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기 직전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게 했는데 문지방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은 무사했으나 문지방에 양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가정마다 장자가 다 죽었던 것입니다. 양의 피는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피가 발라져 있는 가정은 건너 뛰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한문으로 유월절이란 건너 뛴 절기라는 뜻이며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Passover 라고 하는데 양의 피가 죽음을 면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며 생명이 피안에 있다는 것이 구약의 사상입니다. 이런 피의 원리는 율법의 속죄와 정결의식에서도 같은 차원에서 적용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지만 자기 대신 양을 잡아 죽여 그 피를 뿌려 줌으로 죄가 용서가 되고 더러운 것이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일년에 한 번씩 대 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에 뿌리고 또 백성들을 위하여는 수염소의 피를 속죄소에 뿌림으로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가 용서되었던 것입니다. 평일에도 제사장은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성막 안에 있는 번제단 주변에나 향단 주변에 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피를 제사장 위임식때에는 제사장과 그의 자녀들의 오른 쪽 귓부리, 오른 쪽 엄지, 오른 발 엄지에 발라주어 정결해지도록 했으며 백성들에게도 정결의식으로 똑같이 오른 쪽 귓부리와 오른 쪽 엄지와 오른 발 엄지에 발라주었던 것입니다. 또 정결의식으로서는 사람들의 옷에나 집에도 피를 뿌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짐승들의 피를 통해서도 정결케 될 수 있었음을 말하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사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사함의 진리를 바로 깨닫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11-12) [2]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13-15) [3]첫 언약의 피(16-22)입니다.
[1]먼저 11절부터 12절까지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1과 12절에 보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모세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로 속죄했던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님의 피로 속죄했던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문지방에 바른 양의 피는 하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는 원형이요 실체인 것입니다. 문지방에 바른 피로 인해 육체적 삶이 연장된 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될 것을 예시해 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한 것은 하나의 모형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동물의 피 대신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은 원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두 속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 대제사장이 사람이 지은 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로 매년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친히 대 제사장이 되시어 사람이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성소에 들어가시어 동물의 피가 아닌 자기의 피를 가지고 속죄하셨으며 또 매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속죄하셨다고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가 50미터요 폭이 25미터쯤 되는 좁은 공간인 성막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렸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도 휘장도 없이 툭 터진 골고다 성소에서 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더 큰 성소가 되는 것이요 사람이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성소에서 드렸기 때문에 더 좋은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들어갈 필요가 없이 단번에 그리고 동물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속죄제를 드렸으므로 더 온전한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3절부터 15절까지의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의 서론에서 모세의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를 사람의 옷에나 몸에나 또 집에 뿌려줌으로 정결케 된다는 것을 소개해 드렸는데 또한 동물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려 줌으로도 정결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는 동물의 피로 드린 속죄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속죄제의 효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로 또는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과 양심을 깨끗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는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실과 심령을 깨끗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며,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제사장과 동물의 피가 중보가 되었으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가 중보가 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임시로 육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이고 새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히 영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그를 믿고 따르는 자를 위해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6절부터 22절까지의 첫 언약의 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에서는 다시 동물의 피로 맺었던 첫 언약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백성들에게 말한 후에 동물의 피를 그 율법책과 온 백성들에게 뿌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했으며 또 이 피를 장막의 모든 그릇에 뿌려 정결케 했다고 했습니다.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19절에는 동물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백성들에게 뿌렸다고 했는데 출애굽기 24장에는 피를 뿌린 것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물과 양털과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 문둥병자를 정결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인 첫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이와 같이 동물의 피를 통해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가 정결케 되는 일이나 모든 물건들이 정결케 되는 일이 피로써 되어졌던 것입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나 정결케 될 수 없음이 하나님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는 새 언약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에 대해 그 의미를 바로 깨닫고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속죄의 길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피 흘리게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온전히 사하신 것입니다. 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밖에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동물을 죽게 함으로 죄가 사해졌는데 동물을 잡아죽이기 전에 동물의 머리에 죄인의 손을 얹고 안수한 것은 자기가 죽어야 마땅하나 자기 대신 동물이 죽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기의 죄 값으로 인해 자신이 죽어 자신의 피를 흘렸어야 마땅하나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도 돌아가셨고 역시 그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우리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 있으나 실지로는 주님께서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죄 값으로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이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분이 있는데 그 사실을 잊고 내 욕심을 따라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한다면 나를 대신 죽으신 분의 뜻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매주 마다 우리 교회는 주의 만찬을 하게 되는 데 이 만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살과 피를 기념한다는 뜻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사를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새 언약의 피의 가치를 망각할까해서 인 것입니다. 피 흘리심이 없이는 우리의 죄가 사해질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신 새 언약의 피를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고전 10:16 에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때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 함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매주 마다 주의 만찬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1년에 2번이라든가 한 달에 한번 정도 해도 된다고 믿는 신앙은 새 언약의 피에 대해서 많이 등한한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라고는 부르지만 새 언약의 피와 별로 상관이 없는 기독교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늘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리심에 합당한 삶이란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접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이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그만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 꼭 물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합당한 삶을 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