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에 바쳐진 음식과 자유 – 고린도전서 8:1-13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 사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이를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를 알기 위해 사도 바울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8장부터 10장까지는 두 번째의 주제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중에서 오늘 소개되는 8장은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대답인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가 오늘 날의 우리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시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일상 생활에서 매일 부딪히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고린도 도시는 크고 작은 많은 행사를 이방 신의 사원에서 거행하였으며 그런 행사 때마다 제물을 이방신에게 바치게 되고 바쳐진 그 제물을 나누어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비단 일반 개인 가정에 초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각 가정마다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제물을 드려서 그 가정을 축복해 주어야 하고 또 그 제물을 함께 먹어야 하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번성한 현대에서는 결혼식도 장례식도 기독교식으로 하는 것 같이 그 당시에는 모든 행사가 우상을 섬기는 중심의 행사였던 것입니다.

 

자연히 교회 내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절대 먹어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과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무리들로 나뉘어 서로 자기들이 옳다 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았던 고린도 교인들은 어떻게 처세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정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였다하더라도 내가 누리는 자유 때문에 나보다 지식과 믿음이 없는 내 형제의 마음을 거리끼게 하고 실족하게 할 염려가 있다고 한다면 차라리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사양하는 그런 성숙한 믿음 생활을 하라는 결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정답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자기의 자유를 사양하면서라도 나보다 믿음이 적은 내 이웃에게 덕을 끼치고 믿음에 도움을 주는 완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지식 위에 사랑으로 행하라(1-3) [2]우상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체(4-6) [3]이웃을 위해 내 자유를 사양하는 완숙한 믿음(7-13)입니다.

 

[1] 1절부터 3절까지의 지식 위에 사랑으로 행하라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 했습니다. 물론 이 지식이란 4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먹어도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있지 않다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에서 언급한 대로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 함같이 지식 자체만으로는 온전한 것이 아니며 지식이란 부분적인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어서 이런 지식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교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든 지식이 귀하고 좋은 것이나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높은 학식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교만으로 비추일 수가 있고 반대로 어떤 못 배운 자의 낮은 지식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교양과 아름다운 인격으로 반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참 지식이란 하나님과 이웃에게 연결되는 지식이어야 하며 당연히 하나님과 내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지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건물을 짓는 건축 자료라고 한다면 그 건축 자료들이 사랑이라는 접착제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빠진 지식이란 남의 눈에 교만으로만 나타나 자신의 인격에나 이웃의 신앙에 상처를 입히게 되나 사랑으로 범벅이 된 지식은 남에게 덕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지식과 학식이 자기 과시적이요 이기적인 자기 만족용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하게 활용되어지는 지식이어야 한다는 방향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4절부터 6절까지의 우상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지식에 대해 강조했는데 4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이론적으로 즉 지식적으로 우상과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4절에 보니 우상이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자들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44장 15절부터 17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나무가 자란 후에 그 나무를 베어 그 나무의 일부로 방을 따뜻하게 하는 화목을 삼기도 하고 그 나무로 떡을 굽기도 하면서도 또 그 나무의 일부를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자기 신이라 하여 자기가 만든 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기를 나에게 복을 내려주고 나를 구원하라 하느냐고 우상의 허상을 비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우상이란 실지로 없는 것인데 자기가 만들어 자기 신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실체가 없는 어떤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란 다른 음식과 전연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만든 많은 신이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를 창조하신 오직 한분이신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자이시오,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세상에 많이 있으나 실체가 없고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오, 우리들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들과 우리들의 구원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실체이시라는 것입니다. 4절부터 6절까지에는 우상의 허상과 하나님의 실상을 소개해 주고 있지만 이런 지식은 심지어 귀신들도 알고 있는 지식이므로 이 지식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전개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지식위에 사랑으로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3]세 번째로 7절부터 13절까지의 이웃을 위해 내 자유를 사양하는 완숙한 믿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자기의 확고한 신앙 철학을 소개하므로 기독교인에게는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가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양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람직한 믿음이요 완숙한 믿음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된 것은 한 영혼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교훈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함같이 비록 확고한 성경 지식이 없고 믿음이 연약한 한 영혼은 주님께서 피를 흘리실 만큼 중요한 존재이지만 음식을 먹고 먹지 않고는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므로 믿음이 약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일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확고한 성경 지식이 없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의 마음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우상을 섬기는 일과 관계가 되는 것으로 알고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믿음이 좋다는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 앞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먹게된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도 힘을 얻어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기는 하나 먹은 후에도 계속 죄를 지은 마음을 갖게되고 마음에 거리끼게 되어 시험이 들고 이를 계기로 믿음 생활을 포기할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만일 이런 경우라면 주님께서 피흘려 구하신 한 영혼을 나의 조심성 없음을 통해 망하게 한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주님께 죄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얻는 교훈은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갈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또 무엇을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내 이웃에게 덕이 되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자유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이웃에게 덕이 안되거나 또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자유라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자유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유익을 주는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직업이나 사업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남에게 덕이 되는 사업이거나 직업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음에 부담이 없는 직업이나 사업이어야 합니다. 리커스토아를 처음부터 시작을 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술집 종업원으로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마약장사나 고리대금업을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주일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사업체나 직장을 처음부터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시작한 사람들은 충분한 자기 변명을 준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이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어도 풍성함이 없고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인데 자기 도취에 빠져 기독교인으로서 덕이 되지 않은 음식을 먹으므로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 시험이 들도록 한다면 그런 자유는 마땅히 통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술 담배 먹어도 크게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믿음이 적은 자 앞에서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방자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거리낌을 주고 그들도 힘을 얻어 시행하다가 시험이 생겨 믿음 생활에 장애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어디에나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생활을 하던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땅히 남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하며 덕스럽지 못하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너무 사치스런 옷을 입거나 귀금속으로 사치하는 것을 사양해야 합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에게 덕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면 이를 중지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입이 달려 있는 한 무슨 말이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유스럽게 한 말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되지 못하는 말이라면 삼가야 합니다. 나만 좋다고 무슨 말이든지 내 뱉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통해 충고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 철학과 같이 내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하더라도 내 자유 때문에 나보다 믿음이 적은 자들이나 다른 이웃들에게 거리낌을 주고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면 평생 내 자유를 사양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눈에는, 우리들 귀에는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 퍽 거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나도 삼가야 합니다. 남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 자유를 누리기는 완숙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