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 고린도전서 2:1-5

우리 교인들 설교를 많이 들어보셨기 때문에 설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하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과연 설교하는 사람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하고 또 교인들은 어떤 설교 듣기를 갈망해야 할까요? 어떤 설교가 잘한 설교이고 어떤 설교가 못한 설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교회내의 지도자들을 중심 하여 어떤 자들은 아볼로가 바울보다 설교를 더 잘한다든지 아니면 베드로의 설교가 더 낫다든지 하는 분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분쟁을 막고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사도 바울은 오늘의 말씀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본문에서 설교에 대한 본인의 소신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설교의 준비나 자료는 무엇이어야 하며, 설교의 제목, 설교자의 자세, 그리고 설교의 목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설교라고 하면 전도자만 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지지만 설교라는 단어를 전도라는 단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우리 모두는 전도를 해야하는 자들이므로 우리들이 전도를 할 때에 어떤 준비를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전도하는 자로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고 전도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이 우리들에게 전도에 대해 주고자하는 교훈을 받고 우리들이 그 교훈을 어떻게 우리들의 생활에 적용해야하겠는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I. 전도의 준비(1절) II. 전도의 멧세지(2절) III. 전도인의 자세 (3-4절) IV. 전도의 목표(5절)입니다.

 

  1. 1 절의 전도의 준비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른 말로 설교의 준비에 대해 생각해본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아도 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분열이 있어서 어떤 자는 아볼로파 어떤 자는 게바파, 어떤 자는 바울파라 했다고 했는데 아볼로는 말을 잘하는 능변가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후 11:6에 보면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표현하기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한 것을 보아서 사도 바울은 아볼로와 비교해서 말재주가 덜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아볼로가 더 설교를 잘한다고 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설교라는 것이 대중을 상대하여 하는 것이라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품목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기 탤런트 즉 주연 배우들이란 모두 용모가 준수한 자들이 뽑히는 것 같이 인물이 잘난 설교자는 인물이 덜한 자보다 인기가 더할 수 있을 것이며 웅변술이 뛰어나고 또 음성이 아주 좋다면 말할 필요 없이 웅변술이 없고 음성이 탁한 사람보다 인기가 더하겠지요. 또 어떤 설교자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잘 골라 말하는 설교자도 있고 반대로 말을 더듬거리거나 표현이 부족하여 만족스런 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설교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필요 적절한 단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이 당연히 인기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로서 인물도 좋고 웅변술도 뛰어나고 음성도 좋고 좋은 말을 잘 골라 쓸 수 있는 능변가라면 더욱 설교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설교자에게 꼭 있어야하는 필수 요건은 아니며 또한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하여 그런 꾸밈에 설교자나 설교를 듣는 자가 필요 이상으로 무개를 주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기는 고린도에서 1년 반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자기 자랑이 목적이 아니고 인기를 얻는 것이 자기의 소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준비한 것은 용모도 아니고 웅변술도 아니었으며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을 구원케 하는 복음의 멧세지였습니다.

 

