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지키는 자와 복을 버리는 자 – 데살로니가전서 2:13-16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는데 가장 앞장섰던 혹독한 핍박자였으며 반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는 예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혹독하게 핍박을 받았던 자입니다. 즉 그는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했지만 한때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했고 한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또 복음을 전파하는 이유로 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격려함과 동시에 믿는 자들을 핍박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의 보따리를 채워나가는 핍박 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두 줄거리는 선과 악이요, 그리스도와 사탄입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편에 설 수도 있고 시탄의 편에 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편에 서 있는 자나 사단 편에 서 있는 자가 현세에서는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지만 주님 오실 때에는 영원히 사는 길과 영원히 형벌을 받는 길로 분명하게 구별이 될 뿐 아니라 한번 결정이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끝까지 그리스도 편에 서 있기를 권면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더욱 그리스도 편에 굳건히 서 있게 하고 행여나 사탄의 손발 노릇을 하다가 무서운 심판대에 오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하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말씀을 받는 신앙(13) [2]모범을 본 받는 신앙(14) [3]하나님의 노여움을 채우는 어리석음(15-16)입니다.

 

[1]맨 먼저 13절의 말씀을 받는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두고 늘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기에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감사하였을까요? 그들은 사도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전달된 말씀을 사도 바울이나 실라나 디모데와 같은 어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전한 말씀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렸으니 그들이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에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그들 마음속에서 크게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이며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했다는 말은 그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핍박이 있었어도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고 그대로 믿는 자라면 생명의 위험이나 재정상의 큰 피해가 있다해도 흔들리지 않고 처음에 받은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2]두 번째는 14절의 모범을 본받은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두고 예루살렘교회를 본받은 자들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진리로 알고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드렸고 또한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도 사도 바울의 일행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드렸으며 자기의 동족들인 이방인들이 심히 핍박을 해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는 복음을 뿌려준 자들의 좋은 신앙을 본받은 것이라 하여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 지역으로 그동안 이방 지역에서 섬기던 갖가지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기 때문에 전에 섬기던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니 같은 동족인 데살로니가의 불신자들이 심하게 핍박할 것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모범을 따라 모든 험한 핍박을 이겨낸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5절부터 16절까지의 죄를 채우는 어리석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5절, 16절은 기독교를 처음부터 핍박해오고 있는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죄를 지었으며 또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또 현세에서도 사도 바울 일행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해 그들을 빌립보에서나 데살로니가에서나 베뢰아에서 쫓아낸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되는 일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멸시하거나 또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핍박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반대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큰 죄를 범했는데 그 후손들도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여 죄를 가볍게 하기는커녕 조상들이 지었던 죄의 보따리에 지속하므로 죄를 채워 가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스스로 부르는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복을 지키는 자들이 다 되라는 교훈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북에서 남으로 피난 왔던 이들이 집과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오직 작은 보따리하나 가지고 내려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따리 속에 귀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 귀한 것이란 바로 신앙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신앙은 피난 과정에서나 피난살이에서 당할 수 있었던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할 뿐 아니라 가난 중에서도 남과 나누어 먹고 이웃 피난민의 삶이 바로 내 삶으로 알고 서로 도우며 감사와 화평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성실하게 일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이북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성공하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부귀를 누리는 열매를 가져왔다고 믿습니다. 제가 강조 싶은 것은 성공의 열매가 아니라 성공을 가져온 그 씨앗입니다. 피난 시절에 보따리에 가져 왔던 그 믿음의 씨앗이 얼마나 지금쯤은 자랐겠는가 입니다.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 영화만큼 그들의 믿음의 씨앗이 자랐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 재림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갈 때에는 다시 피난민과 같이 남쪽에 내려와서 크게 한 사업도 큰집도 그대로 두고 오직 남쪽에 내려올 때 가지고 내려왔던 그 피난민의 작은 보따리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남쪽 사람이든 북쪽 사람이던 간에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피난 가야하는 신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진을 대비하여 비상 식량을 준비하듯 작은 피난 보따리를 꾸려놔야 합니다. 주님 오신다는 소문이 있으면 빨리 가지고 나가야 할 작은 보따리입니다. 짐이 조금만 커도 택시 운전사는 그 짐을 보고 택시를 세우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사실을 보면서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 짐을 많이 가진 자는 천국 택시를 잡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천국 열차에 탈 수 있는 보따리로 꾸리고 천국 열차 운전사가 싫어하는 보따리는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보따리를 꾸리라고 했나요? 아니 어떤 보따리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했나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보따리는 주의 종의 입에서 소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종들로부터 전달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받아드릴 때에 그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져 마음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전도자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깍아내리는 사람은 그 전도자의 입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전연 심령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므로 결코 그런 사람을 사단이 더욱 유혹하여 사단의 손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전도자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보따리는 어떤 여려움이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해도 말씀을 주님 오실 때까지 그대로 지켜나가는 신앙입니다. 또 그리고 남의 좋은 신앙을 본 받는 신앙입니다.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좋은 점만 본받았다면 믿음이 얼마나 자라겠습니까? 그런데 오래 되어도 믿음이 자라지 못한 것은 좋은 것은 배우지 않고 나쁜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좋은 신앙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보따리는 어떤 것일까요? 기독교를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는 일들, 복음의 씨앗을 순수하게 그대로 뿌리지 않고 사람이 섞은 가라지를 함께 뿌리게 하는 일들, 사도 바울을 괴롭히듯 복음 전하는 자들을 여러 말로 헐뜯어 나쁜 소문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보따리를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인지 싫어하실 것인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믿고 믿음이 있다 하는 자들이 종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기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나의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임이 확실하면 행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을 알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중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오늘 부르셔도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