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본분 – 고린도전서 7:17-24

우리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줄거리를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사로라 불리는 한 거지가 온 몸에 종기가 나 있으면서 잘입고 잘먹는 한 부잣집 문간에서 부잣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살다가 나사로도 부자도 죽었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낙원에 갔으나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서 목말라서 물 한 방울으로라도 혀를 적셨으면 했다는 줄거리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회에서 어떤 종교 또는 빈부 귀천의 신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전연 구별되지 않으므로 자신이 나쁜 환경에나 낮은 신분에 있던지 자기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고 자기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직분을 성실히 감당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실 만복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본문이 주는 교훈을 바로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현재의 자신의 신분과 위치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해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본문을 3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20,24) [2]종교적인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18,19) [3]사회적인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21-23)입니다.

 

[1]맨 먼저 17절과 24절의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두고 볼 때에 각자가 예수를 영접하여 성도로 불림을 받을 당시의 형편과 처지는 각양 각색일 것입니다. 크게 나누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남자와 여자, 높은 신분의 사람과 낮은 신분의 사람, 백인 혹은 흑인, 나이 많으신 분과 젊은 사람, 건강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혼자 사는 사람,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분이 있을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받아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은사와 능력, 또 다른 생활 환경을 주셨다는 사실과 각자가 어떤 능력과 어떤 은사를 가졌던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평등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상에 있을 때의 능력과 신분은 전연 어떤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대통령인 자나 하급 공무원인 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높고 낮음의 의미가 없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과거의 경력과 과거의 형편은 다시 전연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는 자기의 능력이나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 보이려고 해서도 아니될 것이고 또한 자기의 낮은 신분이나 나쁜 환경을 남과 비교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된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 다른 환경과 신분을 주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신분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만 해도 교인들의 대다수가 노예 같은 낮은 신분의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간에는 신분상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의 부작용 때문에 교회 내에 갈등과 분쟁이 깊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의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성도를 부르시기 때문에 때로는 주인과 종을 한 교회에서 같은 형제가 되도록 부르시기도 하고 사장과 종업원을 같은 형제 자매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덜 익은 사장 성도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자기 종업원이 사장인 자기를 형제로 부르는 것을 여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고 또 덜 익은 종업원 성도는 사장 성도와 형제 자매관계가 됐다는 이유로 사장 성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문제는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 알지 못하고 사회적인 교회 분위기로 오염시키는 무리들을 위해 오늘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자도 하나님의 일군이요 낮은 자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충성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대통령이 됐다고 또 대통령의 아들이 되었다고 교만해져서 자기가 맡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실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는 낮은 신분이나 아주 나쁜 환경을 주셨다고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실망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포기한다면 역시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기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돈 많고 많이 배우고 또 권세가 당당했던 자가 죽어 천국에 가보니 세상에서 가난했고 못 배웠고 머리 나쁘고 못난 사람이 역시 천국에서 같은 방에 룸 메이트가 된 사실을 알았을 때에 불공평하다고 얼마나 억울한 생각을 할까 입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중얼거리겠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좋은 대학에 가려고 그렇게 애 쓸 필요도 없었고, 부자가 되려고 그렇게 피나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려고 그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어요? 대통령이 5급 공무원하고 한방을 써야 한다면 억울하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낮은 자는 높이고 높은 자는 꺾으시는 하나님의 공평함이기도한 것입니다. 이 평준화의 사실은 성경에 많이 써있고 설교를 통해 너무 많이 들은 것이나 세상을 자기 욕심대로 자기 기준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야 후회하는 인생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는 똑같은 방을 쓰게 되며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학벌도, 인종의 구별도, 지방색도 전연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분은 뜨거운 불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시려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지금의 환경과 은사에 따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지금 충실히 해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2] 두 번째로 18절과 19절의 종교적인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인 중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방인들과는 전연 구별된 자들임을 늘 자부하면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어 한 형제 자매인 것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방인들도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자기들의 과거 종교를 내세웠다고 합니다. 대다수 유대인들의 그런 분위기에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세상 처세를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는 이방인 도시에서는 오히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사실을 숨기려는 분위기가 되어 할례는 종교적인 의미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 언약에서는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복음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드리므로 마음의 할례가 필수적인 만큼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외식 적인 어떤 종교 의식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데 에는 전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드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받아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할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마음에 없는 어떤 종교 의식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3]세 째로 21절부터 23절까지의 사회적인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어서 노예들은 물건과 같이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는 신분에 속한 자들이었늗데 그런 노예들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성도가 되어 자유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형제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바른 교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남에게 속한 노예의 신분일지라도 마음은 복음을 받아드려 죄에서 해방된 상태가 되었음으로 현재의 남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만족한 일이 되므로 남의 노예가 된 상태 자체에 대해 신경을 쓸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에 전연 부족함이 없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도 노예였기 때문에 부족한 대우를 받게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노예는 몸으로서는 전연 자유가 없으므로 교회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본인이 더욱 교회에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을 하지 못할 경우도 있겠으나 자기 주인의 소유물이 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를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노예가 아닌 신분의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얽매이거나 사업을 이유로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는 자들을 변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노예 신분인 자들을 위로하고 최선의 신앙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들이나 노예나 별로 다를 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자유인들도 노예를 값을 치르고 사듯,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기 때문에 자유인들도 주님께 속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노예도 종이요 자유인도 종이므로 종이나 자유인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의 위치에서 주인 되신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교훈은 각자가 현재의 자기 환경에서 지금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건강이 나쁘든, 직장이 있든 직장이 없든 사회적인 여건과 신분과 상관없이 주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해내라는 것입니다. 있는 자도 교만하지 말고, 부족한 자도 자족하면서 충성을 다하는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나 능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은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하나님의 일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능력을 주를 위해 사용해보지 못하고 자기의 생활 수단만을 위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봅니다. 좋은 환경의 사람은 좋은 환경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을 해야 하겠고 나쁜 환경에 처한 자는 자기의 나쁜 환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을 못했다는 어떤 이유도 용납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도록 능력과 기회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그 능력과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대한 잘 활용하시고 하나님 앞에 서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