  1. 두 번째로 2절의 전도의 멧세지에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듣고 평가하기를 내용이 참 훌륭했다 아니면 내용이 별로였다고 평가할 경우가 있는데 어떤 설교는 내용이 좋은 것이고 어떤 설교는 내용이 부족한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설교를 참 잘한다고 느끼실 때는 그 설교가 어떤 설교였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준 설교였나요? 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이유중 가장 큰 이유가 설교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달라 잘한다는 설교가 무엇인지 기준을 내릴 수는 없지만 어떤 자들은 많이 문학적인 설교가 아주 마음에 들어 이런 설교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설교는 많이 철학적이기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치 있는 설교로 평가를 하리라 봅니다. 사회 운동을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정치를 비판하고 사회를 개혁해야하는 민중 신학적 설교를 하면 참 훌륭한 설교가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자는 재미있는 예화를 구수하게 잘하는 만담가적인 그런 설교를 두고 설교를 잘한다고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잘한다는 부흥 설교가의 긴 설교를 들어보면 설교인지 자기 자랑인지 만담인지 전연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아멘하고 웃고 아주 좋아하고 만족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요사이같이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윤리적이요 도덕적인 설교가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결국 청중의 욕구에 따라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잘하는 설교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못하는 설교가 되겠지요. 집에 빨리 가고싶은 사람에게는 어떤 설교가 잘한 설교일까요? 짧은 설교가 인기가 있을 것입니다. 청중을 의식하고 청중들로부터 훌륭한 강사라는 인기를 끌어내기 위해 갖가지의 꾸밈을 가지고 단상에 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설교를 뭐라고 평가하실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전도하기 직전에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덴에서 전도를 했는데 이때에 우상으로 가득 차고 지혜와 철학을 논하기를 좋아하는 청중을 의식하고 철학적 냄새가 나는 설교로 사로잡아보려고 했었는데 성과를 보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 바로 2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음이라’한 것입니다. 내용이 있는 설교 즉 훌륭한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그의 십자가에의 죽으심이 강조된 설교가 훌륭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제목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어야하고, 설교의 핵심이 주님의 십자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신 십자가 사실이 빠졌다면 훌륭한 종교 지도자로서나 훌륭한 교사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스토리도 훌륭한 설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기가 있는 훌륭한 강사의 설교를 분석해볼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십자가 지신 사실은 강조되지 아니하고 웃기는 만담으로 시간을 채웠다고 한다면 설교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지혜자와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 되어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강조된 설교가 훌륭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아무리 철학과 윤리와 문학이 풍성한 달변의 설교라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가 빠진 설교는 좋은 설교일 수 없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전도의 멧세지는 신학도, 철학도, 문학과 도덕도 아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지신 십자가여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수년동안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도 이를 수 있겠습니다. 학문을 배우면 배울수록 주님이 십자가는 덜 강조되고 자기가 배운 자기가 아는 지식 자랑이 앞설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단에 선 사람이 자기 소개로 일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인의 멧세지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설교임을 우리가 깨닫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잡탕 설교는 잡탕인 줄 아는 성도여야 합니다.

 

III. 세 번째로 3-4절의 전도인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3절을 보니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같이 담대했던 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스스로 너무 약함을 느끼고 두려워서 떨었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를 했지만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데서 오는 위축감도 있겠고, 또 자기 개인의 육체적 약한 점 때문일 수도 있겠으며 철학적 논쟁을 좋아하는 고린도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자기 스스로 또 철학적 논쟁으로 빠져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등의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전도나 설교를 내 지혜로나 내 지식, 내 능력으로만 하려할 때에는 약함을 느끼고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약함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 그 사실이 바로 바울로 하여금 큰 일을 하게 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두려움을 느낄 때에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마땅히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말의 매끈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내 지식으로 내 권위로 내 철학적 구변으로 설득하려해도 그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셔야 됨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하는 자의 자세나 설교하는 자의 자세는 나의 약함을 알고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IV.마지막으로 설교의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설교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세상에서 살았다는 역사적 인물임을 알게 하는 지혜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어 심령을 변화시키어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표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아 영원히 구원받게 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또 구원된 자들이 지금의 믿음을 더욱 키워서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참고 주님 오실 때까지 소망가운데 살아남게 하는 것입니다. 살아남는 자만이 구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목표는 영혼을 구원시키는 믿음을 갖게 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전도인들입니다. 우리들은 전도할 때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유식한 사람들을 접촉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하겠습니까? 또 사람들을 잘 설득시키기 위해 웅변술을 배우겠습니까? 인물이 못나서 성형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혹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준비되어야할 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의 마음바탕에 심어줄 좋은 복음의 씨앗입니다. 복음을 들고 나간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웃들에게 성경적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잇고 성경의 역사를 논할 수도 있고, 사도들의 인생관을 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만을 강조하였다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으며 철학과 신학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전달한 결과 고린도에서 많은 이들이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게됩니다. 우리들이 전달할 메시지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하되 내 지식과 내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전도할 때에 결과는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을 거두어드릴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란 웅변술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박식한 지식에나 지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며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죽으심을 이웃에게 순수하게 전달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전도하는 우리 모두는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만을 전하되 하나님의 능력을 철저히 의존하여 바울이 고린도에서 많은 영혼을 구원시켰던 것과 같은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