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권고 – 고린도전서 7:1-16

오늘 소개되는 본문 말씀은 결혼 생활에 대한 권고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고린도 도시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도시였으며 그런 도시의 분위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을 중심한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바른 안내와 지도는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들도 본인에게 당면한 결혼 문제, 또는 남이 당하고 있는 결혼 생활에 대해 각자가 갖는 견해가 다르고 또한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와 경험을 토대로하여 자기의 문제를 결정하고 또는 남의 문제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말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우리들 각자의 주장과 사정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제시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결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각자의 문제를 해결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결혼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1-6) [2]독신자들에게 주는 교훈(7-9) [3]이혼에 대한 교훈(10-16)입니다.

 

[1]맨 먼저 1절로 6절까지의 결혼에 대한 일반적 교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니 ‘너희의 쓴말에 대하여는’이라는 말로 오늘 본문이 시작되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가정 문제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서적인 답을 듣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결혼 문제에 대해 몇가지의 질문을 보냈고 사도 바울은 질문된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회가 성적으로 너무 문란한 이유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의 문제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젖어서 길거리에서의 남녀의 유혹에 자신을 내 맡기고 성적인 문란한 생활을 함으로 오히려 부부간의 성적 생활이나 애정에 등한했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그런 문란한 생활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는 주장아래 독신주의나 금욕주의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즉 정결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이미 결혼한 부부의 경우에는 부부 생활을 금해야 한다는 역반응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의 분위기인지라 고린도 교회로서는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과연 성격적인 답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질문식의 편지를 받은 사도 바울이 정답을 써보낸 것입니다. 그가 보낸 정답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으나’라 했는데 이 말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좋겠으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도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했는데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고 남들도 가능하다면 독신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장한 독신의 이유란 26절에서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와 32절의 ‘오직 주를 위하여’였습니다.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란 곧 있게 될 어떤 핍박이나 또는 전쟁등을 예상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며, 또한 결혼한 사람은 부부간에 피차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하는 이유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길 것이므로 독신이 좋겠다고 자기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 생활을 하므로 성적인 범죄 즉 음행이 가능하므로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하여 자기에게 속한 여자와 남자를 두라고 했습니다. 물론 결혼의 이유를 오직 음행의 연고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며 여기에서는 성적인 문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답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혼을 하므로 음행의 가능성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런 정답을 주므로 금욕주의나 또는 독신 생활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결한 믿음 생활이 아닌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는 부부간의 의무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사회법으로는 부부 각자의 인격과 권위를 지나치게 옹호하다보니 부부 관계도 일방적인 것을 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결혼을 할 사람들이나 현재 결혼한 자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의 뜻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적 주장은 피차간의 몸의 주장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는 말이며, 또 피차간에 몸에 대한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는 상대방의 몸을 갖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내 몸에 대해서는 상대방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 특히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부부 관계 같은 것은 소극적이거나 또는 부정적인 관념으로 소화하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와를 아담에게 준 이유를 창세기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담이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이 보기에 좋지 못해서라 했습니다. 이성 관계인 남녀를 부부로 짝지어 함께 마음과 몸을 나누게 만들어 주심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인 것입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부부간에는 나누어서 따로 자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혼 자체가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한 일인데 결혼한 부부가 자기의 주장과 고집으로 각기 떨어져서 잔다면 마귀가 이 부부에게 접근하여 음행 하도록 유혹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도 가정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기간에 기도를 위해서는 분방하되 이것도 서로 합의하여 하라는 것이며 빨리 합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부부간에 별거하는 것은 비 성서적이라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7절부터 9절까지의 독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하지 않은 자들이나 또는 혼자된 과부나 홀아비들에게 권하기를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냥 그대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니 ‘그냥 지낼 수 있는 것도 은사요 결혼하는 것도 은사’라고 하여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살지만 정욕을 충분히 억제하여 음행하지 않을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냥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이 불같이 타서 자기 몸과 마음을 불사르게 한다면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면입니다. 혼자 살 것인지 결혼할 것인지 자기 은사대로 하라는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여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은사는 무엇입니까?

 

[3]세 번째로 10절부터 16절까지의 이혼에 대한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혼한 부부들로부터 듣게되는 이혼 이유는 갖가지이며 또한 그들 본인들의 특별한 입장이 있다고 봅니다. 말도 안돼는 이혼 이유가 있고 두 부부는 이혼할 의사가 그렇게 없는데도 친정쪽이나 시집 식구들이 극성을 부려 이혼한 부부도 있을 것이며 누가 들어도 함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이유의 이혼도 있으리라 봅니다. 결혼은 남이 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사의의 문제이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 결혼 케이크를 언제 자를 것인지의 의견차이로 식장에서 신랑 신부측이 대판 싸움이 일어나고 그 자리에서 이혼한 일도 있었다고 하니 타당성이 없는 이혼의 이유도 얼마든지 있으리라 봅니다. 반대로 남들은 모두 차라리 해어져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참고 사는 부부가 이 세상에는 또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유야 어떻든 이유를 묻지 아니하고 아내나 남편들에게 ‘갈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일 갈렸으면 혼자 살든지 아니면 다시 합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른데 사정을 고려치 않고 단 하나의 답만 주신 주님의 답이 수긍이 가지 않겠지만 주님은 이유를 묻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재혼해도 이혼할 다른 이유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아예 갈리지 말라는 것일 것으로 풀어봅니다. 함께 살기 때문에 불화와 심각한 싸움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앞세워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책하고 상대를 용서하고 이해하여 사랑을 회복하므로 크리스천 가정을 회복하라는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평생 싸우면서 살더라도 이혼만은 해서는 아니된다는 소극적이요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상대가 불신자일지라도 상대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불신자인 상대가 신자를 통해 믿음을 갖게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불신자인 상대가 갈라지기를 원한다하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여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화평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이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교훈은 독신으로 살던지 결혼하여 살든지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살아도 그렇게 외롭지 아니하고 정욕을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억제할 수 있으며 혼자 살므로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독신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이유로 갈라졌다면 두 사람이 함께 살므로 있을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피하고 자신이 성도의 바른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유롭게 혼자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욕망이 불같이 일어나서 그 불길이 자신을 살라버릴 것이면 자신의 영혼을 정결하게 보호하기 위해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또 결혼한 부부는 결혼을 한 이유로 자신이 감당해야할 의무를 충실히 해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결혼은 이기적으로 시작되기 마련이지만 성도들의 가정은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를 섬기는 정신으로 결혼 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보니 결혼관이 많이 바뀌어져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결혼하므로 마땅히 해내야 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의무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을 해야하겠습니다. 즉 내가 결혼하므로 내 권리를 찾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겠다는 잘못된 결혼관을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하겠습니다. 결혼하므로 음행에서 해방되는 것은 기초적인 것이요, 사랑과 화목을 통해 미래적인 천국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고 화목된 가정이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를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 니다.

 

혼자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요 함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므로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지라고 우리들에게 날마다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천국을 소망하며 이기는 삶을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혼자 살든지 아니면 함께 살든지 성도로서 살아야할 마땅한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