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의 보고와 바울의 기쁨 – 데살로니가전서 3:6-10

오늘 본문을 중심한 설교의 제목은 디모데의 보고와 바울의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자가 누굴까요? 사단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려고 첫발을 내 닫으실 때에 예수님께 찾아온 첫 손님이 역시 마귀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데살로니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막 시작한지 3주 후에 마귀들이 사도 바울 일행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해 불량배들까지 동원하면서까지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심한 핍박은 사도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를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어도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핍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속 괴롭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생활을 막 시작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심한 핍박으로 인해 믿음 생활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그들이 믿음으로 모든 환난과 핍박을 잘 참아내도록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심한 핍박으로 인해 두렵고 떨림으로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디모데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그리워하듯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을 간절히 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기뻐하며 크게 힘을 얻었다는 줄거리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교인과 전도자간의 올바른 바른 관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우리 교회도 전도자와 교인들간에 올바른 관계가 이뤄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디모데로부터 온 기쁜 소식(6) [2]바울의 기쁨(7-9) [3]바울의 간구(10)입니다.

 

[1]먼저 6절의 디모데로부터 온 기쁜 소식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가지고 총독 갈리오 앞에 세우고 그를 고발하는 등 심한 핍박으로 인해 사도 바울의 마음이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심한 핍박을 받고 있으며 둘째는 복음을 전해들은 교인들이 또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심히 어려운 자신의 상황을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모든 궁핍과 환난’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는 사도 바울에게 디모데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모든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가고 또한 형제간의 뜨거운 사랑의 교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싶어하듯 그들도 사도 바울을 간절히 보고자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전도자와 성도간의 사랑의 띠가 연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맥이 빠지게 하는 소식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통파 전도자가 아니요 자격도 없는 전도자라든가, 사도 바울은 돈이 욕심나서 복음의 길을 택했다던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가르침이라든가,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보고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는다던가 하는 악담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으며 또한 교인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소식은 사도 바울에게 들어온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전도자에게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을 포기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핍박이 심한데도 교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굳건히 믿음 가운데 서 있는 것이요, 또 성도들끼리 짙은 사랑을 나누고 있고 또 복음을 전해 준 전도자를 몹시 보고 싶어한다고 한다면 기쁜 소식 중 최상의 기쁜 소식이 아니겠어요? 살다보면 나쁜 소식도 있고 기쁜 소식도 들어오기 마련인데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에게 아주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2]두 번째는 7절부터 9절까지의 사도 바울의 기쁨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7절에 보니 디모데로부터 온 기쁜 소식은 두렵고 떨려서 많이 좌절된 가운데 있었던 사도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전도자도 좋은 소식을 통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니 보통 위로가 아니라 ‘이제는 살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좌절되었었으면 그 좋은 소식을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듯 이젠 살아났다고 했겠습니까? 많은 좌절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젠 다시 용기를 갖게 하고 힘이 솟아나게 하는 기쁜 소식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무엇으로 감사드리고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다 잊고 이제는 힘이 나서 자기에게 힘을 다시 주신 하나님께 큰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3]마지막으로 10절의 바울의 간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주야로 하나님께 심히 간구하고 있는 기도 제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든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둘째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그렇게도 간절히 보고 싶어 한 것은 만나서 서로 친교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목적은 그들에게 말씀을 더 가르쳐서 믿음이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뜨거워 심한 핍박을 이겨내고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에 부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부족하여 교회 안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부족을 만나서 채워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전도자의 기도 제목은 교인들의 믿음의 부족 부분을 채워 메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교인과 전도자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민 교회에서 교인도 교인 노릇하기 어렵고 전도자도 전도자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교인 중에서도 교인답지 못한 교인이 있을 수 있고 전도자도 전도자답지 못한 전도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교회 말을 들어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엉뚱한 교인도 있고 또한 말도 안 되는 목사가 있음을 듣게 됩니다. 못된 전도자를 통해 불행을 경험하여 상처를 입은 교인도 있고 못된 교인을 통해 깊은 상처를 입은 교역자도 있을 것입니다. 남의 교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교회만 해도 제가 교회를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경험을 두고 보아도 얼마든지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형편상 집이 이사하여 교회를 옮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도자가 싫어서 옮기는 자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제가 싫다고 떠나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제가 싫어서 떠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도자가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겠어요? 이미 떠난 사람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남아 계신 여러분 중에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 이 교회를 언젠가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이 왔다가 다시 많이 떠난 것을 보아 그렇게 믿게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혹시 다른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교회로 옮겼다면 떠나왔던 그 교회에서는 어떤 문제 때문에 떠나왔고 이 교회는 어떤 문제 때문에 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교회를 또 바꿔야 하는 교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교역자에게 문제가 있는지 찾아내어 그 문제점이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 분명히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첫째, 교인이나 전도자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를 하는 사람이 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위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며 또한 교인도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을 가진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나 교인 모두가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그 행동원리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주님의 교훈대로 행해져야 합니다. 전도자이든 교인이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욕심에 따라 나온 모든 것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지금 내가 하는 불평이 믿음에 따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내 욕심이나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스스로 판단을 하고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둘째, 교인도 전도자도 피차에 존경하고 서로 보고 싶어할 정도로 사랑의 띠로 매어져야 합니다. 전도자는 교인 흉보고, 교인은 전도자 흉이나 보는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근본이 흔들린 것입니다. 전도자로서 교인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것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전도자를 헐뜯는 이야기를 조심 없이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소식을 들으면 많이 좌절하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날아갈 듯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도 전도자도 피차에 격려가 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의 기쁨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믿음이 많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은 전도자의 양식이며 전도자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전도자로서 우리 교회를 교회다운 교회로, 교인다운 교인으로 가꾸고 길러야할 책임이 있는 사랍니다. 우리 모두 자기의 입과 자기의 감정을 다스려 나쁜 소식은 입밖에 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기쁜 소식을 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싫어하실 그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실 그런 교회를 이룩하는 것이 전도자나 교인들의 일입니다. 비록 자기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하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를 이룩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이에 뜻을 같이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교인, 좋은 전도자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아끼고 서로 존경하며, 부족한 것을 위해 하나님께 늘 간구해 주는 귀한 관계가 이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피차에 좋은 소식을 나누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