 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전도 지역을 옮겼고, 베뢰아에서도 전도에 성공하여 믿는 자들이 많았는데 또 핍박자들이 데살로니가로부터 몰려와 소동하므로 또 형제들이 바울을 보내어 배편으로 아덴까지 호위를 해서 보냈던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방금 봉독한 말씀과 같이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한 내용을 통해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이 우리 신앙생활에 직접 적용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강해하겠습니다.

[1] 바울의 전도대상(16-18)

[2] 바울의 설교(19-31)

[3] 설교의 반응(32-34)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아덴 도시로 우리의 눈을 돌려서 이 도시를 둘러보고 바울의 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덴은 바울 전도 당시 로마의 영토였고, 로마 영토의 도시 중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아덴이라 하면 성경에서만 보는 지역 이름 같은데, 희랍의 아테네라하면 훨씬 우리에게 친근해질 것입니다. 고대 역사를 통해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도시 중 하나로 문학, 건축, 예술, 또 부유함의 센터였습니다. 또 무엇을 아는 척 할려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이름을 들추어야 하는데, 이런 쟁쟁한 희랍의 철학자들이 증거해주듯 이 희랍의 아테네는 철학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계시의 도시라면, 아테네는 인간철학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가장 위대한 대학 도시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세상적으로 보면 제1의 도시였나 봅니다. 문학, 건축, 예술, 철학, 번영의 첨단을 걷고 있는 이 도시에 복음이 전달되지 못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게 되었는데,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도시의 사람 수만큼 아니면 더 많아서 거리에서나 건물에서나 집에 들어와도 우상으로 가득 찼고, 찬란한 건물의 신전이 그 도시에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1] 바울의 전도대상(16-18)입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두고 왔으므로 어덴에 혼자 도착했습니다. 아덴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듣고 알았지만 복음 전하기 위해 시가지를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니 “온 성에 우상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가 오면 함께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을 둘러보니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그 도시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두 제자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혼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대상에 대해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입니다. 종교가들인 것입니다. 정기적 예배 참석자며,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한 때 힘써보았던 자, 진리 찾아보려고 힘썼던 자들이나 지금은 습관뿐인 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으로 개종된 자들입니다. 이방의 잡신, 또 부도덕에 염증이나 율법이나 계율 속에서 좀 엄하게 살고 싶어하는 보통 종교인들입니다.

세 번째는 물질주의자들입니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물건 사고 파는 일에만 관심있는 자들입니다. 진리나 천국에는 관심 없고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믿는 무리들로, 지금 신앙인들 중에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가진 것은 많은데 마음이 공허한 사람, 그래서 얻어보려고 분주하게 쫓아다니나 아직 잡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는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입니다.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죽은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즉 심판도 보상도 없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우연히 어딴 사고로 생겨났으며, 인생을 즐기자는 무리들입니다. 즐기자고 주장하는 그들이 과연 쾌락, 기쁨을 찾았을까요? 쾌락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공허하고, 쾌락을 자제함으로 참다운 쾌락이 있음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다섯 번째는 스도이고 철학자들입니다. 스토익파 철학자입니다. 에비구레오 철학과 대조적입니다. 이성주의자며 합리주의자입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수양과 극기를 내세웁니다. 인생을 인내하자고 주장하며 자기훈련, 자기통제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무엇이든지 존재한다고 믿는 범신론자들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또 누구든간에 힘의 근원이 된다고 믿습니다. 운명론을 믿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런 것이 일어나도록 되어 잇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도, 악도 없고, 세상에는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며, 누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첫 두 지도자가 자살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움되시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겠지요. 논쟁과 말씨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섯 번째는 새 것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그곳에 온 외국인 나그네들은 가장 새로운 정보가 아니면 시간을 사용치 않는 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새 것, 새 사상, 새 정보 좋아하는 사람들, 옛 것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2] 바울의 설교(19-31)

바울은 회당에서 또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듣던지 아니 듣던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히 모든 시민이 새 것을 좋아하므로 바울이 전한 예수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 모두 귀를 기울였나봐요. 그래서 두 가지 반응이 있었어요. 하나는 바울더러 말장이다, 또는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철학으로는 부활이란 것을 전연 들어보지 못한 사실이라 바울을 데려다가 아레오바고 공회에서 이 새 교에 대해 더 들을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있어, 이 공회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설교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너희들은 종교성이 많다.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렇게 지적했지요. 그러나 방향 잃은 종교성이라 바른 하나님을 소개해주려고 종교성을 지적했습니다. 종교성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가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는데,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내가 알게하리라 하며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①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세상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②천지 주관자. 우리 하나 하나가 우연이 아니고 섭리이다. 오늘 주신 말씀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③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④부족한 것이 없으시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울 수 없고, 오히려 생명, 호흡, 만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⑤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관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⑥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 나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⑦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그 분의 힘이며 섭리로,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금과 은과 나무로 만든 우상과 같이 여기지 말라.

⑧알지 못하던 때에는 허물치 않으셨으나 이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

⑨심판의 하나님이시며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다.

 

[3] 설교의 반응(32-34)

어떤 이는 조롱하기도, 또 어떤 이는 다음에 또 듣자하므로 바울은 떠나갔으나 몇 사람은 믿었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요, 또 다른 사람도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공회 즉 재판소에서 설교했는데 판사가 믿게된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두렵고 떨릴 수 있는 그 아덴에서 위축당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해서 다수는 아니지만 결신자를 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 떠난 학문도, 예술도, 철학도, 재물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인생을 즐기지만 오히려 공허만 오고 허무만 오고 기쁨도, 행복도, 풍요함도 없이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는지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믿을 때 예술도, 학문도, 재물도 우리들에게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상에는 새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서 1:9-10에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새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을 경험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하여 세상의 학문, 예술,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며, 주 안에서 새로움을 날마다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