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부탁과 기원 – 데살로니가전서 5:23-28

방금 봉독한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끝마치면서 마지막 부탁과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음 주부터 다시 데살로니가 후서가 시작되기 때문에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진 후편을 소개받게 되겠지만 오늘 주어진 전서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재림의 소망을 갖고 신앙 생활하고 있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이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바울이 원하는 것(23-24) [2]바울의 부탁(25-27) [3]바울의 기원(28)입니다.

 

[1]맨 먼저 23절로 24절까지의 바울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 되는 길로 안내했고 이제는 그들에게 재림하실 주님을 맞기에 합당한 믿음 생활을 하도록 계속 편지로 간절히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4장 5장에서 여러 가지의 권면을 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 권면을 마음에 두고 늘 성실하게 신앙 생활을 해 주기를 바라면서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또한 도와주셔야 마지막의 승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소원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 예수를 자기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 죄 없는 영이 되어 성도라는 이름을 받게 되지만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영과 육의 갈등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잠재해 있어 틈만 있으면 새로워진 우리의 영을 더럽히려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이 죄의 속성을 누르고 이겨나가므로 우리는 점점 성화 되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진 자라할지라도 마음에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죄의 속성이나 또 세상 욕심의 속성이 온전히 뽑아져 버린 것이 아니고 믿음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의 힘이 죄의 속성을 많이 이겨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입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고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수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죄의 힘이 성령의 힘을 누르고 죄의 속성이 터져 나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주 말씀을 통해 권면을 받았지만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내 속에 성령이 충만해 있으면 마귀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고 내 속에 성령이 메말라 있으면 마귀가 내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휘젓고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 속에서 성령이 늘 마귀의 힘을 이겨내서 늘 거룩해질 수 있도록 성령을 충만케 하는 기도하는 일, 성경 묵상하는 일, 찬송하는 일을 지속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거룩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전연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매일 매일 거룩하게 지켜주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 바라는 소원은 주님의 재림시까지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에 임한 선수는 마지막 꼴인 지점에서 승리가 결정지어지므로 열심히 뛰는 일을 결승지점까지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거룩함을 유지하되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해 나가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보전하여 주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충실한 분이시므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거룩하게 보전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그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두 번째는 22절과 27절의 바울의 부탁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 일행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고, 두 번째 부탁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형제들끼리 문안하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하나님의 크신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을 청하되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 일행도 자기 자신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겠지만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많이 의지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거룩하게 입맞추는 것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볼 때에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을 가지고 인사를 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런 인사는 교회 안에 당파가 없을 때에 가능하며, 미워하는 감정이 없을 때에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런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모두가 거룩하므로 가능해지리라 믿습니다. 교인들끼리 교회에서 만나서 뜨겁게 인사할 수 있는 것이 요사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것이 되겠습니다.

 

세 번째 부탁은 이 편지를 모든 형제에게 다 읽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편지 한 통을 돌려가면서 읽어보아야 하는 때이므로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 앞에서 읽어줄 뿐 아니라 어떤 이유로 교회에 빠진 사람에게도 읽어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읽어 주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글을 읽어주는 것이 바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또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되겠습니다.

 

[3]세 번째는 28절의 바울의 기원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란 넓은 의미의 많은 것을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는 것은 하나 하나의 일을 다 말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다 잘되기를 원한다는 좋은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똑 같은 기원을 데살로니가 전서를 시작하는 서두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편지를 쓸 때에도 아니 사람들에게 말로서도 이런 기원은 즐겨 사용할 만한 좋은 기원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슷한 기원을 고린도후서 13잘 13절에서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표현했는데 이 문장을 목사님들이 축도로 애용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이 축도는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 교파에서 목사가 못된 사람은 이 축도문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누구나 이런 문장을 사용하여 기원하도록 허락하셨는데 교파에서 목사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목사님들이 기도에 이 기원 문장을 사용하면서 맨 마지막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빼버리고 “있을 찌어다”에 큰 힘을 주는 것은 더욱 그리스도의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나눠주는 듯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 기원문을 사용하여서 기도할 수도 있고 목사 되지 않은 사람이 이 문장을 사용하여 기도를 할 수도 있으나 기도로 사용했다면 그 기도의 끝은 “있을 찌어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끝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생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주님 재림하실 때에 점 없고 흠 없는 자로 똑바로 서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직 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쁘게 살더라도 우리의 중심은 주님 재림시에 신랑 되신 주님으로부터 합격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자도 합격 받고 교인도 합격 받고, 예수 믿은지 60-70년 된 자도 합격 받고 예수 믿은 지 1년이 못된 사람도 합격되는 일입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합격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합니다. 화난다고 총으로 자기 가족을 다 쏴 죽여 버린 사람이나 자기 남편 귀를 잘라 버린 사람은 합격 받기를 바라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좀 있다고 교회 안나간다고 교회 오는 일을 포기하거나 또 어떤 성도와 무슨 문제가 있다고 입의 혀 총으로 빵빵빵 쏘는 사람이나 혀 칼로 형제의 마음을 잘라놓는 사람은 합격을 위해 노력하는 자의 자세가 잘못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재림 시에 모두 흠 없이 합격되도록 각자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서로 기도해주며 서로 권면하여 합격되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프리이버시를 많이 강조하는 미국 생활에서 주일 예배에 빠진 자에게 왜? 빠졌느냐고 하면 남이야 교회에 오던지 말던지 상관 말라고 하는 자세는 합격을 위해 달리는 선수의 태도가 못되는 것입니다. 서로 기도와 권면을 부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는 합격을 위해 한참 달리고 있는 선수에 비교되겠습니다. 중지하지 말고 계속 달리며, 또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며 함께 달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많이 노력하여 다 주님 재림시에 합격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