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어떤 말씀을 받았던가요?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죄없음을 알면서도 인기를 얻으려고 또 뇌물을 바울로부터 받을 것을 기개하고 무죄석방을 시키지 아니하고 계속 가두어 두었는데, 결과적으로 2년동안 가두어둔 결과가 되었고, 그의 아내 유대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의 도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고, 바울은 의에 대해, 절제에 대해 , 심판에 대해 쉽고 명확하게 가르쳐주었으나 죄를 회개치 않고 뒤로 미루다가 결국 총독의 자리에서 파면되므로 무죄자를 석방시켜야 하는 정의의 실현도 못하고, 또 자기 죄를 회개를 하는 기회도 영원히 놓친 부부의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1-12절 말씀을 통해 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 앞에선 바울의 모습을 통해 교훈을 받고, 그 교훈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정의를 실현할 기회를 놓친 베스도 총독의 모습(1,4,9)
[2]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2-7)
[3] 가이사에 호소하는 바울의 모습(8-12)
[1] 정의를 실현하는 기회를 놓친 베스도 총독의 모습(1,4,9)입니다.
베스도 총독 이전의 총독이 누구였던가요? 벨릭스였지요. 본문에서 새로 유대지방의 장관 즉 총독으로 온 인물을 보게되는데,
1절에 보니까,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한지 3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존경한다는 표시를 하여 환심을 얻고자 부임하자마자 3일만에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려 예루살렘에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연히 유대 지도자들과 잘 친해져야 반란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순조로울 것 같아 그런 것 같습니다. 벨릭스 총독도 반란 때문에 목이 달아났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쓰였던 것 같습니다.
4절에 보니 유대인들이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재판하되 가이사랴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때 베스도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를 분명히 거절하는 좋은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으므로 죄인이 있는 그곳에서 해야하고 또 나 베스도도 곧 가이사랴로 내려갈 것이므로, 혹 너희 지도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와서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면 다시 고소를 하라고 답변을 하므로 법대로 잘해보려고 하는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법에는 죄인 스스로 승인하지 않으면 재판지역을 옮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9절에 보니 고소인들이 바울은 죄인이라도 죽여야한다고 고소도 했고, 바울도 자기의 변호를 했고, 베스도의 판결만 남았는데, 베스도가 무죄석방을 선포하지 아니하고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겠느냐고 묻게될 때 바울은 단호하게 가이사 앞에서 심판받겠다고 답변하므로, 즉 로마황제가 있는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시민권자로서의 권리주장을 하므로 베스도는 자기 위치에서 충분히 무죄 석방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기록을 보존하여 로마의 대법원에 보내야 하는 행정관의 수치와 무능을 들어내게 되었고, 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보려고 예루살렘에 보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멀리 로마에까지 보내게 되었으니 바울은 유대인의 손에와 베스도의 손에서 멀리 가게되어, 결국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첫 번째 요구 때는 잘 처리했으나 도중 마음이 좀 변해 결국 죄없는 자를 로마에까지 보내야하는 엄청난 실수를 했고, 정의의 판결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만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는 약 2년동안 밖에 총독을 하지 못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2-7)
2절에 신임 총독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부임인사를 하게되니 유대 지도자들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초면 인사를 나눈 베스도에게 부탁을 하게됩니다. 즉 바울을 다시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해야 되겠는데, 재판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짐작이 되십니까? 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지? 3절에 보니 또 이번에는 숨어있다가 도중에 그를 죽여버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베스도는 그들의 흉계를 잘 모르지만 총독으로서 바르게 해보려고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런 거절이 쉬운 일이 아니었었어요. 그래 결국 베스도는 7-8일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가이사랴에 돌아가자마자 그 이틀날 재판을 개정했으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극성을 인식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신속히 응했으리라 봅니다.
재판 자리에서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는 죽여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고발을 하지만, 능히 그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7절에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벨릭스 앞에서 고소했던 죄목이 무엇이었지요? 사회를 소동케 했다, 성전을 더럽게 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다. 그런데 누가 소란케했나요?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데모하며 소란케 하고는 오히려 바울더러 소란케 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으나 하나도 증거제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3] 가이사 앞에 호소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8-12)
정식재판이므로 고소자들의 고소가 다 끝났고 이젠 피소된 죄인이 스스로를 변호할 차례가 왔습니다. 8절에 보니 “내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고 분명히 무죄임을 변호합니다.
베스도가 재판장으로서 바울의 죄가 있다고 느꼈다면 대다수인 유대인들의 고소대로 유죄선고를 하여 처형을 했겠지요. 그러나 죄없는 줄 알면서도 대다수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네가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바울에게 물었다고 했지요? 재판장으로서 얼마나 비겁합니까?
그러나 인간 총독은, 인간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불법을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답변을 주시어, “내가 사이사의 재판자리에 있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겠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대로 내가 뷸의한 일이 없지 않느냐? 내가 만일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지었다면 죽기를 사양치 않겠지만 이 사람들이 고소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내주어 죽게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하니, 베스도가 옆에 있는 사람들의 자문을 받고 바울이 호소한대로 가이사에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로서 그의 시민권을 최대한 살려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가게하는 것은 가는 도중에 숨었다가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임을 알고, 또 예루살렘이란 곳은 유대인들 즉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소굴이고 그곳에 가서는 죽음밖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의 답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군중의 압력과 기관원들의 권력 앞에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한 바울의 담대한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누구입니까? 로마황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는 네로였고, 그 네로가 나쁜 황제였지만 그는 주님께서 그에게 이미 예시한 대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는 예언대로 그가 가야할 곳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로마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네로가 살려줄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가이사에게 호소하면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으나 그 재판까지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야하므로 웬만하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나 결국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므로 이젠 로마군인들은 황제의 명령이나 다름없이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에까지 호송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맡게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의 내용을 들으시면서 마음에 어떤 적용이 떠오르십니까? 나더라 어떻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리셨습니까? 제가 들은 음성은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유대 총독 되었을 때 예수님을 재판했었고, 그때 예수님이 전연 죄가 없음을 알고 그를 석방하려고 했으나 군중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소리 지르니 죄없는 자 십자가에 못박고, 죄있는 자 강도를 살려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그랬고, 총독 벨릭스가 그랬고, 총독 베스도 그도 이런 실수를 했는데, 이것은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과 주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성난 군중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땅히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였으므로 그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심판하실 그 심판을 피할 수 없게된 것입니다. 군중이 뭐라고 소리질러도 법대로 양심대로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바라보지 말아야할, 인간 눈치 보지 말아야할, 불의한 자들의 외치는 소리 듣지 말아야할 그때가 오리라봅니다. 그때마다 불의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진리 편에 서서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억울한 것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무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재판장도, 종교 지도자들도, 군중들도 모두 바울을 불리하게만 대우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들에게 아첨하고, 변명하며 살아나 보려고 하지 아니하고 가이사에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는 국가의 최고기관, 마지막 기관입니다. 황제입니다. 우리의 가이사는 누구입니까? 주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억울한 것 사람들에 울부짖어도 인간들이 모두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주님께 호소하는 자신 있는 믿음 가져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풀어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심판자 예수님께서 개운하게 선과 악을, 진리와 비진리를 가려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재판에, 가이사의 재판에 기대를 걸고 현재의 불의를 참고 견디고 계속 하나님께 호소하여 심판 날에 선한 심판 받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