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열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과 영적 자녀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떠나와 서로 해어졌지만 많이 보고 싶어 여러 번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방해를 하여 가지 못했다는 사연을 적고 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소망이요 기쁨이며 예수님 재림시에는 그들이 바로 사도 바울의 자랑이요, 영광이요 면류관이라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열정과 기대만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애정은 미치지 못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피차 같은 크기의 애정을 나눌 수 있어야 정상적인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본문의 교훈을 통해 전도자는 전도자가 교인들을 향해 마땅히 가져야 할 애정을 갖게 되고 또한 교인들은 전도자를 향해 가져야할 마땅한 애정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을 통해 교훈을 받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도 바울이 교인들을 향해 가진 열정(17-18) [2]사도 바울의 영광과 기쁨(19-20)입니다.
[1]먼저 17절, 18절의 사도 바울이 교인들을 향해 가진 열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7절 시작에 보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르므로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한 피로 이뤄진 한 가정의 형제간이라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바로 그 형제간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다면 부모가 자녀를 보고 싶어할 것이고 또한 자녀는 부모를 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우리 집 할머니는 자기 외손자에게 가끔 전화를 하며 ‘디모데 너를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외손자를 그렇게 보고 싶은 거여요. 우리 막내 대니얼이 지금 19년만에 외가에 갔습니다. 외가에서 얼마나 보고 싶어했습니까? 자기 외손자라는 이유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육적인 피는 한 방울도 섞인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피를 나눈 형제간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보고 싶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피차 떨어져 있지만 떨어져 있는 것은 얼굴 뿐이요 마음은 늘 그들과 함께 있다고 자기 진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방문하려고 두어 번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사단은 못 만나게 막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자기 이산 가족을 만나기 위해 두어 번 시도했는데 사단이 방해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이산 가족이 그렇게도 보고 싶다고 하는 말이 육적인 가족만 중심 하여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빨리 이해가 되지 않지만 육적인 가족의 담을 헐고 이젠 영적인 가족을 가족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는 강력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일이면 윤 전도자 가족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게 될 터인데 윤 전도자나 그 가족이 영적인 가족인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어하는 감정과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 가정을 보고 싶어하는 감정은 뜨겁겠지만 친 가족이 아닌 우리 성도들의 감정은 차이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의 열정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어 친 혈족이 아니지만 외지에서 전도하다가 방문하는 그 연적인 지도자 가족을 뜨겁게 맞아 또 힘을 충전해 가지고 가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두 번째는 19절, 20절의 바울의 영광과 기쁨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골프 선수 박 세리나 야구 선수 박찬호, 또 바이어린이스트 사라장 같은 자녀를 둔 부모는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으며,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 부모들의 소망은 자기들의 자녀들이요 자기들의 자녀들이 바로 자기들 머리에 쓴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로 자기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박세리나 박찬호 또 사라장의 부모가 차지한 영광은 이 세상이 끝나므로 다 사라져 버리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 앞에 들림을 받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로 사도 바울이 주님께 내 놓을 만한 자랑이요 머리에 쓸만한 면류관이 되며,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사도 바울에게는 소망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성도들끼리의 가족관의 폭을 넓히라는 교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들도 자식이요 며느리도 딸이며, 친정 부모도 부모요 시부모도 부모로 가족관을 넓힐 뿐 아니라 그런 결혼 관계와 전연 상관없는 성도들에게도 내 형제나 부모와 같은 비중으로 사랑하며 존경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보나 자녀가 부모를 보나 또는 교인들이 다른 교인을 볼 때에 주님 오실 때에 같은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한 상에서 영원히 함께 먹고 마실 가족인 것을 연상하면서 그들과의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좁은 이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이 세상 밖의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함께 살 새 식구들임을 생각하며 산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 지리라 생각됩니다. 형제 자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가족인 것을 생각하며 피차에 더욱 뜨거운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전도자와 교인들간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지나치게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과 교인간의 관계도 그렇고 교인과 전도자와의 관계도 그렇고 당장 자기의 이해 타산을 중심하여 서로 좋아하거나 아니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리 길지 않고 끝이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도 자기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기의 영광이라고 믿고 살았던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아무 것도 못되어 주는 때가 곧 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의 삶 말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 많은 관심을 두고 날마다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나라를 중심하여 전도자와 교인들간의 관계가 맺어가야 합니다.
가정 교사의 영광은 맡아 가르치는 학생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임 같이 전도자의 영광은 자기가 가르치고 지도한 성도들이 주님 재림시에 모두 공중에 들림을 받고 그들이 모두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인들이 아무리 전도자에게 잘 대접해주었다 하더라도 주님 재림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전도자나 그 교인 모두가 잘 대접해 준 일이 가치가 없이 수치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소망은 자기가 가르친 교인들이 천국에 다 입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르친 교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해 있는 장면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주님 재림시에 자기가 추수하여 거두어 드린 열매를 주님 앞에 다 결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입성한 성도들은 전도자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도자의 소망은 오로지 성도들이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 다 들어가는 것이어야 하며 성도들은 전도자를 자기 영혼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안내해 주는 직분으로 이해하고 전도자를 그런 신분에 맞는 대접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자를 영적인 지도자로 대접할 줄 아는 성도는 자기의 영혼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성도일 것이고 전도자를 세상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는 성도는 자기의 영혼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무관심하는 성도라 해도 될 것입니다. 저는 전도자를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세상적으로 우대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를 영적인 지도자로 대우하지 못할 때에는 슬퍼집니다. 전도자도 인간이므로 어찌 다른 인간과 같이 세상 욕심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교인들이 전도자를 대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하듯 전도자도 거짓말할 수 있고, 남의 돈을 떼어먹을 수도 있으며 교인들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울 것으로 믿고 대하는 것을 당할 때에는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남들도 다 마시는데 술이나 한잔 같이 하자든가, 산상 예배에 가서 전도자가 상품을 타게 하려고 조작을 하면서 다들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인을 볼 때에 슬픔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말했지만 전도자에게 궁합을 보아야 하겠으니 자녀의 생일 생시를 달라고 한다면 전도자를 정말 살덩어리로만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육적 부모가 어떤 실수를 했으면 누가 알까보아서 쉬쉬하면서도 전도자가 작은 실수만 하면 동내방내 나팔이나 불어대니 이 어찌 전도자를 영적 지도자로 대접하는 것이며 어찌 자기의 영혼을 하늘 나라의 주님 앞에 인도하는 인도자로 대접하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전도자로서 마땅한 대접을 받아야 대접을 하는 성도들의 믿음이 날로 성장하여 그 영혼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 아내를 비롯하여 내 자녀들로부터도 나를 영적인 지도자로 대접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교인들로부터도 그런 같은 수준의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설교 석상에서 자신 있게 공언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여러분의 재산에나 호주머니에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또 내 욕심을 위해 티끌만이라도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믿고 따라주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도 못 믿는다면 그에게 어떻게 귀한 영혼을 맡기겠습니까? 저를 세상적으로 높여주는 것에 나 여러분이 가진 세상적인 것에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심령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전도자와 상도간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전도자나 성도들 모두가 하늘나라의 고지에 올라가도록 피차에 더욱 사랑하며 힘을 합하여 주님이 주시는 영광을 다 차지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